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에 있는 암호화폐 거래소 빗썸의 전광판. 암호화폐들의 거래가격이 표시돼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시작은 하나의 논문이었다.
2008년 10월31일,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이름의 사람이 암호 전문가들의 메일링 리스트에 9쪽짜리 문서를 공개했다. ‘비트코인: 피투피 전자 현금 시스템’(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이란 제목의 이 글은 전에 없던 암호화폐 시장을 창조해 냈다. 이 비트코인이 오는 31일 탄생 10돌을 맞는다. 붕괴하는 엘리트 금융 시스템의 대안이 되리란 기대 속에 태어난 비트코인은, 그 사이 무에서 한때 총 가치가 270조원을 넘어서는 호사를 누리다, 일확천금 미끼의 희대 사기극이란 오명까지 뒤집어 쓰는 굴곡의 터널을 지나왔다.
나카모토 사토시가 자신의 이론에 따라 첫 비트코인을 채굴한 날은 2009년 1월3일이다. 비트코인은 채굴 때마다 하나의 블록이 만들어지는데, 나카모토는 기념비적인 첫 블록에 “재무장관, 은행에 두 번째 구제금융 제공 임박”이란 글귀를 새겼다. 이 문장은 이날 영국 일간 <타임스>의 톱기사 제목으로, 당시는 미국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고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 프라임 모기지) 거품이 터지면서 세계 금융 시장이 붕괴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피어오르던 시기였다. 거대 투자은행의 탐욕과 중앙은행의 무력함이 빚어낸 위기는 암호화폐에 대한 열광을 불러오는 불씨가 되었다. 비트코인은 거래를 중계하는 중간 은행 없이 각 참여 주체가 분산 구조로 실질적인 금융 거래를 할 수 있는 최초의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전문가 집단 안에서 가능성이 일찍부터 주목받긴 했지만, 많은 이들에게 가치를 인정받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11년 초반까지도 1비트코인 가격은 고작 1달러 안팎을 오르락내리락 했을 뿐이다. 화폐의 핵심 기능인 상품 거래가 최초로 이뤄진 시기도 2010년 5월22일이었다. 당시 미국 플로리다주의 프로그래머 라스즐로 하니예츠가 파파존스 피자 2판을 배달시키고 1만 비트코인으로 값을 지불했다. 1만 비트코인의 현재 가치는 6400만달러(약 730억원)에 이른다. 하니예츠가 땅을 치고 후회할 이 날은 지금도 ‘비트코인 피자 데이’로 불린다.
그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실제 돈을 들여 사는데 관심 없던 이유는 눈에 보이는 실물도 없고 보증하는 기관도 없는 생소한 전자화폐였기 때문이다. 종이나 금속쪼가리라도 있는 돈과 달리 전자화폐는 해킹에 당하면 가치를 고스란히 날려버릴 위험이 있다. 비트코인은 설계상 거래에 참여하는 모든 컴퓨터 과반의 동의를 얻어야만 블록이 생성되기 때문에(즉, 채굴 또는 거래가 성사되기 때문에), 해킹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시스템이라고 소개됐고, 그것이 주목받은 이유였다. 하지만 여기에도 허점이 있다는 사실은 이후 여러 차례 드러났다.
가장 대표로 꼽히는 사고는 당시 세계 최대 비트코인 거래소였던 일본의 마운틴곡스(Mt.Gox)가 2014년 2월 당한 해킹이다. 마운틴곡스는 정체를 모르는 해커에 의해 다루던 물량 가운데 80%를 도난당했다. 이는 당시 가격으로 4억7700만달러(약 5400억원)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이로 인해 마운틴곡스는 파산했고, 대표인 프랑스인 마크 카펠레(Mark Karpeles)는 아직도 일본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이후 1천달러 안팎을 넘나들던 비트코인 가격은 지난해 5월께 사상 처음 2천달러를 돌파하면서 이상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파르게 치솟기 시작한 것이다. 그해 9월 중국이 급하게 거래 제한 조처를 했지만 아랑곳없이 12월18일 사상 최고가인 1만9511달러를 찍었다. 이로 인해 비트코인 투자로 백수에서 수백억원 자산가가 된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리게 되었다. 이는 비트코인이 괴짜의 ‘디지털 장난감’에서 어엿한 투자 또는 투기 대상으로 일반에까지 유명세를 날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과열 투기 양상에 놀란 세계 여러 정부는 올해 초부터 화폐인지, 가치가 매겨진 증권인지, 또는 금처럼 채굴하는 원자재인지 모호한 이 대상에 대한 규제안 마련에 본격 착수했다. ‘김치 프리미엄’이란 말이 회자할 정도로 특히 가격 폭등을 경험한 우리나라는 올 1월 실명제 도입을 시작으로 규제 고삐를 죄었다. 미국은 사기성 암호화폐공개(ICO)나 마약·무기 등의 은밀한 결제 수단 활용 등 부작용을 어떻게 차단할지 고심하고 있고, 중국은 암호화폐 거래를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비트코인은 블록이 늘어날수록 채굴에 더 큰 컴퓨터 연산이 필요하도록 설계됐는데, 이 때문에 막대한 전력 소모와 환경 오염을 부추긴다는 비판도 사고 있다.
이 와중에 창조자 나카모토 사토시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점도 흥미롭다. 그는 모든 교류를 나카모토라는 필명으로 인터넷을 통해 나눴으며 실제 만났다는 이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포브스>, <뉴스위크> 등 각종 언론이 나카모토의 정체가 드디어 드러났다며 “특종” 보도를 연달아 내놨지만 지목된 이들은 모두 부인한 상태다. 일본인으로 추정되는 이름이지만, 그가 구사한 영국풍의 완벽한 영어와 주 인터넷 활동 시간, 영국 신문 <타임>을 인용한 첫 블록 등을 봤을 때 옛 영연방 국가 출신이라는 추정이 가능한 정도다. 놀라운 프로그래밍 실력을 봤을 때 개인이 아닌 그룹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는 약 100만 비트코인을 소유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현재 가치로 약 64억달러(7조3천억원)에 달한다.
영욕의 세월을 보낸 비트코인의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10년이 지났지만 평가는 여전히 극과 극을 달린다. “다단계 사기”(유럽중앙은행), “제대로 된 쥐약”(워런 버핏)이란 비판이 있는가 하면, “장래성 있다”(벤 버냉키 전 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 “금보다 낫다”(노벨경제학상 수상 폴 크루그먼)는 낙관도 있다.
비트코인은 2100만 코인까지만 채굴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지난 4월까지 약 1700만 코인이 채굴됐다. 숫자가 정해진 자원이기 때문에 수요에 따라 가격이 급등락할 위험이 있는 셈이다. 이런 위험성은 정부와 관계자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난해와 비슷한 이상 현상은 앞으로 쉽게 일어나지 않을 전망이다. 일부 투자자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검토 중인 비트코인의 상장지수펀드(ETF)에 대한 허가가 떨어지면, 안정적인 투자처로 자리 잡아 다시금 투자 붐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한다. 상장지수펀드는 실물 가격과 연동되는 투자 상품으로, 비트코인 가격과 연동되는 상장지수펀드가 나오면, 실제 비트코인을 사면서 발생하는 위험과 번거로움 없이 투자가 가능하다.
비트코인에 대한 논란과 달리 그 핵심 기술인 블록체인의 가능성은 보다 널리 인정받는 편이다. 골드만삭스, 제피(JP)모건 같은 거대 투자은행이 블록체인을 공들여 연구하는 것은 상징적이다. 비트코인을 설계하는 코드는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나 이를 응용해 중앙관리자가 필요 없는 분산형 플랫폼과 새로운 코인을 만들 수 있다. 스마트 계약(이더리움), 저널리즘 혁신(시빌), 시장 예측(오거) 등이 대표 사례다. 이렇게 만들어진 비트코인의 ‘동생들’을 통틀어 ‘알트코인’(Altcoin)이라고 하는데, 맏형이 뿌린 암호화폐의 씨앗을 동생들이 열매로 맺을지 많은 이들의 관심이 모인다.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