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미래&과학 과학

초파리 암컷은 짝짓기 뒤 왜 수컷에 흥미를 잃을까

등록 2008-01-10 08:51

암컷 초파리는 짝짓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성하게 알을 낳기 시작한다. 오스트리아 분자병리연구소(IMP) 제공
암컷 초파리는 짝짓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성하게 알을 낳기 시작한다. 오스트리아 분자병리연구소(IMP) 제공
초파리 암컷이 보여주는 짝짓기(교미) 전후의 독특한 행동 변화는 오랜 동안 곤충학자들의 연구 주제가 돼왔다.

짝짓기 때에 암컷은 수컷이 적극 구애를 펴면 꼬드기는 듯 행동하며 수동적으로 짝짓기에 응한다. 하지만 짝짓기 뒤 상황은 영 딴 판이다. 암컷은 짝짓기 뒤 1주일 가량 수컷의 구애를 외면하며 적극 뿌리친다. 그리고 고단백의 영양식만 찾으면서 알들을 낳기 시작한다. 이런 행동 변화는 모기에서도 나타난다. 암컷 모기가 다른 동물의 피를 빨아먹는 건 짝짓기 뒤에 고단백 먹이를 찾으려는 본능 때문이다. 이런 생식행동은 흔히 ‘모성본능’으로 일컫기도 한다.

김영준 박사 참여 연구팀, ‘생체 분자 스위치’ 찾아내
생식호르몬과 수용체 결합…억제됐던 신경계 활성화
고단백 영양식만 찾으며 ‘모성본능’ 행동변화 일으켜

곤충신경생리학자들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짝짓기 전후의 이런 본능적 행동 변화는 왜, 어떻게 일어날까? 연구자들은 생체 분자 수준으로 내려가 미시세계에서 벌어지는 그 변화 과정을 살피려 한다.

김영준(35) 박사가 참여한 오스트리아 빈 분자병리연구소(IMP) 연구팀은 최근 짝짓기 전후에 나타나는 초파리 생식행동 변화의 메커니즘을 규명해 과학저널 <네이처> 3일치에 발표했다. 생식행동 변화를 촉발하는 이른바 ‘생체분자 스위치’를 처음 찾아냈다.

분자 수준에서 본 초파리 암컷의 생식행동 변화 (중추신경계)
분자 수준에서 본 초파리 암컷의 생식행동 변화 (중추신경계)

암컷 곤충들의 짝짓기 뒤 행동 변화는 짝짓기 중에 수컷의 정자와 함께 섞여 암컷에 전달되는 ‘섹스 펩타이드’라는 생식호르몬 때문에 일어난다. 생식호르몬이 암컷의 면역력을 높여 병균의 공격을 막아주고 산란을 촉진할 뿐 아니라 짝짓기 행동이나 식생활까지도 바꾼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 알려져왔다. 하지만 이 호르몬이 분자 수준의 어떤 작용 과정을 거쳐 행동을 조절하는 신경계를 변화시키고 결국에 행동 변화까지 일으키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번 연구팀은 생식호르몬이 신경세포막에 붙어 있는 특정 수용체와 결합할 때 잠자고 있던 ‘짝짓기 이후 행동의 신경계’가 비로소 활성화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여러 수용체들 가운데 어떤 것이 그 변화의 결정적 스위치 구실을 하는지 밝혀냈다.

이 생리호르몬 수용체의 기능을 일부러 없앤 암컷 초파리들은 짝짓기를 하고서도 수컷과 짝짓기를 계속하며 알도 낳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실험을 통해 입증됐다.

김 박사는 “이번 연구는 곤충의 생식본능을 호르몬 분자와 유전자 수준에서 좀더 이해하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말했다. ‘본능’은 유전자 안에 잠자고 있다는 얘기고, 또한 어떤 호르몬과 어떤 수용체가 열쇠와 자물쇠처럼 결합할 때 잠자던 본능의 ‘스위치’가 켜져 본능 행동의 신경계가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얘기다.

이번 연구에는 유전자 조합이 저마다 다른 2만여 가지의 초파리들이 이용됐다. 특정 유전자들을 제거해 2만2천여 가지의 유전자 조작 초파리들을 만든 다음에, 어떤 유전자가 초파리의 어떤 행동 변화와 관련돼 있는지 일일이 살피는 2년 반의 관찰과 분석을 거쳤다. 김 박사는 이 과정에서 스위치 구실을 하는 특정 수용체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다.

호르몬과 수용체의 결합으로 일어나는 생식행동의 변화는 초파리에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연구팀은 똑같은 생식호르몬 수용체가 초파리뿐 아니라 모기, 딱정벌레 같은 다른 곤충들에도 존재함을 확인했다. 김 박사는 “이 수용체 스위치가 다른 여러 곤충들에서도 평소 억제돼 있던 본능 행동의 신경망을 일깨워 행동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영준 박사
김영준 박사
연구팀은 이런 연구가 해충의 번식을 억제하는 데 이용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논문의 교신저자인 배리 딕슨 박사는 <로이터> 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섹스 펩타이드 수용체를 무력화하는 약물을 개발한다면 해충의 ‘산아제한’ 약물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약물을 쓰면 암컷은 짝짓기를 하고서도 알을 낳지 않으려 하거나 계속 짝짓기를 하며 다른 정상 암컷과 경쟁하기에 번식을 억제할 수 있다는 말이다.

‘본능은 곧 생체분자와 유전자 작동의 산물’임을 보여주는 이런 연구가 생명현상을 분자 수준에서 기계적으로만 바라보는 게 아니냐는 시선에 대해, 김 박사는 “분자 수준의 연구는 신경과 행동의 원리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그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데에 기여하는 바 크다”며 “당연히 고등동물에선 이런 이해가 세포와 다른 신경망까지 아울러 훨씬 더 복잡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해충 번식을 억제하는 약물의 개발과 더불어 분자를 넘어 ‘세포 수준’에서 신경망이 행동을 어떻게 일으키는지 이해하려는 게 연구 목표”라고 덧붙였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미래&과학 많이 보는 기사

과학자들은 외계인의 존재를 얼마나 믿을까? 1.

과학자들은 외계인의 존재를 얼마나 믿을까?

영양 가득 ‘이븐’하게…과학이 찾아낸 제4의 ‘달걀 삶는 법’ 2.

영양 가득 ‘이븐’하게…과학이 찾아낸 제4의 ‘달걀 삶는 법’

온 우주 102개 색깔로 ‘3차원 지도’ 만든다…외계생명체 규명 기대 3.

온 우주 102개 색깔로 ‘3차원 지도’ 만든다…외계생명체 규명 기대

2032년 소행성 충돌 위험 2.2%로 상승…지구 방위 논의 시작되나 4.

2032년 소행성 충돌 위험 2.2%로 상승…지구 방위 논의 시작되나

시금치·양파·고추…흰머리 덜 나게 해주는 루테올린의 발견 5.

시금치·양파·고추…흰머리 덜 나게 해주는 루테올린의 발견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