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과학의 많은 의제들은 정치적이다. 핵발전, 기후 위기, 유전자 조작, 심지어 코로나19 대응마저도 우리는 이것이 과학의 일인지, 정치의 일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음을 느낀다. 그리고 여러 경우에 과학이 외치는 선지자의 외침을 정치가 자신의 이익 때문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생각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영화가 2021년 말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한 ‘돈 룩 업’이다. 세계를 멸망시킬 혜성이 다가옴을 발견한 천문학자가 위기를 경고하고 대응을 촉구하지만, 물질과 권력에 눈먼 정권이 이를 무시하고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영화는 일단 미국 전 트럼프 정부가 이권을 우선하여 명백한 기후 위기를 무시한 일을 비꼰 것이기에, 영화가 비판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선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과학 대 정치라는 구도가 타당한지는 의문이다. 대립 구도가 생긴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고 싶지는 않다. 얼마든지 대립할 수 있다. ‘돈 룩 업’은 말하는 것 같다. 과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기제이기 때문에 절대 틀릴 수 없고, 정치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그런 과학의 추구를 왜곡하기만 하는 사회의 암적 존재라고.
의도하진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구도가 ‘돈 룩 업’의 문제, 아니 오류다. 과학의 진리 추구 방식은 더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 과학자가 자연의 비밀을 깨달아 세계에 드러내는 것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현재 과학이 옳음을 인정하는 방식은 영화가 그토록 강조하는 것처럼 동료 평가이며, 어떤 발견이 동료 평가와 과학 공동체의 검토를 통해 인정받는다는 것은 과학의 발견 과정 또한 정치적임을 의미한다. 정치가 상호 이해의 조정과 사회 질서의 유지를 위한 교섭과 정략의 활동이라는 의미라면 말이다. 이런 생각에 접근하기에 앞서, 영화의 내용을 살짝 검토해보자. 그 다음, 과학에 정치적 활동이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생각을 살펴보자.
미시간주립대 천문학과 민디 교수(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와 박사 과정생 디비아스키(제니퍼 로렌스 분)는 새로운 혜성을 발견하고 기뻐하지만, 그 궤도가 지구를 향하고 있으며 충돌 시 인류가 멸망할 것임을 발견하고 나사(NASA)에 이 사실을 보고한다. 지구방위합동본부 부장 오글소프 박사(롭 모건 분)는 이들을 대통령에게 데려가 보고하지만, 대통령(메릴 스트립 분)과 참모진은 선거 관련 문제에만 정신이 쏠려 있어 관심이 없다. 오히려 지방대 과학자가 뭘 알겠냐며 코웃음 치기까지 한다. 셋은 분노하지만, 아무런 힘이 없다.
얼마 뒤, 대통령이 이들을 다시 찾아내어 다른 ‘유명’ 과학자들에게도 확인받았다며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들은 혜성 대응이 대통령과 현 지도부의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했음을 안다. 동기야 어쨌든, 혜성을 파괴해 지구를 구할 수 있다는 것에 셋은 안심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계획에 대기업 회장 피터(마크 라이런스 분)가 끼어들면서 혜성 파괴 계획은 좌절된다. 피터는 혜성에 엄청난 자원이 들어 있다며 혜성을 조각으로 분할하여 지구에 연착시키는 계획을 실행하려 하고, 민디 등은 그 과정이 동료 평가를 받지 않은 위험한 계획임을 주장하며 반대하지만 오히려 밀려나고 만다.
좌절한 셋은, 이제 가까워져서 혜성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음을 깨닫고 “룩 업(Look Up)” 운동을 펼친다. 하늘을 보라, 저기에 혜성이 있다. 대통령을 위시한 보수파는 그에 반대해 “돈 룩 업” 운동을 전개한다. 저들을 믿지 말라, 우리는 혜성을 우리 모두의 이익을 위해 활용할 수 있다. 둘 중 승리하는 것은 누구인가?
‘돈 룩 업’은 과학이 현실 정치에 의해 좌절되는 상황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영화에서 지구 멸망 혜성을 ‘바라보면 안 된다’고 외치는 것처럼, 현실에서도 정치가 사람들에게 단지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명백한 과학적 사실을 ‘바라보면 안 된다’고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기후 위기일 텐데, 우리는 이미 기후 위기로 산불, 태풍, 고열과 냉해 등 많은 이상 징후를 겪고 있음에도 일부는 가일층 목소리를 높여 기후 위기는 거짓말이라고 외친다. 하지만 이런 영화의 주장이 타당하다 해도(그리고 기후 위기에 대한 문제 위기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해도), 과학은 ‘순수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는 주장을 영화는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돈 룩 업’의 과학자들은 자신의 과학적 진실을 호도하는 정치와 언론에 학을 뗀다. 그런데 과학은 그만큼 순수한가?
영화 ‘돈 룩 업’의 한 장면. 영화가 설정하고 있는 과학(이쪽 편) 대 정치(저쪽 편)의 구도가 잘 보이는 사진이다. 출처: 다음영화
과학에 대한 이론, 즉 과학 자체의 활동이나 추구를 평가하는 일은 들어보지 못했더라도 우리는 ‘패러다임’이라는 표현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혁신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은(“이 제품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합니다”) 이 말을 통해 과학의 변화를 설명했던 사람이 토머스 쿤이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해 이전까지 과학에 대한 생각을 반박한다. 그것은 과학이 일직선으로 놓인 진보의 선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기차와 같다는 가정이다. 과학은 이전의 지식 위에 끊임없는 발전의 사다리를 쌓음으로써 계속 성장해 나간다. 20세기의 현대 과학이 가져온 성과를 보라!
그러나 쿤이 인식한 과학의 모습은 그런 진보의 초상과 사뭇 달랐다. 그는 코페르니쿠스 등을 과학혁명의 예로 언급하면서, 그 이전의 과학과 이후의 과학은 다른 질문을 추구하는 다른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런 과학 각각을 지탱하는 것이 패러다임이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과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동설은 모두 패러다임이다. 그것은 과학자들이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내용이다. 두 시대는 서로 다른 세계와 과학의 모형을 전제하여 과학적 탐구를 수행하기에 연구에서 발견한 것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여기에서 과학의 발전을 추동하는 것은 천재적인 개인이 아니다. 이런 관찰들이 쌓여서 다수가 공유하는 이론의 틀을 만들어 낼 때에만 과학은 다음 단계, 다음 패러다임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학은 그 자체로 진리 탐구를 위한 틀이며, 과학적 추구를 통해 우리는 언제나 순수한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과학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과학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가 의존할 수 있으며 의존해야 할 발견과 변화의 도구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을 확립해 가는 과정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닌, 과학자 사회의 합의다. 그 합의는 만장일치의 표결이 아니라, 사회의 여러 쟁점처럼 경쟁하는 주장들이 서로 충돌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서로의 주장이 충돌하는 이유는 서로가 가정하는 기본 전제, 믿음,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즉 과학 또한, 그 안의 정치를 통해 결론에 도달한다.
토머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표지. 출처: 교보문고
세계대전의 여러 사례처럼, 과학이 정치로 인해 오용된 일도 적지 않으나 여기에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그런 사태는 아니다. 누군가 과학을 통해 정치적 선택을 옹호하거나 비난할 때, 그것은 순수한 ‘과학적 진실’을 통해 사태를 정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또한 정치적 행위라는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 바이러스의 ‘과학’을 말하며 정부의 방역 정책을 옹호하거나 비난할 때, 그것은 정치와는 전혀 관련 없는 위치에서 정치를 평가하거나 그 옳고 그름을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정치적인 행위이자 결정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과학’의 내용을 판단하는 것이 그의 패러다임,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 또는 믿음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가치 판단으로 데이터를 재단한 다음, 그것이 ‘과학’이라며 반대편을 비난하거나 우리 편을 옹호하는 일은 적어도 그것이 ‘과학’을 경유했기 때문 만으로 설득력을 얻을 수는 없다.
가상의 사례이지만 현재의 방역 정책을 옹호하는 주장을 편다고 가정해 보자. 하루에 사망자가 250명을 넘는 홍콩의 사례를 들어, 홍콩은 한국보다 강한 방역 정책을 펴고 있는데 막을 수 없다, 오미크론 변이는 방역 정책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지금 이런 확산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방역 정책은 이제 점차 완화, 아니 철폐의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한다고 해보자. 오히려 기존 방역 정책이 장애물이 되어 코로나19 위중증 환자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이다.
홍콩의 의료 대응력을 압도적으로 상회하는 환자가 나오면서 위중증 환자와 사망자 관리가 안 되고 있으므로 홍콩보다 한국의 상황이 나은 것은 사실이다. 홍콩이 현재 한국보다 더 강한 거리두기 정책을 펴고 있는 것도. 하지만 왜 홍콩인가? 한국과 홍콩을 비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홍콩이 지금까지 한국과 비슷한 경로를 거쳐 왔기 때문에? 그렇다기엔 홍콩의 정책과 방역에 대한 수용, 시민의 접근 등 여러 면에서 우리와 큰 차이를 보여 온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여전히 방역을 잘 유지하여 2022년 3월9일 기준 전체 사망자 수 850명으로 유지하고 있는 대만의 사례는 왜 고려하지 않는가?
다음, 현재의 방역 정책이 위중증 환자를 관리하는 데 장애물이므로 빨리 방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 폭증한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를 고려할 때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현재 사망자 수가 단지 현재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방역 정책의 한계일 뿐인가? 우리 또한 의료 대응력을 상회하는 환자가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앞으로도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할 가능성 자체는 고려하지 않고, 단지 이것은 기존의 방역 정책의 한계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애초에 일정 수의 환자를 대비하고, 그를 넘어서는 환자가 발생하면 더 강력한 거리두기 정책을 일시적으로 적용해서라도 의료 체계가 그에 대응할 수 있도록 숨을 고르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책임을 묻고 싶지는 않다. 단지, 그 또한 정치적인 선택이었음을, 우리는 이 과정에서 늘 의학과 과학을 경유하여 정치적인 선택을 내려왔음을 인정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과 정치 모두이지, 과학만 또는 정치만이 답이 될 수는 없다.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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