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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과학

말보다 500년 앞서 수레 끌던 고대 동물 ‘쿤가’의 정체

등록 2022-01-18 09:58수정 2022-01-18 19:00

가축당나귀-야생당나귀 교배한 ‘쿤가’
메소포타미아 문명 발원지 수메르서
기원전 2500년 전쟁터에 투입돼 활약
노새보다 먼저 등장한 최초 잡종가축
수메르의 병사가 탄 네바퀴 수레를 끄는 동물 그림. ‘우르의 깃발’이라는 나무상자에 새겨진 그림 중 일부다. 영국박물관/프랑스국립과학연구원 제공
수메르의 병사가 탄 네바퀴 수레를 끄는 동물 그림. ‘우르의 깃발’이라는 나무상자에 새겨진 그림 중 일부다. 영국박물관/프랑스국립과학연구원 제공

바퀴 달린 수레는 서남아시아의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메소포타미아(‘강과 강 사이’라는 뜻) 문명을 일군 수메르의 발명품으로 알려져 있다. 수메르는 수레를 이용해 이전보다 훨씬 많은 물자를 더 빠르게 운송할 수 있게 됨으로써 융성해갈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그러나 ‘비옥한 초승달 지역’으로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평원에서 4500년 전 처음 이 수레를 끌던 가축은 말이 아니었다.

말보다 500년 앞서 등장한 이 땅딸막한 가축은 빠르고 힘이 좋았다. 당시 만들어진 설형문자 점토판에는 ‘쿤가’(kunga)라는 이름의 교배 동물을 키워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쿤가는 당나귀의 최고 6배에 이를 정도로 값비싸고 귀한 가축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덩치가 큰 수컷 쿤가는 왕과 귀족, 전쟁터의 병사나 지휘관이 탄 수레를 끌었으며, 덩치가 작은 수컷과 암컷은 쟁기를 끄는 용도로 쓰였다. 쉽게 구하지 못하는 가축이어서 왕실 결혼 때 지참금으로도 한몫했다. 그러나 쿤가가 정확히 어떤 동물인지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4500년 전 시리아 북부의 한 왕가 무덤에서 나온 말과 동물의 유골. 미 존스홉킨스대/프랑스국립과학연구원 제공
4500년 전 시리아 북부의 한 왕가 무덤에서 나온 말과 동물의 유골. 미 존스홉킨스대/프랑스국립과학연구원 제공

암컷 가축당나귀와 수컷 야생당나귀의 잡종

유전학자, 고고학자, 고생물학자로 구성된 연구진이 베일에 싸였던 이 가축의 정체를 밝혀냈다.

프랑스국립과학연구원(CNRS) 자크모노연구소 과학자들은 4500년 전 시리아 북부의 고대도시 움엘마라(Umm el-Marra)의 한 왕가 무덤에서 출토된 25마리의 동물 유골에 대한 유전자 분석을 통해, 쿤가가 이종교배를 통해 만든 잡종 당나귀임을 확인했다고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발표했다. 2006년 발굴된 이 유골은 과거 미국 동물고고학자들이 형태학적 특징과 고고학적 증거를 토대로 쿤가의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이 지역의 더운 날씨와 오랜 세월로 인해 게놈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연구진은 산탄총 염기 분석법(DNA를 무작위로 잘게 조각내 분석한 뒤 컴퓨터로 짜맞추는 방법)과 PCR(중합효소연쇄반응)을 이용한 유전자 증폭 기술을 이용해 유전정보를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연구진은 이어 이 동물의 유전자를 같은 과의 다른 동물 즉 말과 가축 당나귀, 시리아야생당나귀 유전자와 비교했다. 야생당나귀 유전자는 터키 남동부 동남아나톨리아지역에 있던 인류 최초의 신전 ‘괴베클리 테페’에서 발굴된 1만1천년 전 유골과 오스트리아 비엔나 동물원에 보관돼 있는 유골에서 확보했다.

분석 결과 움엘마라의 쿤가는 가축화한 암컷 당나귀(Equus Africanus asinus)와 수컷 시리아야생당나귀(Equus hemionus hemippus)를 교배시켜 만든 1세대 잡종 동물로 드러났다.

쿤가는 가축화한 당나귀(왼쪽)와 시리아야생당나귀(오른쪽, 1920년대 멸종)의 교배 잡종이다. 오른쪽 사진은 1915년 비엔나 동물원에서 찍은 마지막 시리아야생당나귀의 모습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쿤가는 가축화한 당나귀(왼쪽)와 시리아야생당나귀(오른쪽, 1920년대 멸종)의 교배 잡종이다. 오른쪽 사진은 1915년 비엔나 동물원에서 찍은 마지막 시리아야생당나귀의 모습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고대 수메르인들의 상상력이 놀라워”

연구진은 “이는 암말과 숫당나귀의 교배종인 노새보다 훨씬 앞선 때로, 쿤가는 인류가 최초로 만들어낸 동물 잡종 사례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잡종 동물로 알려진 노새는 3000년 전 터키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번 연구를 이끈 에바-마리아 가이글 박사는 “가축 당나귀는 온순하지만 느리고, 시리아야생당나귀는 빠르지만 거칠었다”며 “둘 사이에서 태어난 쿤가는 둘의 장점을 물려받았다”고 말했다. 쿤가는 당시 이 지역에 분포해 있던 야생마보다도 훨씬 빨랐다고 한다. 그는 “고대 수메르인들이 잡종 번식과 같은 복잡한 방식을 상상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야생 당나귀를 사냥하는 모습. 기원전 645~635년께 앗시리아 니네베에서 제작된 부조 그림이다. 영국박물관/프랑스국립과학연구원 제공
야생 당나귀를 사냥하는 모습. 기원전 645~635년께 앗시리아 니네베에서 제작된 부조 그림이다. 영국박물관/프랑스국립과학연구원 제공

노새처럼 자체 번식 못하고 말에 밀려나

쿤가는 노새와 마찬가지로 자체 번식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쿤가를 얻으려면 매번 교배를 시켜야 했다. 그래서 수메르인들은 당시 나가르(지금의 시리아 텔브락) 지역에 종마로 쓸 야생당나귀를 잡아 가둔 번식 센터를 따로 두었다.

수메르인들로부터 귀한 대접을 받았던 쿤가는 4000년 전 러시아 남부 평원지대에서 가축화한 말이 이곳으로 수입되면서, 쉽게 번식할 수 있는 말에 밀려나고 말았다.

쿤가의 종마 노릇을 했던 시리아야생당나귀는 1920년대에 멸종했다. 이번 유전자 비교 분석에 사용한 비엔나 동물원의 당나귀가 이 종의 마지막 남은 두 마리 가운데 하나였다. 다른 한 마리는 초원에서 총에 맞아서 죽었다고 한다. 이번 연구로 쿤가는 이제 영원히 재현할 수 없는 동물임이 확인됐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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