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혁의 의학과 서사(54)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의 이야기 듣기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의 이야기 듣기
에곤 쉴레의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1912).
한국의 의료 제도, 그 양과 음 이런 방식이 모두에게 맞지는 않을 것이다. 나 또한 한 사람의 의료인으로서, 몸의 병이든 마음의 병이든 병이 있다면 빨리 병원에 가는 것이 일차적인 선택임을 조언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국 사회, 발전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 온 이 땅에서 사는 한 사람으로선 그게 무조건적인 해결책은 아닐 수 있음을 또한 알고 있다. 국가 주도로 성립된 한국의 의료 제도는 노동력 유지라는 산업 사회의 목표와 살려야 한다는 전통 사회의 가치를 최상위에 놓았고, 단기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치료에 대부분의 자원을 투여했다. 덕분에, 관리나 돌봄, 지지 같은 장기적이고 당장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여러 의료행위는 여전히 명목만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제도로 인한 의료의 풍경은 두 가지로 살필 수 있다. 하나는 빠르고 효과적인 의료 행위를 높은 접근성으로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엄청난 비용을 청구하는 미국이나 치료받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영국 등에 비교하여 한국의 의료 제도를 칭찬하는 것은 이런 측면을 부각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런 효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의료의 여러 영역은 아예 ‘의료 제도’의 영역에서 취급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19를 배경으로 개인의 건강정보문해력(healthcare literacy)을 조사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서[1]에 따르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 대상자의 43.3%가 건강정보문해력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성별이나 연령 등의 요인에서 유의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말인즉슨, 우리나라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건강에 관한 정보를 잘 모르고, 관련 내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우리의 의료 제도가 낳은 귀결이라고 생각한다. 제도 차원에서 시민에게 건강과 질병에 관한 내용을 알리는 것은 일단 안중에 없는 탓이라는 것이다. 국가가 현대 의학을 통해 모든 질병을 다 해결해 줄 수 있다면 그래도 괜찮을 수 있다. 하지만 국가가 책임질 수 있는 범위의 한계는 명확하다. 국가 재정을 다 의료비로 돌릴 수 없으므로, 건강보험공단은 가능한 한 ‘싸게’ 국민을 치료할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의료에 요구하는 수준은 점차 높아지지만 의료 서비스는 발전하기 어렵다. 현대 의학 자체도 한계가 있다. 정신질환이나 장애가 대표적인 영역일 것이다. 100여년 전에 비하면 각 치료 분야에서 장족의 발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그 치료가 완벽한 답이 되기는 어려운 그런 상황 말이다.
미괴오똑? 미괴오똑!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미괴오똑’이라는 줄임말로 홍보되었다)은 그런 상황이 낳은 치열한 고민을 담은 책이다.[2] 아직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여성 우울증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책은 두 가지 문제의 교차점을 탐색한다. 하나는 여성의 우울증에 관한 담론이다. 남성에 비해 여성에서 우울증이 훨씬 많이 나타나는 현상을 단지 호르몬 탓으로 설명하는 생물의학(biomedicine)적 접근을 저자는 불편해한다. 다른 하나는 한국 사회 속 여성의 고통이다. 우울증을 앓는 여러 여성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으면서, 저자는 여성에게 주어진 차별과 성폭력, 역기능 가정 등의 문제를 전면에 드러내고자 한다. 우울증과 고통이라는 두 주제가 뒤섞여 있는 책의 내용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어딘가에선 여성을 차별하는 사회에 대한 저자의 맹렬한 분노가 불타오르다가도, 이런 상황이 단지 사회적 구조의 문제로만 설명될 수 없다고 지적하는 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책이 부족함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문제가 그만큼 복잡다단한 지층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것을 탐사하는 과정에서 여러 균열을 넘나들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을 단일의 서사로 정리한다면, 오히려 그것은 여성의 우울증 경험이 지니는 다양한 측면을 하나로 정리해버리는 폭력이 될 것이다. 잠깐, 여성 우울증에 대한 하나의 서사라. 우리가 너무도 익숙한 것이 그런 단일의 서사가 아니었나. 이를테면,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는 서사. 그렇다면 여성 우울증은 개인의 사소한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는 예민한 이에게 찾아오는 마음의 감기다. 누군가는 업무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결국 우울증에 걸리고, 그것이 업무에 지장을 주게 되어 퇴사한다. 그렇다면 이 여성은 그저 마음의 감기를 시름시름 앓다가 회복할 만큼의 체력이 모자란(또는 우울증에 약한 심리적 소인을 타고난) 불운을 안고 있을 뿐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정신건강의학과의 접근 장벽을 낮추기 위한 전략이었던 ‘마음의 감기’라는 표현을 이제는 수정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적어도 책에 등장하는 여러 인터뷰 대상자들의 말은 그것이 잘못 구성된 서사임을, 그렇게 접근하는 것은 여성의 우울증을 이해하는 틀린 방식임을 방증한다. 우울증에는 다양한 요인이 있으며, 그것은 때로 사회적이기도 하고 생물학적이기도 하며 관계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여러 요인을 설명하고 서술하는 다양한 서사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이 뒤얽힌 사회적 서사를 통해 여성 우울증을 서술한 것은 하나의 좋은 예시가 된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표지. 예스24
다른 삶을 창안하라 우울증과 고통의 서사를 듣고 확인하였다. 물론 확인하는 것도 무척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많은 경우 ‘치료받아야지’는 해결책이 아닐 수 있는데, 그것은 앞서 살핀 한국의 의료 제도가 지닌 특성 때문이다. 어떤 면에선 그렇게 자랑할 만한 한국의 의료 제도는, 이를테면 여성 우울증을 다루는 데 그렇게 능하지 않다. 수많은 의료인이 노력하고 있으나, 개인적인 역량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코로나19에서 의료인들의 노력 봉사를 강조하던 국가의 모습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의료의 여러 영역에서 반복되어 나타나 왔다. 정신건강의 영역은 특히 더 그렇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들 영역은 보통 치료한다고 다시 노동력을 회복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어 국가가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서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이 고통을 서술하며 도달하는 결론은 “다른 삶의 모습을 만들기”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가용한 자원을 끌어오거나 현재 주어진 제도에서 답이 나오지 않음을 여성 우울증(조울증) 당사자인 저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책은 자기 돌봄을 언급하며 다른 삶의 양식을 창안할 것을 언급한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나의 상태를 고백한 것은 우리가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에 관한 하나의 양식을, 또는 고민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공황 장애와 우울증은 다르고, 처음 언급했던 것처럼 질병을 삶의 동력으로 활용한다는 것이 범용한 방식은 아닐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책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삶을 고안해야 하며, 그 삶은 이미 삶에 뿌리박은 질병을 없다고 부정하거나 사고에서 배제하는 대신 질병과 함께하고 그것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작업이다. 그 방식과 귀결은 모두에게 다를 것이나, 나는 생각한다. 철학자 푸코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를 무엇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그 자기 배려 또는 자기 돌봄의 길에서, 질병을 대하는 다른 방식들이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고.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참고문헌
1. 최슬기. 건강정보문해력(헬스리터러시) 제고 방안 연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20년 12월.
2. 하미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동아시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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