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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미래

비명에 간 구한말 ‘전신선’ 개척자 김학우

등록 2018-10-15 06:00수정 2018-10-15 10:59

[박상준의 과거창]
열강의 또다른 전쟁터였던 통신망
고종 도와 독자적 선로 구축 힘써
격변 시기 분투하다 자객에게 희생
남로, 북로, 서로 전신선이 깔린 1893년 당시 한반도의 전신선로도.
남로, 북로, 서로 전신선이 깔린 1893년 당시 한반도의 전신선로도.
매년 한글날이면 여러 기념행사가 열리지만 ‘김학우 컨테스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에서 개최하는 이 행사는 금년에 13회째를 맞이했다. 김학우는 우리나라 최초로 한글 무선전신부호를 만든 인물이다. 흔히 ‘모스부호’라고 알려진 이 통신부호가 처음 공표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인 1888년.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 운영 법규인 ‘전보장정’에 실리면서이다.

1888년에 한글 모스부호가 나왔다면 그보다 앞서 개설되었을 전신선은 언제가 처음일까? 알려져 있기로는 1885년에 한성(서울)과 제물포(인천) 사이에 가설된 경인전신선이 최초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보다 1년 앞서 1884년에 부산과 일본 나가사키 사이에 깔린 해저케이블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가설된 통신선이다. 일본이 발주하고 덴마크의 회사가 부설한 것이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용할 일은 거의 없었지만.

해저케이블은 지금도 세계 통신망에서 중추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인터넷이 대표적인 예이다. 요즘은 지구상 어디를 가도 인터넷만 연결되어 있으면 음성통화를 할 수 있다. 국제전화를 쓰기도 하지만 각종 SNS의 음성통화나 화상통화 기능을 이용하면 별도의 국제전화 요금을 물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편리한 인터넷은 사실 대륙들 사이를 연결한 해저케이블 덕분에 유지되는 것이다. 한 나라 안에서는 무선 데이터 통신망으로 각자의 단말기가 이어지지만, 우리나라와 일본, 또는 우리나라와 미국 사이는 바다 밑에 깔린 광케이블로 인터넷 신호가 오간다. 인공위성을 통한 인터넷망도 있기는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들어서 제한적으로만 쓰일 뿐이다.

1884년에 부산과 일본 사이를 잇는 해저케이블이 생기고서 이듬해인 1885년에는 한성과 제물포 사이, 그리고 한성과 의주를 잇는 서로전신선이 완공되었다. 그런데 서로전신선은 당시 청나라(중국)의 요구로 건설된 것이었으며 관리 기관인 한성전보총국은 청나라 전보총국의 지국 개념이었다. 즉 우리나라 최초의 해저케이블과 지상전신선은 모두 외세의 필요 때문에 생겼던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전쟁은 흔히 미국의 남북전쟁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1861년부터 4년간 지속한 이 전쟁은 기차라는 대량 수송 수단, 기관총이라는 대량 살상 무기, 잠수함이라는 신무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신이라는 획기적인 통신 수단이 쓰인 첫 대규모 전쟁이었다. 그 뒤로 세계열강들은 통신망을 구축하는 데 열중했다. 군대는 물론이고 무역이나 행정 등에서 통신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를 깊이 인식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선들이 일본이나 청나라에 의해 건설된 것도 모두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우리나라도 통신망의 자주적인 구축과 관리의 중요성을 곧 깨달았다. 그래서 청나라가 만들었던 한성전보총국과는 별도로 조선전보총국을 설립한 뒤 한성과 부산을 잇는 남로전신선을 1888년에 가설했고, 다시 1891년에는 한성과 원산을 연결하는 북로전신선도 독자적으로 구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깊이 개입한 인물이 김학우였다.

김학우는 매우 독특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1862년 함경도에서 태어난 그는 10대 초에 가족과 함께 러시아로 이주했으며, 다시 10대 중반에는 일본으로도 건너가 살았다고 한다. 20대가 되어 귀국한 그는 러시아어와 일본어에다 중국어까지 능통해서 곧 주목을 받았고, 때마침 해외로부터 신문물들을 받아들여야 했던 조선 정부로부터 여러 관련 업무를 받게 되었다. 그중의 하나가 일본으로 가서 전신에 대해 연구하고 기술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일본에 다녀온 김학우는 1885년에 청나라가 서로전신선을 가설할 때 조선 측의 실무협의자로 참여하여 상하이 출장길에 오르기도 했으며, 그 뒤에는 다시 북로전신선 공사에도 깊이 간여하게 된다. 청나라에서는 원래 북로전신선 가설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으나 김학우가 조선이 독자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고종에게 간언하여 관철시켰으며, 그 때문에 청나라의 미움을 샀다고 한다. 결국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 그는 개화 세력들과 뜻을 같이하는 활동을 계속하다가 1894년에 자택에서 자객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의 나이는 고작 32세.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청일전쟁을 시작한 지 몇 달 뒤의 일이었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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