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과학자들이 뇌와 척수 신경을 디지털로 연결하는 기술을 개발해, 하반신 마비 환자가 다시 걸을 수 있게 했다. 마비 환자가 야외에서 걷기 연습을 하고 있다. 스위스 로잔연방공대 제공
사고로 척수를 다쳐 하반신이 마비된 환자가 뇌와 척수를 연결하는 무선 디지털 통신 장치 덕분에 다시 걷는 데 성공했다. 뇌와 척수 사이에 심은 전극 사이를 잇는 디지털 신호가 신경을 대신한 셈이다.
스위스 로잔연방공대 연구진은 40살 네덜란드 남성의 뇌와 척수 사이 신경을 잇는 ‘무선 디지털 브리지’(wireless digital bridge)를 개발해 실험한 결과, 이 남성이 다시 스스로 서고 걸을 수 있게 됐다고 25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이번 연구의 시작은 뇌와 척수 사이의 끊어진 신경을 물리적으로 연결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무선 디지털 방식을 이용해 다리 움직임을 다시 제어할 수 있는 통신망을 구축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아이디어였다.
연구진은 이 아이디어를 시험하기 위해 우선 64개의 전극으로 구성된 무선 기록장치를 설계했다. 이어 이 장치를 다리 움직임 제어에 관여하는 뇌 영역의 경질막(신경계를 보호하는 가장 바깥쪽 막) 2곳에 심었다. 이 장치는 다리 움직임과 관련한 신경 활동(뇌전도)를 안정적으로 기록할 수 있었다.
하반신 마비 환자의 뇌와 척수 사이에 구축된 무선 디지털 브리지 시스템. a는 뇌 전극 임플란트 위치와 백팩 등을 보여주는 이 장치의 작동 방식 개요도. b는 디지털 브리지의 도움을 받아 이뤄지는 연속 동작과 디지털 신호 사진. 위에서부터 아래로 뇌 활동 신호, 신호 해독 결과, 자극의 진폭. 네이처 제공
뇌에서 받은 신호는 무선 헤드셋을 거쳐 환자의 등에 걸머진 휴대용 컴퓨터로 전달된다. 연구진은 척수의 경질막에도 다중 전극으로 구성된 센서를 심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무선 디지털 브리지’는 뇌에 심은 전극에서 운동 신호를 포착하면 휴대용 컴퓨터가 이 신호를 분석해 무선으로 척수에 심은 전극에 전달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환자가 걷겠다고 생각을 하면 뇌와 척수에 심은 전극이 컴퓨터의 중개로 신호를 주고 받으며 다리를 움직이게 해주는 것이다.
이번 실험에 참여한 셰르트-얀 오스캄(40)은 2011년 자전거 사고로 척수를 다쳐 하반신이 마비됐다. 2017년부터 이번 연구에 참여한 그는 이 장치 덕분에 12년만에 다시 일어서고 걷고 계단도 오르고, 복잡한 지형도 통과할 수 있게 됐다.
하반신 마비 환자가 스위스 로잔대병원에서 걷기 연습을 하고 있다. 스위스 로잔연방공대 제공
신경 재활에도 기여…전원 꺼져도 목발 보행 가능
그동안은 하반신 마비 환자의 움직임을 회복하기 위해 척수에 직접 전기 자극을 가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다양한 지형에 맞게 다리 움직임을 조정하기가 어려웠다. 오스캄도 실험에 처음 참여할 땐 그랬다. 척수 위에 이식된 작은 전극 덕분에 몇걸음 걸을 수 있었지만 과정이 매우 번거롭고 움직임도 부자연스러웠다.
이번에 개발한 디지털 브리지는 이런 한계를 극복해 자연스러운 다리 움직임을 가능하게 해줬다. 오스캄은 40회 훈련 끝에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되찾았다. 오스캄은 “이전에는 자극이 나를 통제했지만 지금은 내가 자극을 통제하고 있다”는 말로 두 방식의 차이를 설명했다.
그는 “친구들과 바에 서서 맥주를 마시는 즐거움을 되찾았다”며 “이 소박한 즐거움은 제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이번에 개발한 뇌-척수 인터페이스(BSI)는 특별한 관리 없이도 1년 이상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또 오스캄이 신경 재활도 병행한 덕분에 이제는 전원이 꺼진 상태에서도 목발을 짚고 걸을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디지털 브리지가 신경을 일부 복구하는 데도 기여한 셈이다.
전극 삽입 수술을 집도한 의료진은 "아직은 기초 연구 단계이며 마비된 환자들이 사용할 수 있으려면 몇년은 더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논문 정보
https://doi.org/10.1038/s41586-023-06094-5
Walking naturally after spinal cord injury using a brain–spine interface.
Nature (2023)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