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혁의 의학과 서사(52)
연상호의 ‘반도’…파멸의 운명에 저항하기
연상호의 ‘반도’…파멸의 운명에 저항하기
영화 ‘반도’의 한 장면. 네이버 영화
‘부산행’과 ‘반도’, 같고도 다른 점 감독의 전작 ‘부산행’과 세계관, 설정이 겹치지만 ‘반도’는 지향점이 다르다. ‘부산행’이 부산으로 달려가는 케이티엑스(KTX)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좀비와의 사투를 그린다면, ‘반도’는 좀비로 뒤덮인 땅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묻는다. 따라서, 전작이 좀비를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추었고 이후 넷플릭스 ‘킹덤’ 등으로 이어지는 케이(K)-좀비의 장르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것과 달리, ‘반도’에서 좀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반도’의 좀비는 적대적인 환경, 이를테면 언제 튀어 오를지 모르는 용암과 같다. 주인공 정석(강동원 분)은 군인으로 멸망한 이 땅에서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난민 지위를 인정해주지 않는 국제 정세와 탈출하는 과정의 트라우마 탓에 자리를 잡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피할 수 없는 제안이 들어온다. 남한에 몰래 들어가서 좀비들을 피해 돈다발을 실은 트럭을 가지고 나오라는 것. 트럭을 발견하는 것까진 별문제 없었으나 그와 동료들은 의외의 공격을 받고 트럭을 빼앗긴다. 그것은 잔존해 있던 631부대의 소행으로, 부대원들은 생존을 위해 인간성을 포기하고 즉물적인 생에만 연연하고 있다. 정석을 구한 것은 민정(이정현 분)의 가족 준이(이레 분)와 유진(이예원 분). 민정은 정석에게 아이들을 이곳에서 빼내어 달라고 요구하고, 트럭을 되찾아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631부대로 잠입해 들어간다. _______
절망적 운명 앞에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 영화는 관객에게 그리 호의적인 평을 받진 못했다. 신파 연출이 너무 부각되고 장면의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것, 좀비가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등에서 상당한 비판을 받은 탓이다. 모두 타당한 문제 제기지만, ‘반도’가 드러내고자 한 지점이 기존의 좀비 영화와는 다른 곳에 있음에도 ‘부산행’과의 연결성 때문에 좀비가 부각되면서 관객들에게 실망을 안겨준 탓이 크다. 큰 윤곽에서 말한다면, ‘반도’는 한국판 ‘매드 맥스’라 말할 수 있다. 멸망 이후의 세계를 그리려 했던 감독은 그 방법으로 좀비 바이러스를 택했고, 다른 해결책이 없이 빠르게 퍼진 바이러스 탓에 남한은 바로 망해 버린다. 이게 말이 되느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는 부분인데, 감독은 멸망을 운명으로 설정해 놓았기에 작품에서 국가가 망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연 감독이 그리고자 하는 것은 운명을 피하기 위한 대처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인간이 보이는 반응이다. 바이러스를 어떻게 막을 수 있는지, 좀비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에 감독은 관심이 없다. 그것은 자연재해처럼 우리를 둘러쌀 것이고, 피할 방법은 없다. 감독은 그런 절망적인 운명 앞에 등장인물들을 던져 놓음으로써,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려 한다.
웹툰 ‘지옥’의 한 장면. 네이버 시리즈온
지금, 우리에게 ‘가족’이 주는 의미 결국 가족뿐이라는 결론이라면 너무 촌스러운 것은 아닐까. 특히, 가족 또는 혈연이 많은 것을 망가뜨린 이곳에서 그래도 가족이 답이라고 말하는 것은 후퇴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일단, 영화는 우리가 평소에 너무도 당연히 의지하는 자본, 권력, 폭력을 반대항으로 제시하고, 그것이 우리를 구할 수 없음을 역설한다. 특히, 운명처럼 닥쳐오는 멸망 앞에서 자본과 힘은 어떤 구원도 제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으론 흔히 반복되어 온 자연 앞 인간의 무력함을 반복하는 일일 뿐이다. 가족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면, 그것이 지니는 속성이 우리가 당면한 상황에서 무엇을 일깨우는지가 해명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코로나19 팬데믹에서 가족이란 무엇인가. 만약 이런 다층적이고 광범위한 재난에서 그나마 가족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가족 이기주의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런 주장을 굳이 공들여 말할 필요는 없다. 아니, 그런 주장이라면 오히려 배격해야 한다. 팬데믹 앞에서 가족만, ‘우리’만 앞세우는 것이 무의미함을 1년이 넘는 시간은 잘 보여주었다. 나만 안전하다고 해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전, 나만 지키면 되었던 20세기의 재난들과 달리, 기후 위기와 팬데믹은 남의 안전을 지켜야 내가 안전할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단지 ‘사랑’이라면, 가족보다는 연인을 등장시키고, 고전적인(예컨대, ‘타이타닉’이 보여준 것과 같은) 연인을 지키기 위한 희생을 전시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적어도 인간적인 사랑은 그것이 숭고한지와는 별개로, 엄청난 힘을 자랑하는 파괴 앞에서 해답이 될는지 알기 어렵다. 내 목숨을 바쳐서 타인을 구하는 것은 인간, 더구나 협소한 범위의 인간을 향할 뿐이기에.
‘반도’의 가족은 혈연공동체가 아닌 돌봄공동체다. 네이버 영화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