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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과학

재난을 경험한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된다, 강제로

등록 2022-09-27 10:01수정 2022-09-27 10:12

김준혁의 의학과 서사(65)
‘아사코’라는 기묘한 로맨스가 그리는 재난 다음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폭풍 속의 네덜란드 배’(1801). 출처: 위키피디아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폭풍 속의 네덜란드 배’(1801). 출처: 위키피디아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마스크를 착용할 필요가 점차 없어지는 상황이 되고 있다. 잠시 나온 외국에선 아무도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코로나19에 대한 염려나 고려도 더는 보이지 않는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가득 찬 공항을 보면서 ‘이제 코로나19도 지나가고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끝인가.

코로나19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끝이라고 한다면 아직 끝은 아닐 것이고, 신경 써야 할 감염병이, 바이러스가 하나 더 추가되어 그와 공존하는 상황을 그려보아야 한다고 말해야 할 테다. 하지만 이전처럼 우리가 서로에게 벽을 세우고, 같은 공간에 타인이 있는 것을 불편해하는 일이 점차 과거가 되고 있는 것은 맞다. 이렇게 우리는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한편 이 ‘넘어감’에 대해선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이 있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포스트 코로나’를 말할 때, 그들은 코로나19가 초래한 충격을 상쇄하여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에 관하여 생각한다. 그러나 재난으로서 코로나19 다음은 결코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일 수 없다. 그것이 남긴 충격이나 반복 가능성 때문이 아니다. 재난은 삶을 변형시키기에, 재난 다음의 삶은 재난 이전의 삶과 다르다. 그것을 인정할 것인지, 억지로 잊고 억압할 것인지의 차이일 뿐.

지진이나 홍수를 생각해 보자. 지역사회를 덮친 자연 재난은 분명 큰 피해를 남길뿐더러, 해당 지역의 재난 대비 취약성을 드러낸다. 우리는 이런 재난 이후에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 그 재난의 기억이 우리를 유령처럼 사로잡기 때문이다. 재난을 경험한 다음의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된다. 그 전의 일상을 아무리 회복하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2011년 일본 도호쿠 대지진은 삶을 바꾸는 재난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예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우리 또한 여전히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의 여파를 몸에 새긴 상태로 살고 있는데, 직접 경험한 이들은 어떨까. 사실 나는 이런 재난으로 인한 삶의 강제적인 변화라는 부분을 인식하지 못하다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아사코’를 통해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영화 ‘아사코’ 한국 포스터. 영어 제목은 ‘Asako I & II’인데, 제목처럼 영화에선 특정 장면이 일정한 시간 후에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는 연출을 여러 번 활용한다. 이런 장면들을 통해 영화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넌지시 물어본다. 출처: 다음영화
영화 ‘아사코’ 한국 포스터. 영어 제목은 ‘Asako I & II’인데, 제목처럼 영화에선 특정 장면이 일정한 시간 후에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는 연출을 여러 번 활용한다. 이런 장면들을 통해 영화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넌지시 물어본다. 출처: 다음영화

영화 ‘아사코’의 바쿠를 재난에 비유하면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 자체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아사코는 첫사랑 바쿠를 만난다. 자유로운 영혼이라고밖에 설명하기 어려운 바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바쿠를 잊지 못하고 살아가던 아사코는 그와 너무도 닮은 료헤이를 만난다. 너무도 헌신적인 료헤이로 인해 바쿠가 입힌 상처에서 빠져나와 관계를 다시 만들어가던 아사코 앞에, 배우가 된 바쿠가 다시 나타난다.

이 서사를 로맨스로 읽으면 그렇게 특별할 것이 없거나, 결론까지 가는 과정에서 당황스럽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아사코는 바쿠가 다시 나타났을 때 그를 따라간다. 별다른 주체성을 보이지 않는 아사코의 모습을 보면 ‘이런 주인공을 2020년대에?’라는 의문까지 떠오른다. 비록 영화를 아직 감상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 밝히지는 않겠지만, 결론 또한 석연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라는 질문을 남기는 결말의 서사는 로맨스라는 측면에선 그다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게 느껴진다.

이런 이유로 인해 나는 ‘아사코’를 읽는 틀로 로맨스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영화는 신화적인 방식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바쿠는 보리(麥)도, 맥(貘)이라는 동물도 의미하지만, 또한 꿈을 먹는 전설의 요괴(獏)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바쿠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인물로 등장하는데, 그것은 그가 일반적인 인간의 경험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무엇보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라짐과 재등장은 육체적 한계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여겨진다(비록 그가 이유를 대지만 말이다). 그리고 바쿠라는 인물을 신화적으로 다시 읽을 때 ‘아사코’를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이 가능하다. 이 영화는 재난 앞에서 살아남은 이의 삶에 관한 관찰이다. 단지 재난이 의인화되었을 뿐. 그렇다. 등장인물 바쿠는 재난 또는 더 큰 의미에서 자연이다.

바쿠의 사라짐이라는 재난은 아사코에게 큰 상처를 남기지만, 아사코는 그것을 덮고 어떻게든 살아가려 노력한다. 이해 불가로 남은 재난을 대하는 아사코의 태도는 무시 또는 억압이다. 하지만 재난은 그렇게 지워질 수 없고, 흔적(그와 꼭 닮은 료헤이를 다시 만남)으로, 심지어는 재발생(바쿠의 재등장)으로 재난 경험자를 다시 덮친다. ‘아사코’는 이런 재난 앞의 삶을 ‘이상한’ 로맨스에 빗대어 보여주면서, 재난 이후의 삶은 어떤 것인지 묻는다. 서로를 신뢰할 수 없지만, 그래도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질문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그렇다. 재난 이후의 삶에서 가장 큰 특징은, 우리가 기존에 지녔던 신뢰와 믿음을 상실한다는 데 있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은 그동안 신에게 부여했던 낙관적 믿음을 부정하고 계몽과 세속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2014년 세월호는 우리에게 국가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재고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같은 질문을 코로나19에도 물어볼 필요가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가 잃어버린 신뢰 또는 믿음은 무엇인가? 보건(保健), 적어도 전통적인 의미의 보건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에도 말기의 우키요에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가 그린 요괴 바쿠의 모습. 코끼리의 코와 코뿔소의 눈을, 곰의 몸과 호랑이의 다리를 지닌 바쿠는 꿈을 먹는 요괴라고 하여, 악몽을 꾸었을 때 그 꿈을 바쿠에게 넘기면 다시 악몽을 꾸지 않는다고 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에도 말기의 우키요에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가 그린 요괴 바쿠의 모습. 코끼리의 코와 코뿔소의 눈을, 곰의 몸과 호랑이의 다리를 지닌 바쿠는 꿈을 먹는 요괴라고 하여, 악몽을 꾸었을 때 그 꿈을 바쿠에게 넘기면 다시 악몽을 꾸지 않는다고 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모두를 위한 보건은 불가능한가

보건복지부나 세계보건기구 등의 기관명에 들어가 있어서 익숙하시리라 생각하는 이 보건이라는 단어는 치료, 예방과 비슷한 의미일 것 같지만 상당한 차이를 지닌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보건이란 기본적으로 국가 차원에서 국민을 대상으로 그들의 건강 수준을 높이려는 정책적 개입을 의미한다. 이것은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제36조 제3항을 통해 국가의 의무로 제시된다. 이런 한국의 보건 제도는 독일 제도를 수입한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공중보건학(public health)과는 그 대상과 목적에서 차이를 보인다. 물론 공중보건은 인구의 건강을 위한 국가 또는 기관 차원의 제도적 노력이며, 공중보건학은 이에 관한 학문적 탐구다. 이들은 인구 집단의 건강을 향상하는 데 그 초점을 맞춘다.

한편 민족국가의 보건은 미셸 푸코가 문제시했던 국가의 통치술(governmentality)이다(비록 푸코는 이들을 엄밀하게 구분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여기에서 보건의 목적은 국력의 강화와 민족 신체(‘신토불이’가 가리키는 것처럼, 개별자의 몸이 아닌 상상적 통일체로서 민족의 몸을 가리킨다)의 유지에 맞추어져 있다. 그 수행은 개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집단의 이득을 최대화하는 데 방점을 둔다.

한국의 전통적인 ‘보건의료’는 이런 기조 위에 위치해 있다. 그 목적은 환자의 행복이나 만족이 아닌, 노동력의 최대화와 사회의 안정에 놓인다. 따라서 보건의료 체계는 가장 낮은 비용으로 가장 많은 국민에게 중요한 의료 서비스를 전달하고자 한다. 한국 의료가 극도의 효율성을 유지하면서도 ‘3분 진료’로 비난받는 것은 애초에 출발점이 여기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환자의 만족이나 의견은 애초에 한국 보건의료에서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 됐건 보건은 사람들을 지켜왔다. 또는 그 역할에 그렇게 부족한 도구는 아니었다. 소수가 불편이나 고통을 겪었으나(장애인의 치료적 필요에 대한 일반적인 무시나 의료 종사자의 격무 등) 크게 부각되는 주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코로나19라는 재난에서, 보건이 사회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킬 수 있는 장치임을 우리는 확인했다. 이것은 방역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자영업자가 희생해야 했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과도한 방역 정책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고 그것은 잘못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방역, 더 넓은 범위에서 보건이 사회 전체가 아닌 특정 집단을 우선하는 것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며, 보건이 지키는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개인은 치료나 예방의 접근권을 부여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공병원을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설정하고 유지할 때, 코로나19 환자의 보건이 취약 계층 비코로나19 환자의 보건보다 중요하다고 선택한 것이다. 요양시설에 감염자가 나왔을 때 코호트 격리(의료기관에서 확진자가 집단 발생했을 때 기관 전체를 격리하는 것)를 선택했을 때, 시설 바깥의 보건이 시설 내부의 보건보다 중요하다고 선택한 것이다. 코로나19 기간, 장애인이 비장애인에 비해 매우 높은 사망률을 기록했을 때, 우리는 장애인의 보건보다 비장애인의 보건이 더 중요하다고 결정한 것이다.

모두를 위한 의료는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비용 문제로 인해, 모든 사람이 원하는 만큼의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인구를 위한 것이라면, 왜 모두를 위한 보건은 불가능한가. 왜 보건은 특정인이나 집단만을 위해 작동하는가. 코로나19라는 재난이 이런 보건에 대한 믿음을 의심에 붙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아니, 진작 의심에 붙여졌어야 할 것이, 이제서야 문제가 되고 있을 뿐이다. 보건이 우리를 위하는 데 실패했다면, 우리는 다른 보건을 찾아야 하지 않는가.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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