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극작가 카렐 차페크가 1920년 초연한 연극 ‘아르.유.아르.’(R.U.R.)에서 ‘로봇’이라는 말을 처음 쓴 지 98년이 지났다. 지금까지 다양한 로봇이 공장과 군대 등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연극에서 그런 것처럼 집 안까지 들어오진 못했다. 세탁기나 텔레비전 같은 생활가전으로 로봇이 다가올 때는 언제일까? 내년을 주목해볼 만하다.
인간과 교감하는 홈 로봇이 주목받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차례로 위스콘신-메디슨대학의 ‘미니’, 안키의 ‘벡터’, 지보의 ‘지보’, 소프트뱅크로보틱스의 ‘나오’. 뒷줄은 보스턴다이내믹스의 ‘스팟미니’. 사진 속의 크기는 실제 비율과 다르다. 각 학교·기업 제공
요즘 청소년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어른이 많다. 스마트폰에 사로잡혀 깊이 있는 사고를 돕는 독서와 멀어진다는 우려다. 그런데 인공지능 로봇이 답이 될 수 있다고 하면 아이러니일까?
미국 위스콘신-메디슨대학교 연구진은 어린이 독서 도우미 로봇 ‘미니’의 실험 결과를 지난 22일
학술지 <사이언스 로보틱스>에 소개했다. 연구진은 만 10~12살 어린이 24명을 대상으로 로봇이 도울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어린이의 독서 패턴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분석했다. 로봇 미니는 약 34㎝ 크기로 책을 읽기 전에 눈을 맞추며 독서를 유도하고, 읽은 뒤 내용에 대해 토론하는 기능을 갖췄다.
연구진은 로봇을 각 가정에 나눠주고 2주 동안 관찰했다. 관찰 결과 독서량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횟수와 시간은 로봇이 없는 경우와 비슷했던 것이다. 하지만 독서 경험에 대해 물은 정성 평가에선 차이가 뚜렷했다. 로봇과 함께 책을 읽은 아이들이 독서를 더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 아이는 “미니가 행복해 하니까 책을 더 보고 싶다”고 연구진에게 말했다.
미니와 같은 식으로 가정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홈 로봇’이 우리 곁에 다가올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복잡한 일련의 행동을 프로그램에 따라 수행하는 기계’를 뜻하는 로봇이 우리 사회의 구성 요소가 된 지는 이미 수십 년이 지났다. 하지만 지금까지 대부분의 로봇은 공장이나 군대와 같이 우리 일상생활과는 동떨어진 공간에서 정해진 일만 했다. 그런데 최근 기계학습 등의 비약적인 발전과 더불어 인간의 가장 내밀한 공간인 가정으로 그 영역이 넓어지리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특히 최근 주요 기업들이 홈 로봇에 은밀히 투자하며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뉴스가 여기에 힘을 싣는다.
아마존의 최고경영자 제프 베조사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공개해 화제가 된 사진. 홈 로봇의 개발 구상을 내비치듯이 음성인식 스피커 에코와 로봇 청소기를 합쳐 놓았다. 출처 제프 베조스(Jeff Bezos) 인스타그램
미국 경제매체 <블룸버그>는 지난달 24일
“거대 기업이 홈 로봇에 돈과 인력을 쏟아붓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온라인 상거래를 바탕으로 무섭게 확장 중인 기업 아마존이 대표적이다. <블룸버그>는 회사 내부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아마존이 ‘프로젝트 비스타’라는 이름으로 이 분야에 공격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비스타는 이 회사의 하드웨어 담당 부서 ‘랩126’의 수장인 그렉 제르가 이끌고 있는데 담당 기술자와 개발자가 최근 갑절로 늘어 500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비밀 프로젝트설’에 부채질이라도 하듯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조스는 지난달 30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에코’가 납작한 청소로봇 ‘룸바’ 위에 붙어 있는 사진을 올렸다. 에코는 이 회사의 스마트 스피커로, 이 스피커를 통해 음성 비서 ‘알렉사’에게 온라인 쇼핑이나 음악 재생 등의 명령을 내릴 수 있다. 베조스는 “집에 왔더니 이런 게 있었다”며 자기 아이들의 터무니없는 장난처럼 사진을 올렸지만, 회사의 위상과 최근 뉴스 탓에 이 사진은 예사롭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같은 달 화제의 로봇 기업 보스턴다이내믹스는 내년 중반께 상용 제품을 내놓겠다고 발표해 기대를 모았다. 주인공은 로봇개 ‘스팟미니’다. 보스턴다이내믹스는 수천만 뷰를 기록하는 놀라운 움직임의 유튜브 로봇 영상으로 유명세를 타온 기업인데, 설립 뒤 26년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민간 상용 제품은 내놓지 못했다. 지난해 구글에서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로 팔린 뒤 드디어 침묵을 깨고 2019년을 시장 공략의 원년으로 삼은 셈이다. 스팟미니의 강점은 움직임에 있다.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는 기민한 다리 위에 잔을 쥐거나 문고리를 돌릴 수 있는 외팔을 달아 지금껏 나온 어떤 로봇보다 넓은 폭의 행동을 소화한다.
다른 기업들도 이미 달라진 기류를 감지했다. 로봇 강국 일본에선 소니가 수익성을 이유로 2006년부터 생산을 중단했던 로봇개 ‘아이보’를 인공지능으로 무장해 올해 새롭게 출시했다. 2013년 로봇 사업을 대폭 축소한 것으로 알려진 알파벳(구글의 모회사)도 조용히 홈로봇을 연구중이라고 <블룸버그>는 보도했다. 기술 도약을 꿈꾸는 중국에선 통신기업 화웨이가 학습용 로봇부터 시작해 홈 로봇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국내의 삼성과 엘지도 미래 산업으로 주목한다.
국제로봇연맹은 2016년 연구보고서에서 2014년 340만 대, 2015년 370만 대에 불과했던 세계 가정용 로봇 판매 대수가 2019년 3080만 대까지 늘어나리라고 전망했다.
성숙기에 접어든 지 오래된 산업용 로봇을 대신해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소셜 로봇에 업계가 주목한 지는 오래되었다. 하지만 이번이 과거와 다른 배경에 인공지능 기술의 비약적 발전이 자리잡고 있다. 구글의 자율자동차 개발을 이끈
서배스천 스런은 지난해 <와이어드>와 한 인터뷰에서 “과거의 로봇은 별로 안 똑똑한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와 결합해서 부서지기 일쑤였다. 소프트웨어가 충분히 똑똑해진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 물결은 이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소셜 로봇을 개발중인 장병탁 서울대 교수(컴퓨터공학부)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애플의 시리는 무형이었지만 아마존의 알렉사는 스피커라는 형체를 갖춘 ‘로봇’이었다. 이 차이는 큰 것”이라고 말했다. 따분한 스피커일지라도 형체를 갖고 집을 지키면서 다른 로봇 친구들이 가정에 진출할 교두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최근 속속 등장한 홈 로봇은 여기에 눈이 달리고(로봇 ‘지보’) 바퀴가 달리면서(로봇 ‘벡터’) 그 위에 몸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냉장고나 세탁기처럼 대중화 되려면 아직 넘어야 할 산은 많다. 대표적인 문제가 가격이다. 장 교수는 “홈 로봇이 대중화하려면 지금 가격의 10분의 1 수준까지 떨어져야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능에서도 가야 할 길이 멀다. 올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가전전시회(CES)에선 옷을 개는 로봇 ‘론드로이드’가 등장했는데 가격이 무려 1만6000달러(약 1800만원)에 달했다. 수건을 개는 것과 같은 단순한 일이 로봇에겐 복잡한 패턴 인식에서 정교한 관절 운동까지 최첨단 기술을 동원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더 높은 장벽은 사람의 신뢰다. 인간은 가까운 친구도 집에 함부로 들이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가격에 우수한 기능을 갖췄더라도 미지의 존재를 집에 들이는 것은 사람에게 큰 도전이다. 특히 인터넷이 촘촘하게 사회를 연결하면서 프라이버시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는 지금은 더욱 그렇다. 어린이의 독서를 돕는 미니처럼 기능은 놀랍지 않더라도 목적과 한계가 뚜렷한 로봇들이 오히려 강점을 지니는 이유다.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