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안락사로 나아가고 있는가? 출처=플리커
2022년 6월16일, 이른바 ‘조력존엄사법’이 발의되었다. 정식 명칭은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다시 말하면, 말기환자가 인공호흡기 등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한 연명의료결정법을 수정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겠지만, 조력자살법이라고 불러야 정확한 해당 개정안은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말기환자가 의사에게 요청하여 사망에 이르는 약물을 처방 받아, 스스로 약물을 통해 목숨을 끊는 것을 허용하는 절차를 도입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기환자,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과 같은 복잡한 개념은 뒤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해당 개정안 발의와 관련하여 많이 언급되고 있는 연구를 먼저 살펴보려 한다. 서울대학교병원 가정의학과 윤영호 교수팀이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조력자살 및 안락사 관련 태도를 조사한 연구를 보면, 해당 절차 허용에 찬성한 사람이 76.3%였다.[1] 즉, 다수의 국민이 안락사 도입을 받아들인 셈이다.
1000명의 표본이 적다고 해도 이 정도면 사회적 찬성 기류가 흐르고 있음을 확인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연구는 조력자살과 안락사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음을 명확히 드러낸다. 찬성한 사람 중 30.8%가 남은 삶이 무의미해서라고 답했고, 14.8%는 가족 고통과 부담을 생각해서, 4.6%는 의료비로 인한 사회적 부담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이들 중 절반이 조력자살 또는 안락사에 찬성한 것이 아니라, 노화나 질병(또는 장애) 상태에서 그저 자살하고 싶다는 의견을 표명한 것으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조력자살 또는 안락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하여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지 않은 것보다 더 끔찍한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치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반면 자살은 그것과 무관하게 여러 이유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삶의 무의미, 주변 사람의 고통이나 사회적 부담으로 인한 압력이 대표적인 자살의 사유이며, 우리는 자살을 막는 것을 사회적 의무로 여긴다.
즉, 위 연구는 안락사에 대한 사회적 태도를 밝히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가 안락사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가 된다. ‘조력존엄사법’이 발의된 시점에서 이런 오해에 대해 짚어보는 것은 앞으로 우리가 안락사와 관련하여 어떻게 함께 결정할 수 있는지 살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므로, 오늘은 우리 사회의 안락사에 대한 서사를 직접 살펴보려 한다.
연구[1]에서 조력자살, 안락사에 찬성한 사람이 제시한 이유. 엄밀한 의미에서 안락사의 정당한 사유로 간주되는 것은 “고통의 완화“ (20.6%)와 “자기결정권의 중요성” (3.1%)으로 4분의 1이 채 되지 않는다.
먼저, 복잡한 개념들이 등장하므로 몇 가지 살펴보고 넘어가자. 존엄사(death with dignity)는 사람이 존엄을 지키며 죽는다는 의미다. 존엄(dignity)은 원래 철학 개념으로, 스스로 법칙을 수립할 수 있는 존재이자 목적 그 자체로서의 인간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존엄사는 연명의료 중단, 즉 생명을 연장하는 치료를 중단할 것을 스스로 결정하여 죽음을 맞음을 뜻하게 된다. 그러나 존엄은 일반적으로 위엄 또는 품위와 보통 혼용되며, 따라서 학술 영역 바깥에서 존엄사는 ‘품위 있는 죽음’을 의미하여 연명의료 중단과 안락사를 모두 포괄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안락사(euthanasia)는? ‘좋은 죽음’이라는 의미인 안락사는 살아 있는 것보다 죽음이 더 나은 경우가 있음을 상정한다. 과거 전체주의 사회에서, 또는 동물을 대상으로 한 안락사는 다른 함의를 지니므로 현대 사회의 인간 대상 안락사만 살펴보자.
우리는 보통 사는 것이 당연히 죽는 것보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안락사라는 개념은 생각한 것보다 복잡하다. 언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은가? 지금 잠깐 너무 비참하거나 끔찍한 경우는 해당하지 않는다. 아무리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해도, 그다음에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회경제적으로 완전히 바닥을 쳐서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 안전망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기에 그 경우도 죽는 게 더 좋은 일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는 큰 유감을 표하며, 지금은 개념의 이론적 고찰이므로 어느 정도 이상적인 상황을 놓고 보자.)
유일하게 죽는 게 더 낫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은 이것이다. 어떤 사람이 치료 불가능한 질병에 걸려서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치료의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질병으로 인하여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다. 그런 사람에게 삶이란 무한한 고통의 연장이며, 비록 진통제 등으로 그 고통을 경감할 수 있다고 해도 치료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그의 상황이 호전될 가능성을 차단한다. 그때 끔찍한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주어지는 것이 삶보다 나은 죽음, 바로 안락사다.
이런 안락사의 형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해당하는 상황에 처한 환자가 의사에게 약물 처방을 요청하여 처방받은 약을 복용하여 사망에 이르는 것으로, 이를 의사 조력자살(physician-assisted suicide) 또는 조력자살이라 부른다. 다른 하나는 같은 상황의 환자가 의사에게 요청, 의사가 직접 환자에게 약물이나 가스 등을 주입하여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후자만을 안락사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으나, 조력자살도 안락사에 포함된다. 정리하면, 이번 개정 입법은 안락사 중 조력자살을 도입하겠다는 것이며, 발의안은 몇 개월 이내에 사망이 예정된 말기환자가 끔찍한 고통을 호소하여 환자가 직접 의사를 표명할 수 있는 경우에만 사망을 가져올 수 있는 약물을 처방할 것을 명시하였다.
안락사라는 표현은 나치 독일의 그림자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웰다잉(well-dying)의 논의를 제대로 시작하려면, 우리는 자살과 안락사에 관해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 위키미디어 코먼스
여기에서 몇 가지 짚어볼 수 있는 사항들이 나온다. 첫째 ‘조력존엄사법’이라는 생소한 표현이 등장한 이유다.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안규백 의원은 자신이 낸 법안이 안락사라는 논쟁적인 개념과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더해서 기존의 연명의료결정법을 수정하는 것이므로, 기존 법이 규정하는 존엄사에 조력자살을 추가하는 것이니 조력존엄사라고 표현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한 게 아닐까.
그러나 조력존엄사라는 이름은 틀렸다. 존엄사가 그렇게 오해된다 한들, 윤리적·법적 담론까지 이를 환자가 위엄 있게 죽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존엄사는 환자가 생명을 연장하지 않고 다가올 죽음을 맞이할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약물을 복용하는 것 또한 환자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존엄을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로 만든 칸트는 자연적인 생명을 개인이 단축하는 것은 법칙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2] 이성은 생명을 촉진하기 위해 존재하는데, 바로 그 이성이 생명을 파괴하는 법칙을 만든다면 모순에 빠진다. 즉, 적어도 윤리·법에서 존엄사와 안락사는 구분해야 하는 것이 맞다. 조력존엄사가 말기환자가 약 처방을 받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표현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조력존엄사법 이야기는 우리 사회가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안락사가 보편적으로 수용되기는 어렵다는 판단이 있다면, 앞서 살핀 조력자살 또는 안락사 시행에 찬성한다는 결과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기에서 짚어볼 두 번째 문제, 연령주의(ageism)와 노년의 무익함이 서사를 비집고 나타난다.
연령주의란 흔히 우리가 노인차별이라고 표현하는 태도로써 노인과 노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기초한다.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며, 고령사회를 넘어 초고령사회를 목전에 두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인 집단도, 다른 세대도 노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생산성과 효율성을 기치로 달려온 근현대 한국 사회는 노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계속 축적해 왔다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은 노화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고, 젊음에만 가치를 두면서 노화의 부정적 측면만 인식한다.[3]
‘아름다운 노화’라는 식으로 그것을 미화할 필요는 없지만,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한다. 그 사례 중 하나로 조력존엄사법과 조력자살·안락사에 대한 태도 연구 결과를 꼽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노화와 삶의 무의미를 같은 것으로 여기며, 안전하고 확실한 방식으로 노화를 중단할 방법을 찾는다. 그것은 안티에이징(anti-aging) 화장품의 엄청난 인기로 드러난다. 한편으로 조력존엄사는 이런 노화를 ‘확실히’ 차단할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된다. 무익하고 ‘무의미한’ 노화를 끝내기 위해, 죽음보다 확실한 방법이 어디 있으랴.
제도가 현재의 노화, 장애, 질병에 대한 차별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구현되지 않으려면, 안락사에 대한 논의를 진지하게 시작해야 한다. 출처=씨티 미러(CT Mirror)
오해를 줄이기 위해 분명히 밝히고 가자. 나는 치료될 수 없는 환자의 고통을 없애는 방법의 하나로 윤리적 의미에서 조력자살이나 안락사를 검토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방식을 노화, 장애, 질병에 대항한 안전한 자살법으로 인식하고 있다. 자살과 안락사의 구분을 회피하고 사람들의 노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조력존엄사법 논의는 심각한 문제가 있으며 현 인식을 더 악화할 가능성을 지닌다. 제도에 대한 논의에 앞서, 안락사가 무엇인지 공론장에서 제대로 살펴보아야 한다.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참고문헌
Yun YH, Sim JA, Choi Y, et al. Attitudes toward the legalization of euthanasia or physician-assisted suicide in South Korea: A cross-sectional survey. Int J Environ Res Public Health. 2022;19(9):5183.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윤리형이상학 정초. 아카넷. 2005. 133-134쪽.
지은정. 우리나라 연령주의 실태에 관한 조사연구—노동시장을 중심으로. 한국노인인력개발원. 2017.
Assisted suicide lobby spreads falsehoods to promote systemic ableism. CT Mirror. 202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