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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이은지
“과학과 인문학의 소통을 꿈꾸다”
서울대에서 식품영양학과 생명과학을 공부하는 대학생. 1년 전부터 교내 언론에서 굴러다니고 있다. 그 외 특이사항 없음. 메일 주소 dbdps900@naver.com
이공학도, 우리들이 사는 세상
숱한 과제에 시달리고 퀴즈에 쫓기고 실험실에서 죽치는 생활엔 힘겨움과 고민도 숨어 있지만 이공계의 젊음은 여전히 팔팔하고 꿈도 많다. 세 명의 열혈 이공학도들이 그 희노애락의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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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00원입니다.”
“야 네가 계산 좀 해봐.”
고등학생 시절, 문과 친구들과 밥을 먹고 나면 종종 맞이하는 상황이었다. 모인 사람이 세 명 이상인 경우, 각자 자기몫을 내는 ‘더치 페이’를 할 때면 대개 계산이 복잡(?)해지므로 이과생인 나한테 공평하게 나눗셈을 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돈 계산에 약했지만 그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나누기를 하고 형평성에 맞추어 각자가 내야 할 몫을 판정(?)해주곤 했다. 실 없어 보이는 얘기 같지만, 이것은 이공계 학생은 누구나 수학을 잘 할 것이라는 통념이 널리 퍼져 있음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나의 짧은 과학사 지식으로 보면, 갈릴레이 이후 수학은 과학 법칙을 설명하는 만국 공통의 ‘순수한 과학의 언어’로서 사용되어 왔다. 다시 말해 수학 없이는 과학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과학을 ‘수학으로 표현하고 설명하는 지식 체계’로 정의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이니, 과학에서 수학의 중요성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그렇기 때문인지, 흔히 사람들은 ‘이공계’라 하면 수학을 떼 놓고 생각하지 않고, 이공학도라면 모든 이가 수학을 잘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이공학도 자신들은 수학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지금도 열심히 전공과 씨름하는 이공학도들에게, 수학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이들에게 수학은 단순히 입시의 수단인 것 이상으로, 피부로 느껴지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을까? 전공 공부의 틈새에서 수학의 향기를 느끼고 있는 이공학도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수학은 이과의 대명사”
많은 이공계 학생들은 이공계 진학을 선택할 때에 수학에 대한 흥미도나 성취도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자주 이야기한다. 왜 수학이 이공계 선택에서 중요할까? 수학에 흥미가 있다는 말은 곧 이공계 공부에 적성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기본 지식과 공식을 가지고 퍼즐 맞추기 식의 문제 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수학을 좋아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수학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이공학도에게 자신의 적성을 알려주는 지표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또 한 번 중요한 것 같다.
“이공계를 선택할 당시에 수학 점수가 유난히 잘 나오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외워서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혼자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떠올려 문제를 풀어낼 수 있다는 것에 큰 흥미를 느껴 이공계를 선택했습니다.”(심수진, 화학공학과 3학년)
“생각을 해야 하는 문제들을 하나하나를 풀며 느낀 뿌듯함, 그 매력이 제가 수학을 좋아하게 되고 이공계를 선택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이장호, 물리교육과 1학년)
이공계 선택과 수학의 관계에는 현실적인 요인도 작용한다. 대부분 대학에서, 수능 3대 과목인 언어, 수리, 외국어 중 수리 영역의 점수에 가장 큰 가중치를 부여한다. 또한 인문계 수학 유형인 ‘수리-나’ 형이 아니라 이공계 수학 유형인 ‘수리-가’ 형에 응시하면 가산점이 주어질 때도 많다. 수학이 학문의 왕이라는 게 아니라, 그만큼 한국 사회의 고등학교 교실에서 수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런 이유로 고등학생들에게 수학 공부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고, 수학에 자신이 있는 학생일수록 이공계로 향하는 진입 장벽을 더 낮게 느낀다. 그래서 고등학교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수학은 순수한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입시 수단으로서 더 큰 무게감을 지니는 측면도 있다.
“저에게 수학은, 입시의 도구가 되기 전까지는 가장 흥미로운 학문이었어요. 그렇지만 내신, 입시를 위해 수학 과목을 공부할 때는 진짜 수학을 공부하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요.” (김한슬, 생명과학부 3학년)
전공과 수학, 그 복잡 미묘한 관계
입시의 터널을 지나 대학 캠퍼스에 입성한 이공학도들, 이들은 대학에서 수학을 어떻게 느낄까? 학점이라는 또 다른 부담이 존재하지만, 대학은 적어도 학생들이 수학을 학문 외적 의미를 가지는 도구가 아니라 ‘학문적인 도구’로 느낄 수 있게 하는 발판을 제공한다. 이것을 왜 배우는지, 어디에 실제로 사용되는지 알기 힘든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수학과는 달리, 대학교에서는 자신의 전공에 필요한 수학 과목을 위주로 듣기 때문에 수학 공부와 전공 공부가 연계되면서 수학의 필요성을 몸소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학은 전공 공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수학 과목을 공부할 때는 공식을 수학적으로만 접근했기 때문에 이해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때 배웠던 지식을 전공 공부에 적용하니, 같은 현상을 물리적으로도 바라보고 수학적으로도 바라보는 것이 흥미로웠고 양쪽 모두 이해도 더 잘 되었습니다.”(이장호, 물리교육과 1학년)
“전공 공부를 할 때 ‘도대체 이걸 어떻게 알아냈을까?’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을, 공학수학에서 배운 내용을 토대로 풀어보며 ‘아 이게 이렇게 되는 구나’하고 느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수학은 복잡한 문제를 풀 수 있는 하나의 툴이 된다고 생각합니다.”(심수진, 화학공학과 3학년)
속도-시간 그래프에서 그 밑넓이는 총 이동거리와 같다. '이동거리=속도*시간'이니까. 이 그래프는 학생들의 물리적 사고와 수학적 사고를 연결시켜주는 것들 중 하나였다.
속도-시간 그래프에서 그 밑넓이는 총 이동거리와 같다. '이동거리=속도*시간'이니까. 이 그래프는 학생들의 물리적 사고와 수학적 사고를 연결시켜주는 것들 중 하나였다.
학생들은 수학과 과학의 연계성을 고등학교 교과 과정 때부터 느껴 왔다. 예컨대 속도와 가속도는 기본적으로 물리 개념이다. 하지만 수학적 방법인 미분과 적분을 이용해 속도와 가속도를 표현할 수 있다. 실제로 물리 책에서의 증명과 수학 책에서의 증명이 다르지만 그 결과는 같게 나온다는 사실에서 많은 학생들이 흥미를 느꼈다. 대학에서는 물리학도가 미적분학을 배우고 공학도가 공학수학을 배우는 것처럼, 전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수학 분야를 집중적으로 공부한다. 이로써 이공학도들은 좀 더 직접적으로 수학과 과학의 관계를 활용하며 이를 체감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전공마다 요구되는 수학의 필요성이 매우 다르다. 나는 식품영양학과 생명과학을 공부하는 터라 대학 수준의 수학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내가 수강한 수학 과목은 통계학 강좌와 생명과학도를 위해 개설된 수학 강좌 이 둘뿐이다. 그리고 전공과목을 공부할 때도 대개 깊은 수학적 사고나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이 점에서 내 생명과학부 친구도 비슷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직접적으로 수학 과목이 전공 공부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어요. 간접적으로라도 논리적 사고를 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겠으나, 체감되지는 않았습니다.”(김한슬, 생명과학부 3학년)
그렇지만 이런 나에게도 수학은 도움이 되었다. 1학년 때 기초 과목으로 들었던 통계학은 굉장히 유용했다. 실험 데이터를 정리할 때 평균과 표준편차를 계산하고, 오차를 계산하는 것은 기본이다. ‘티-테스트(t-test: 두 집단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지를 판정하는 방법)’도 통계학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놀라웠던 점은 진화론을 이해하는 데에 통계학적 소양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진화는 어떤 개체군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변화를 일으켜 가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었다.
수학의 사고력 체화하기 힘든 수업 진도
이렇듯 수학적 지식은 이들이 전공 공부를 이어나가는 데 실로 큰 도움이 되며, 수학과 전공은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낸다고 한다. 이쯤에서 밝히는 이 리포트의 한계(!)는 수학과 친구를 인터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수학은 도구가 아니라 추구하는 대상 그 자체일 것이다. 하지만 수학과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이공계열 학과에서, 수학에 도구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토록 중요한 수학의 교육이 대학에서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일부는 대학교의 수학 강의 방식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자신이 경험한 대학의 수학 교육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간단하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대학교에서의 수학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개념 위주의 자기 주도적 학습’ 이라 하고 싶습니다. 제가 들었던 미적분학 수업은 그 방대한 양에 비해 수업시간이 다소 부족했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공부의 방향, 내용을 60~70%정도 제시해 주시고 학생들이 스스로 나머지 부분을 보충하는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스스로 예습, 복습을 꼼꼼하게 하면 수학이 재미있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념, 내용에 대한 약간의 의미만 던져주고 수업을 끝내는 것이 학생들 간의 편차를 더 크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되었습니다.”(이장호, 물리교육과 1학년)
“미적분과 공학수학을 수강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수강했던 공학수학의 경우, 교수님께서 프레젠테이션(PPT)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시며 증명과정을 학생들에게 잘 보여주지 않아 불만이 있었습니다. 대학교에서는 피피티를 이용한 수업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수학은 증명과정이 중요한데 그 부분을 피피티로 보여주면서 휙휙 넘어가면 학생들로서는 이해도 잘 안 될 뿐더러 집중도 안 되었습니다.”(심수진, 화학공학과 3학년)
이는 사실 수학 교육만의 문제가 아니고 대학 교육 전반에 있는 문제일 수 있다. 주어진 수업 시간에 비해 공부할 양이 너무 방대한 것은 어느 강의에서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수학 과목 자체가 워낙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수학 과목을 듣는 학생들에게 더욱 크게 다가오는 듯했다. 배우는 것은 많은데 미처 체화되기 전에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버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우리에게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흔히 수학은 학생들의 사고력을 길러 주는 학문이라고 여겨지지만, 진도를 따라잡기에 급급한 상황이기 때문에 수학 공부가 논리적 사고를 향상시키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사실 체감을 하기 힘들다.
수학은 이공계 ‘웃음 문화’의 소재
수학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전공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수학 공부가 어려운 이유는 정말 그냥 “어려워서”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수식의 향연에 어떤 이들은 수학의 노이로제에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공계에 한 번 발을 내딛은 이상, 수학 공부를 피할 수는 없다. 이들은 힘든 수학 공부에서 출발한 주옥 같은 ‘공대 개그’들을 창출해내며 어려움을 웃음으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과학 현상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데 익숙한 이공학도들은, 그들의 말하기 방식을 일상생활에까지 확장한다. 또는 수학 지식을 이용해 엉뚱한 공식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공대 개그의 하나인 '초코파이의 비밀'(왼쪽). 엄마손파이, 빅파이 등에도 응용 가능하다. 공대 학생이 설명하는 다이어트(오른쪽)
문과 친구들에게 이런 농담을 하면 보통 싫어한다. 그래도 우리는 이런 걸 참 좋아한다. 왜 웃길까? 그 이유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재미있다. 아마도 같은 공부를 한다는 동질감, 소속감이 우리들만의 문화, 이너 컬쳐(inner culture)를 만들어내었을 것이다. 아는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에, ‘공대 개그’를 재미있어 한다는 것은 어려운 공부를 했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하다. 조금은 배타적인 문화랄까. 혹시 당신도 이런 게 재미있으시다면, 아무 포털에나 ‘공대 개그’를 검색해 보시길.
그래서, 우리에게 수학이란…
지금까지 수학이 이공학도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공학도들은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수학의 중요성을 주입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느낀다. 수학은 전공 공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고, 또 전공 공부는 수학 공부를 더욱 더 재미있게 느끼도록 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수학이 나중에 쓰이는 것이라기 보단 제 사고력을 시험하는 과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개의 법칙을 얼마나 요령껏 활용하나 알아보자고 테스트하는, 그런 거 말이에요. 그런데 대학생이 되고나서는 수학을 이용하여 훨씬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부분을 해결할 수 있게 되어서, 수학이 내 피부와 직접 맞닿아 있는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심수진, 화학공학과 3학년)
아니, 꼭 전공과 관련이 없어도 상관없다. 수학은 수학 그 자체로 중요하기도 하다. 외계어 같은 공식과 추상적인 개념들이 때로는 우리를 괴롭히지만, 수식을 풀며 하나의 답을 향해 천천히 달려 나가는 과정 그 자체가 우리에게 지적 쾌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어떤 학생들은 자신의 전공과 상관이 없더라도 여러 수학 강의실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수학은 흥미로운 학문입니다. 문제의 답은 똑같이 나오지만 수학이 흥미로운 사실은 그 답을 도출하는 과정이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분명 어렵고 딱딱한 부분도 있지만, 개념을 통해, 문제를 통해 얻는 의미의 뿌듯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공이 수학은 아니지만 수학을 많이 쓰는 학문을 하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다른 수학과목들을 접하고자 합니다.” (이장호, 물리교육과 1학년)
수학이 내미는 손짓에 이끌려 이공계로 향한 이공학도들. 수학과 손을 맞잡고, 앞으로는 또 어디로 향할지 기대해 볼 만하다.
▶ 다음 글에서는 이공계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는 이공학도들의 이야기를 모아 쓰고자 합니다.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분들의 진학 계기, 계획, 고민, 어려움과 관련한 이야기의 소재나 주제가 생각나시면 dbdps9060@naver.com으로 메일을 보내주시거나, @AriTotoro로 연락해주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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