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개발을 위해 만든 인공지능이 독성 물질 개발에 악용될 수 있다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 픽사베이
인류가 인공지능에 거는 기대 가운데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 신약 개발 분야다. 신약을 개발하려면 수천, 수만가지의 화학물질을 탐색하고 조합해 후보 물질을 찾아내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인공지능의 빠르고 정확한 데이터 조합 및 분석 능력을 활용하면 이 시행착오 기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다.
실제로 구글 알파벳은 인공지능 자회사 딥마인드의 기술력을 이용한 신약 개발에 나섰다. 딥마인드가 개발한 단백질 예측 인공지능 알파폴드가 탁월한 단백질 예측 능력을 보여준 데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최근 AI신약개발지원센터장에 취임한 김우연 카이스트 교수는 기자간담회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하면 개발기간을 15년에서 7년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표명했다.
이미 관절염치료제 바리시티닙 등 일부 약물이 인공지능의 추천으로 코로나19 치료제로 쓰였고 영국에선 인공지능이 설계한 강박장애(OCD) 신약후보물질이 임상시험에 들어갔다.
그러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신약 분야에서도 인공지능 악용에 대한 우려가 가시지 않는다. 인공지능의 화학물질 분석과 조합 능력은 마음먹기에 따라선 생명을 해치는 용도로도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기술이라도 어떤 용도로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게 인공지능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로켓에 우주선 대신 폭탄을 탑재하면 미사일이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신약 후보 물질을 연구하고 있는 컬래보레이션스제약 연구원. 컬래보레이션스제약 웹사이트
최근 이를 실증해 보여주는 개념증명 실험 결과가 공개됐다. 컬래보레이션스제약(Collaborations Pharmaceuticals)이라는 미국의 신약개발업체 연구진이 약물 탐색을 위해 만든 인공지능을 이용해 불과 6시간 만에 4만종의 화학무기 후보 물질을 찾아내 국제학술지 ‘네이처 기계지능’(Nature Machine Intelligence)에 발표했다.
이번 연구는 스위스의 슈피츠연구소(핵과 생화학무기방어를 위한 스위스연방연구소)가 2년마다 여는 생화학무기회의에 신약 개발 인공지능의 오용 가능성을 보여달라는 요청에 따라 이뤄졌다.
이 회사 인공지능 연구진의 본래 업무는 신약 물질 분자 설계에 유용하도록 치료 및 독성을 예측할 수 있는 기계학습 모델을 구축하는 것이다. 치료 물질이 생명에 필수적인 다양한 종류의 단백질에 개입할 수 있는 위험, 즉 독성을 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연구진은 주최쪽의 의도에 맞춰 인공지능이 독성 분자를 설계하는 데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연구진은 논문에서 “우리의 작업이 궁극적으로 생화학무기 제조용 컴퓨터 개념증명으로 진화한다는 것은 이전엔 생각지도 못했던 사고연습이었다”고 밝혔다.
가장 강력한 독극물 가운데 하나인 VX 분자 구조. 위키미디어 코먼스
연구진은 자체 개발한 메가신(MegaSyn)이라는 이름의 신약개발 인공지능을 이번 실험에 이용했다. 메가신은 독성이 가장 낮은 알츠하이머병 치료 약물(아세틸콜린에스테라제 억제제)을 찾기 위해 개발한 알고리즘이다. 기계학습 모델에 의해 작동하는 이 인공지능은 독성이 예측되면 벌점을 주고 생체적합성이 예측되면 상점을 주는 방식으로 학습을 진행한다.
연구진은 같은 학습 모델을 쓰되 독성과 생체적합성 모두에 상점을 주는 식으로 바꿔보기로 했다. 연구진은 공공 데이터베이스의 분자 데이터 가운데 주로 약물과 유사한 분자 및 생체활성을 갖고 있는 것들을 골라 인공지능을 훈련시켰다.
이와 함께 인공지능이 생성한 분자들을 골라내기 위해 살충제, 환경독소, 약물들로 구성된 반수치사량(LD50, 실험동물의 절반이 죽는 양) 모델에 의거해 점수를 매기기로 했다. 연구진은 21세기 최고의 독성 화학무기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신경작용제 VX를 기준 모델로 제시했다. VX는 2017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공항에서 살해된 북한 김정남의 몸에서 검출된 독극물로, 소금 알갱이 몇개 정도의 양(6~10mg)만으로도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인공지능은 6시간 만에 VX(화살표)와 같은 수준의 독성을 가진 가상 분자를 다수 생성했다. 주황색은 인공지능이 생성한 가상 분자들, 파란색은 반수치사량 모델의 분자들. 둘의 특성이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네이처 기계지능
인공지능은 컴퓨터를 돌린 지 6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연구진이 원하는 점수 범위에 든 4만종의 독성 분자를 생성했다. 독성 예측 결과 이 분자들은 공개된 화학무기보다 더 독성이 강한 것으로 분석됐다. 어떤 것은 VX가스보다 독성이 더 강했다.
연구진은 “이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고 밝혔다. 인공지능을 훈련시키는 데 사용한 데이터에는 그런 VX와 같은 신경작용제가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만든 가상의 분자들은 반수치사량 모델의 분자들과도 특성이 완전히 달랐다. 이는 누군가가 실행에 옮길 경우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화학 무기가 개발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단지 기계학습 모델의 훈련 방법을 살짝 바꿨을 뿐인데 인공지능은 약물을 개발하는 이로운 도구에서 치명적 분자 생성기로 변신했다. 연구진은 “우리가 개발한 독성 모델은 원래 독성을 피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실험 결과 독성 예측력이 좋을수록 치명적인 분자 설계 능력도 좋아졌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특히 이런 식의 인공지능 오용에 대한 진입 장벽이 너무 낮은 현실에 우려를 표명했다. 이번 연구를 이끈 컬래보레이션스제약의 수석과학자 파비오 어비나(Fabio Urbina)는 미국의 온라인매체 ‘더 버지’ 인터뷰에서 “온라인에는 무료로 얻을 수 있는 생성모델과 독성 데이터 세트가 많다”며 “파이썬 코딩법을 알고 기계학습 모델을 만들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주말을 이용해 독성 데이터세트로 구동되는 이런 생성 모델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나쁜 배우들에게 아이디어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 논문을 발표할지 망설였다”며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도 이미 그것을 생각하고 있거나 장차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 때문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발표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