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과 당뇨병 연구와 실험에 자주 이용되는 비만 형질의 쥐(왼쪽)와 당뇨병 형질의 쥐. 사진 미국 국립오크리지연구소(ORNL) 제공.
“수백만년간 인류·동물 종 보존에 기여”
굶주림 대신 지방축적 ‘생존전략’ 증거
굶주림 대신 지방축적 ‘생존전략’ 증거
“비만을 무조건 나약한 의지나 게으름 때문이라고 보는 건 편견입니다. 지방과 비만은 동물 종의 생존을 위해 오랜 진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산물입니다.”
최근 초파리에 있는 지방 조절 유전자(일명 ‘아디포스’)의 기능이 하등동물인 예쁜꼬마선충과 포유류인 쥐에도 보존돼 있음을 밝혀낸 미국 텍사스주립대 사우스웨스턴 메디컬센터 서재명(36) 연구원은 12일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지방조직과 비만 유전자는 인류의 진화와 종 보존에 지대한 구실을 했다”고 주장했다. 하등동물과 고등동물에 동일한 지방 조절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비만 유전자가 수백만 년 동안 인류에 보존됐을 뿐 아니라 인류의 출현에 훨씬 앞서 하등동물의 진화 단계부터 중요한 종의 생존 전략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이런 발견은 국제학술지 <셀 메타볼리즘> 9월호에 발표됐다. 이번 연구에서는, 이 유전자의 기능은 음식의 부족과 풍족에 따라 달라지는데, 기능이 강해지면 지방 축적이 줄고 약해지면 지방 축적이 늘어난다는 사실도 초파리와 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확인됐다.
이처럼 오랜 진화 과정에서 종의 생존을 위해 획득된 지방과 비만 유전자의 긍정적 구실에 최근 비만 유전자 연구를 통해 새로 밝혀지고 있다.
그동안 비만의 원인으로는 유전설과 환경설이 경쟁하며 팽팽하게 맞서 왔다. 박병현 전북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생화학교실)는 “미국에 사는 한국·일본·중국계 이민자들이 한국·일본·중국에 사는 같은 또래의 사람보다 더 비만하다는 연구결과는 음식과 운동이라는 환경의 중요성을 말해주지만, 일란성 쌍둥이들이 비만 형질을 공유한다는 연구결과는 유전의 중요성을 말해준다”며 “요즘엔 유전설과 환경설을 서로 보완적 관계로 바라본다”고 해석했다. 그렇지만 1990년대 이래 비만 유전자가 미국·유럽의 주요 연구 대상이 됨에 따라 “그동안 간과됐던 유전적 요인의 의미가 앞으로 더욱 강조되는 추세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비만 연구는 비만의 진화 가설들을 다시 주목하게 만들었다. 서 연구원은 ‘아디포스’ 유전자가 “1960년대 제기됐다가 최근에야 다시 주목받는 ‘절약유전자 가설’의 중요한 증거가 된다”라고 말했다. 많이 먹지도 않는 아메리카 원주민한테 비만과 당뇨병이 심한 현상을 이상하게 여긴 유전학자 제임스 닐이 1962년에 제시한 이 가설은 인간의 특정 유전자가 기근에 대비해 대사 효율, 지방 축적, 음식 확보 행동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기근을 대비할 필요가 없는 시대에서는 이런 유전자를 지닌 특정 민족집단이 영양 과다가 되어 비만과 당뇨병을 자주 앓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디포스 유전자는 1960년대에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생물종에는 절약유전자가 존재하리라고 믿은 과학자가, 먹을 것이 부족해 오랜 굶주림을 견뎌야 하는 환경에 적응한 초파리 종에서 처음 찾아냈다. 서 연구원은 이 유전자가 초파리 뿐 아니라 선충과 쥐에서도 생존 전략으로 작동함을 확인했다. 이로써, 그동안 대부분 비만 유전자는 진화 과정에서 나중에 분화한 포유류에만 특이하게 존재한다고 보는 통설과는 다른 결과를 얻어냈다. 비만 유전 형질은 동물 진화의 초기에 획득돼 동물과 인류의 기근 생존사를 증언하는 아주 오래된 ‘화석’인 셈이다.
지방조직의 생리기능도 재평가되고 있다. 지방조직은 영양이 부족할 때에 분해돼 에너지원을 만드는 수동적 조직으로 이해됐으나 지난 10여년 새 지방조직의 적극적 역할이 밝혀져 왔다. 서 연구원은 “지방조직은 여러 종류의 호르몬을 분비해 뇌를 비롯한 여러 장기들과 생체신호를 주고받는 내분비 기능을 수행할 뿐 아니라 심지어 수명 조절에도 관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며 “지방조직에 대한 이해가 더 넓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비만의 원인은 아직 충분히 알려지지 못했다. 비만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발견된 중요한 유전자만도 벌써 여럿 된다. 또 모든 영장류에 존재하는 비만 유전자(‘아시프’)가 동남아시아 긴팔원숭이에선 빠진 사실을 지난해 일본 연구팀이 발견해 환경과 비만 유전자의 관계가 복잡함을 보여주었다. 비만과 당뇨병 원인을 사회적 환경의 요인에서 찾으려는 연구는 최근에도 계속돼 절약유전자 가설을 반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석기와 불을 이용한 인류가 200만 년 전 포식자의 위협에서 벗어나면서 인체 내 지방조직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포식 위협의 해방’ 가설도 있다. 또 유전자가 아니라 임신 중 태아의 영양 상태가 비만과 당뇨병에 영향을 끼친다는 가설도 의학계에선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지난해엔 유전자보다 장내 미생물이 비만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가 발표돼 눈길을 끈 바 있다.
박 교수는 “고등동물일수록 비만은 여러 유전자들의 상호작용과 사회·환경 요인의 작용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 그동안 연구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며 “비만 유전자 연구는 비만에 대한 유전학적 이해를 넓히고 비만 치료 후보물질의 폭을 넓힌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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