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체금속의 전자구조가 발견된 결정 고체와 액체금속의 계면. 바닥 부분에 원자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물질은 결정 고체를 나타내고, 그 위에 불규칙하게 분포하는 액체금속은 표면에 도핑된 알칼리 금속 원자를 나타낸다. 김근수 연세대 교수 연구팀 제공
“10여년 전 연구실 책장에 꽂아둔 고서 몇 권이 연구의 실마리가 돼 60년 전 제시된 이론을 실험으로 증명할 수 있었어요.”
1960년대 노벨상 수상자들이 수립한 ‘액체금속의 전자구조’ 이론 모델을 실험으로 증명한 논문을 유명 과학저널 <네이처> 4일(현지시각)치에 싣게 된 김근수 연세대 물리학과 교수는 이날 <한겨레>와 통화에서 “다른 연구를 하다 얻은 이상한 결과를 해석하지 못해 고민하다 책장에 꽂혀 있는 ‘액체금속의 전자구조’라는 제목의 고서들을 보면서 연구 단서를 얻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 연구팀이 밝혀낸 것은 1977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필립 앤더슨과 네빌 모트가 수립한 액체금속의 전자구조 이론이다. 두 과학자는 원자 배열이 규칙적인 고체금속의 전자구조와 달리 액체금속은 전자구조가 독특하고 불완전한 에너지 간극을 가진다는 이론을 세우고 1968년 이를 ‘유사갭’이라고 이름 지었다. 액체금속은 수은이나 소듐(나트륨), 리튬 및 소듐-포타슘(칼륨) 합금 등 물처럼 자유자재로 형태를 바꿀 수 있는 금속을 말한다.
많은 과학자들이 액체금속을 직접 측정해 이 독특한 전자구조를 밝혀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김 교수팀은 과거 방식과 달리 검은인(흑린)이라는 결정 고체 표면에 소듐, 포타슘, 루비듐, 세슘 등 알칼리 금속을 뿌린 뒤 장비를 이용해 측정한 결과 앤더슨과 모트가 예측했던 전자구조와 유사갭을 발견했다.
연세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마친 김 교수는 미국 로렌스버클리국립연구소에서 박사후연구원(포스닥)을 지냈다. 2013년 귀국해서는 흑린의 전자구조 연구에 집중했다. 김 교수는 “흑린 표면에 알칼리 금속 원자를 도핑할 때 독특한 전자구조와 유사갭이 나타난다는 실험 결과를 2017년에 얻었지만 해석이 어려웠다”고 했다. 그는 “번개 치듯 갑자기 깨달은 것은 아니지만 아이디어를 구체화해가는 과정에 서가에 꽂힌 책들이 실마리를 줬다. 스티브 잡스가 얘기한 점과 점의 연결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애플 창업자인 잡스는 2005년 스탠포드대 졸업식 연설에서 “내가 지금 한 일이 인생에 어떤 점을 찍는 것이라고 한다면 미래에 그것들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뒤 돌이켜 보니 그 점들은 이미 모두 연결돼 있었다”고 했다.
해석의 난관은 극복했지만 <네이처> 논문 통과에는 또다른 장벽이 있었다. <네이처>와 <사이언스> 같은 과학저널의 논문 심사 과정에는 연구소 이름의 프리미엄이 작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령 김 교수가 박사후연구원을 보낸 로렌스버클리국립연구소에서 논문을 냈을 경우와 ‘변방’인 한국 대학에서 논문을 냈을 경우 논문 심사위원들의 태도에 차이가 느껴진다는 얘기다. 김 교수는 지난해 9월 논문을 제출했지만 세 명의 심사위원 가운데 한 명이 추가설명을 요구해왔다. 5페이지짜리 논문을 위해 10페이지짜리 설명을 두번씩 보내고 나서야 올해 5월 논문 게재가 승인됐다. 김 교수는 “국내에서는 유명한 대학이어도 외국에서는 편견을 가지고 바라본다. 오직 논리와 투지로 편견을 극복할 수 있었다“며 웃었다.
김 교수는 “유사갭이라는 용어는 고온초전도 현상에서도 등장한다. 이번 연구가 액체금속에서의 유사갭 원인을 밝혀낸 것이어서, 고온초전도의 유사갭 원인과 같다면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온초전도 현상의 원리를 규명해 궁극적으로 상온초전도를 개발할 수 있으면 에너지 손실 없는 송전이 가능해져 자기부상열차나 전력수급난 해결 등 실용 측면에서 큰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이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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