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1882). 위키피디아
내가 작심하고 입에 술을 댔던 것은 군의관으로 복무하기 위한 훈련을 마치던 10년 전 봄의 어느 날이었다. 그전에는 전혀 술을 마시지 않았고, 일부러 피하기 위해 큰 노력을 했다. 아버지의 음주에 진저리를 치던 어머니의 신신당부 때문이기도 했고, 종교적인 결단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덕분에 대학생 때부터 수련의 생활을 보낼 때까지 이상한 녀석 또는 조직에서 겉도는 친구로 여겨져 왔다. 술을 마시지 않는 것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실 텐데, 숫기 없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기에 술을 안 마시는 것은 엎친 데 덮친 격이었던 탓이다.
술을 마시겠다고 결심했던 것은 그런 소외에서, 힐난하는 눈초리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 완전히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 텐데 그들과도 이전 같은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돋보이는 사람,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분위기를 망치는 어색하고 이상한 사람이라는 평은 떼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술을 잘 마시는 척, 잘 노는 척을 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이제는 척을 할 필요가 없다. 술 없이 지나가는 하루가 어색해졌으니까. 집에는 늘 맥주 몇 캔이 냉장고에 들어 있다. 조그마한 와인 냉장고도 별도로 마련했다. 도수가 있는 술 몇 개는 부엌 한구석에 고이 세워져 있다. 알코올 중독, 정식 명칭 알코올 사용장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으니 괜찮다고, 술은 밤에만 마시니 괜찮다고 자신을 다독이면서.
이제 아빠 술 그만 먹으라고 어린 딸까지 눈치를 주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정말 피해를 주지 않는 걸까. 어디 가서 큰 사고를 치는 것은 아니니 그렇다고 말한다. 하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늦어버린 것은 아닌지,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이 이미 돌릴 수 없을 만큼 망가져 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하지만 결과를, 성취를 내야 한다는 스스로의 압박에 둘러싸일 때, 그럼에도 여러 일에 바빠 원하는 만큼 집중하지 못하고 그 탓에 결과물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도움의 손길은 찾아보기 어렵고 모두가 어떻게든 자기 이익만 챙기려고 한다는 느낌이 들 때,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이런 날이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이라는 게 문제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나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술을 이야기로 전하는 전형적인 방식 때문이 아닐까. 술 마시고 한 실수담이나 무용담을 외치고, 술로 인해 얻은 기회나 놓쳐버린 상황들을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반면, 알코올 사용장애인지 염려하는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쉽게 바스러지고, 술 걱정을 하는 사람은 비웃음을 산다. ‘술도 못 다루는 사람이 어떻게’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탓이리라.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술을 잘 다룰 수 있는 걸까?
박미소 작가의 <취한 날도 이유는 있어서> 표지. 예스24
책 <취한 날도 이유는 있어서>에서 나와 비슷한, 하지만 더 감각적이고 더 다양한 시도가 담긴 고백을 읽는다. 기자로 일하다가 퇴사하고 유튜브 제작을 잠시 하던 중, 여러 사정으로 모두 접고 책을 쓰겠다고 매일 다짐하던 저자는 아이를 챙기고 남는 시간을 보내기 위한 방법으로 술을 택한다. 원체 술을 잘 마시고 좋아하던 그이기에 술을 마신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술을 마시면 드는 고양감이 사라지고, 술을 마시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잊기 위해 다시 술을 찾다 보니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 자신을 발견한 저자는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병원 문을 들어선 그가 의사를 만나는 장면부터 책은 시작한다.
알코올 사용장애 진단으로 약을 처방받지만, 의사는 삶이 바뀌지 않는다면 약은 별 소용이 없을 거라 말한다. 자신의 무력감과 우울감에서, 자신이 세워놓은 높디높은 삶의 기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피상적인 인간관계 대신 깊은 교류를 가져야 한다고, 술 대신 다른 즐길 거리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일찍부터 함께 해 온 술을 떠나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 한구석을 계속 채우고 있다. 중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술을 끊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면서 술과 술에서 비롯한 기억을 떠올리는 장면은 이 책의 백미다.
바텐더는 정중한 고갯짓을 하고 떠났고, 나는 기대감에 차 서둘러 술잔을 들어 첫 모금을 마신다.
약간의 점도가 느껴지는, 자줏빛이 감도는 갈색의 술을 마시자 스모키한 위스키 향이 입안을 꽉 채운다. 들숨에 남는 잔향은 달큼하니 셰리주 맛이 진하다. 가니시로 꽂힌 타임의 알싸한 향이 코에 닿아 아로마가 더 짙게 느껴진다. 맛있다!(85쪽)
이토록 술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데, 어찌 알코올 사용장애로 술을 끊을 수 있으랴. 의학이, 여러 책이 권하는 금주 대신 저자는 절주를 택한다. 이미 너무도 오래 함께한 친구인 술을 버리는 것은 자기 삶의 일부를 버리는 것과 같으니 안 될 일이다. 외줄 타기의 위태로움을 감수하더라도, 그는 자신이 술을 조절하면서 삶 또한 어떻게든 꾸려갈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렇다. <취한 날도 이유는 있어서>는 술에 관한 추억으로 가득 채워진 절주 성공기다. 자기 삶을 조금씩 바꾸어 나가겠다는 다짐과 함께.
독성이 강했지만,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독주 압생트. 삶을 잊게 만드는 강렬한 힘을 담은 술이지만, 고흐의 채색은 무척이나 청량하다. 반 고흐 <압생트가 있는 테이블>(1887). 위키피디아
책의 고백이 소중하게 다가온 이유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 사회가 술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회 생활하면서 술을 마시는 것은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우리는 술에 대해 굳이 왈가왈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걸까. 음주운전으로 안타까운 생명을 잃고 간 질환 사망자가 증가해도, 술에 대해 이야기를 할 필요까지는 없는 걸까. 그렇지 않을 테다. 술 권하는 사회, 술에 한 없이 관대한 사회라고 자조하면서 어쩔 수 없는 거지, 라고 말하기에는 술이 가져오는 문제들이 크다. 알코올 관련 질환 전체 사망자 수는 2018년 기준 10만명당 4910명이며,[1] 알코올 사용장애 평생 유병률은 2021년 기준 11.6%, 주요 정신장애 중 가장 높다.[2] 한국은 2016년 기준 알코올 사용장애 유병률 세계 5위다.[3] 세계 1위가 아니니 다행이라고 말할 게 아니라면, 이런 수치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술 문제는 개인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데 우리는 너무나 익숙하다. 개인의 통제로부터 출발하여 국가의 치세까지 이어지는 연속성을 말한 유교의 영향이 남은 탓도 있겠지만, 술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잘못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당장 <취한 날도 이유는 있어서>가 들려주는, 정신건강의학과 방문을 망설이고 자신이 알코올 사용장애로 병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는 것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그런 상황을 잘 예증하고 있다. 술 문제는 남에게 함부로 이야기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 오롯이 자기 잘못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여러 건강 문제가 꼭 개인의 탓만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술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다. 현진건의 단편 <술 권하는 사회>가 100년 전에 일갈했듯, 술을 권하는 것은 사회요 술은 사회의 절망을 잊기 위한 도피처의 역할을 한다. 조금씩 옅어지고 있다고는 하나, 한국 특유의 부어라 마셔라 하는 회식 문화에서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다. 사회생활이 아니더라도, 술은 개인의 삶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이던 2021년, 전년 대비 한국인의 음주 빈도는 줄었지만 음주량은 늘었다.[4] 회식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알아서 술을 마신다. 다른 취미나 여가를 즐길 수 없고 즐길 줄 모르는 사람들의 빈 자리를 술이 채웠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문화사회적 조건이 알코올 사용장애를 부추기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우리는 술이 개인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 잘못이며, 알코올 사용장애는 유전적,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문화적 요인이 겹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개인의 책임만 묻는 것은 이상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술을 조절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탓하는 것은 오랜 문화적 영향과 함께, 이것 아니면 저것이어야 한다는 흑백논리의 사고가 책임 문제에 쉽사리 적용되는 탓이다. 술 문제도 개인 아니면 사회의 책임일 텐데, 개인 책임인 부분이 쉽게 눈에 띄므로 사회의 책임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책임을 지워버리고 개인만 탓할 때 알코올 사용장애로 인한 고통을 해결하는 길은 점점 더 멀어진다. 고통을 받는 사람은 병원 등 도움을 찾는 것을 꺼리고, 사람들은 그의 허약한 의지를 비난할 뿐 다른 원인은 무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다. 술은 나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해결을 위해선 개인과 사회가 모두 노력해야 한다.
편을 갈라, 어느 한 쪽을 비난하려는 우리 마음의 습관은 항상 중독자를 향한다. 그런데, 누군가를 향해 쏘았던 비난의 화살은 방향을 돌려 다시 우리에게 날아오고 있지 않은가?
참고문헌
1. 알코올 관련 질환 전체 사망자수 및 인구 10만 명 당 사망률 (성별). 절주온. https://www.khealth.or.kr/acs/acsStat/result?menuId=MENU00658&tableGubun=DATA010101
2. 정신장애 유병률. e-나라지표. 2022.4.5. http://www.index.go.kr/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1441
3. Alcoholism by Country 2022. World Population Review. https://worldpopulationreview.com/country-rankings/alcoholism-by-country
4.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2021년 주류 시장 트렌드 보고서. 2022.3.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