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미각과 후각을 통해 식품의 맛을 경험한다. 태아는 자궁을 채우고 있는 양수를 통해 엄마가 섭취하는 음식의 맛을 느낀다.
영국 더럼대 태아·신생아연구실이 중심이 된 영국과 프랑스 공동연구진은 임신의 마지막 기간인 3분기(29~42주)의 태아가 엄마가 섭취한 음식에 따라 서로 다른 표정을 짓는 장면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고 국제학술지 ‘심리과학’(Psychological Science)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는 태아가 맛과 냄새에 반응하는 직접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첫 성과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연구진은 18~40살의 영국 북동부지역 백인 임신부들을 대상으로 임신 32주차와 36주차에 각각 케일과 당근을 섭취한 뒤 태아의 얼굴 반응을 살펴보는 실험을 했다. 당근은 단맛쪽, 케일은 쓴맛쪽의 식품 특성으로 선택됐다.
케일에 노출된 태아의 우는 표정(오른쪽)과 기본 표정. 엄마가 케일을 섭취하자 태아 얼굴에 팔자 주름(FM11)이 생기고 태아가 아랫입술(FM16)을 지긋이 눌렀다.
과학자들의 이전 연구들에 따르면 미각의 경우 임신 9주부터 미뢰가 발달해 14주에 이르면 태아가 맛을 감지할 수 있다. 후각의 경우엔 임신 24주부터 태아의 비강이 후각 뉴런과 연결돼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따라서 임신 후반기가 되면 태아는 미각과 후각을 모두 이용해 맛을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자란다.
당근에 노출된 태아의 웃는 표정(오른쪽)과 기본 표정. 엄마가 당근을 섭취하자 태아의 뺨과(FM6) 양쪽 입꼬리(FM12)가 올라갔다.
연구진은 우선 임신부 100명을 모집해 당근 섭취 그룹과 케일 섭취 그룹, 비섭취 그룹으로 나누었다. 연구진은 임신부들에게 실험 당일엔 당근이나 케일이 들어간 어떤 음식도 섭취하지 않도록 했다. 임신부들은 또 실험에 들어가기 한 시간 전부터는 아무런 음식이나 음료도 섭취하지 않았다.
연구진은 이어 이들에게 당근과 케일 분말이 든 400mg의 캡슐을 주고 20분 뒤 자궁을 4D 입체 초음파로 촬영했다.
그 결과 당근을 먹은 임신부의 태아들은 양쪽 입꼬리가 올라가는 ‘웃는 표정’을 짓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반면 케일을 먹은 그룹의 태아들은 입꼬리가 처지거나 입술을 꽉 다문 ‘우는 표정’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
연구진은 “임신부가 캡슐을 섭취하고 30분 후부터 태아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특히 케일을 섭취한 그룹의 태아들은 임신 32주차보다 임신 36주차에서 더 복잡한 얼굴 표정을 지었다. 당근 그룹에선 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번 연구를 이끈 더럼대 베이자 유스툰 수석연구원(심리학)은 “초음파 촬영 중에 태아의 반응을 부모와 공유하는 경험은 정말 놀라웠다”며 “출생 전 특정 맛에 대한 노출은 출생 후의 음식 선호도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신 중에 아기의 입맛을 길들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연구진의 일원인 애스턴대 재키 블리셋 교수는 “특정 맛에 대한 반복적인 노출은 그 맛에 대한 선호로 이어질 수 있다”며 “예컨대 케일처럼 덜 좋아하는 맛에 태아를 노출시키면 태아가 자궁 안에서 그 맛에 익숙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 연구에선 산모가 임신 마지막달에 일주일에 네끼 이상 마늘이 포함된 식사를 한 경우 생후 15~28시간이 지난 신생아가 마늘 냄새에 대해 혐오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연구진은 태아가 자궁 안에서 경험한 맛이 다른 음식의 선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출생 후에도 같은 아기를 대상으로 후속 연구를 시작했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