이주현 ㅣ 정치부장
그에게서 노회찬의 냄새가 났다.
물론, 노회찬 원내대표 시절 비서실장을 맡기도 했으니 당연히 보고 배운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로부터 노회찬을 ‘감지’한 것은 비서실장을 하기도 한참 전인 2009년 <출발 3%>를 읽으면서부터였다.(그는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해 득표율 3%를 얻어 오세훈·강금실·박주선 후보에 이어 4등을 차지했다.) 한국 나이 마흔살에 펴낸 이 ‘자서전’은 그가 어떻게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또 어쩌다가 진보정당에 몸을 담게 됐는지, 그리고 돈이 안돼 아내에게 항상 ‘미안한’ 이 정치를 왜 계속하고 있는지 담백하면서도 경쾌하게 풀어놓았다. 1990년대 시위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만난 식당 할머니로부터 새벽 4시30분부터 일해도 한달에 20만원씩 받는다는 얘기를 듣고 하염없이 울면서 걸었던 기억, 단과대 학생회장 시절 정치투쟁만큼 학내 복지도 중요하다는 마음 때문에 화장실 물비누를 늘 챙기다가 ‘물비누 학생회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일화, 그리고 심신이 매우 지쳤던 어느 따뜻한 봄날 일요일 동네 놀이터의 평화로운 풍경을 보면서 얻었다는 깨달음―‘일요일에는 쉬라’― 등등. 요리와 음악과 꽃을 좋아하고 유쾌하고 따뜻하게 세상을 둘러봤던, 진보정당 가파른 고갯길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노회찬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선전한 총선 당시 대변인을 맡아 명성을 날리고 불과 36살에 서울시장 선거에 나설 만큼 그는 촉망받는 젊은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좀체 운이 없었다. 총선·재보궐선거 때 지역구에서 연거푸 4차례 떨어졌고 올해 총선 땐 처음으로 비례대표에 출마했으나 16번을 배정받아 낙선했다.
지난 9일 정의당 당대표 선거는 그가 2004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에 당선된 이후 무려 16년 만에 거머쥔 승리였다. 김종철 정의당 대표. 민주노동당 창당 20년 만에, 권영길·심상정·노회찬을 잇는 ‘진보 2세대’ 리더의 탄생이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원외의 한계를 딛고 꽤 큰 표차로 당선된 것은 ‘진보의 금기를 깨겠다’는 그의 외침에 당원들이 귀 기울인 결과라는 분석이 나왔다. 틀을 깨는 새로운 진보정치를 보고 싶다는 소망이 그에게 투영된 셈이다.
오랜만에 볕을 본 그이지만, 앞으로 일으켜 세워야 하는 정의당은 여전히 응달에 놓여 있다. 정당 지지율은 꼬마 키를 벗어나지 못한 게 수개월째. 거대 여당의 독주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고, 더불어민주당의 보수화를 저지하기 위해 정책적 공감대를 이룰 다른 야당도 부재한다. 예전처럼 자주파와 평등파가 격렬하게 대립하는 정파 갈등은 완화됐지만 그만큼 당원들의 정당일체감도 느슨하다. 최근 몇년 새 입당한 당원 다수는 ‘리버럴’한 성향에 가깝기 때문에 정의당이 민주당과 각을 세울 경우 흔들리며 떨어져 나갈 위험이 도사린다. 지난해 조국 사태 때 당원이 대거 이탈하는 가혹한 경험을 한 것은 민주당이 아니라 정의당이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망 사건 때 류호정·장혜영 의원으로부터 촉발된 ‘조문 논쟁’ 역시 정의당에 타격을 입혔다. 따지고 보면 민주당발 풍파에 몸살을 앓았던 것은 늘 정의당의 몫이었다.
더욱이 최근 ‘진보’의 최전선엔 정의당의 ‘기본’인 노동 정책에 더해 젠더 이슈가 놓여 있다. 리더의 강인함과 소통 의지가 없다면 세대·성별로 예민하게 갈리는 페미니즘 의제를 건강하게 확장시켜나가기 쉽지 않다. 당장 내년 4월 재보궐선거 성적표를 생각하면 그의 마음도 다급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행히, 그는 1998년 국민승리21부터 시작해 20여년 동안 풍파를 겪으며 단련해온 정치의 근육이 있다. 진보정당의 뿌리가 튼튼하기에 훨씬 유연하게 나아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마지막 발언권은 상대방에게’라는 카톡 프로필 글귀처럼, 그의 멘탈은 탄성이 좋다.
김종철은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진보 1세대 권·노·심의 장점을 이렇게 평했다. 권영길의 내면의 의지, 노회찬의 대중성, 심상정의 과감함. 그 셋이 일궈놓은, 그러나 아직은 척박한 토양 위에서 김종철은 다시 시작한다. 출발 4%!(한국갤럽 9월 3주차 정당 지지율 여론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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