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의 루이 파스퇴르를 그린 회화작품 부분. A. Edelfeldt 작(1885). 출처/ Wikimedia Commons

자연발생설, 파스퇴르, 헤게모니
어제 스와질랜드 산골 마을의 클리닉에서 의료봉사 일을 마치고서 간식으로 우유 한잔을 마시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우유 곽에 적힌 글귀를 무심코 읽어보는데 “패스터라이즈드 밀크(Pasteurized milk: 저온살균 우유)”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눈에 들어온 이 단어가 긴 생각의 타래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패스터라이즈드, 즉 살균법을 뜻하는 이 단어는 프랑스 학자인 루이스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에서 유래했다. 이제는 생물학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루이스 파스퇴르를 안다. 생물학에 문외한인 사람들 중에도 그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파스퇴르는 이제 거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실험실에서는 ‘파스퇴르 피펫’을 쓰고, 이름난 생물학 연구소으로 ‘파스퇴르 연구소’가 있고, 일상 생활에는 ‘파스퇴르 우유’가 있다. 저온살균법을 뜻하는 단어, 패스터라이제이션(pasteurisation)도 그 이름에서 왔다. 심지어 아프리카 산골 마을에서도 이처럼 파스퇴르의 이름을 볼 수 있다.
1860-1861년에 파스퇴르는 오랜 전통의 관념인 자연발생설을 뒤짚는 일련의 실험을 진행했다. 목이 구부러져 외부 물질이 들어가기 힘들도록 설계해 만든 호리병 안에다 발효액을 넣어 두었다. 그리고 이 발효액을 끓는점에 가까운 온도로 가열해 살균하면 그 뒤에 몇 달 동안 그대로 두어도 발효 현상이 일어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호리병 목을 끊어 외부 물질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자 이내 발효가 일어났다. 또한 그는 현미경 관찰을 통해 발효 현상이 일어나는 과정에 박테리아가 관여한다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이런 실험으로 파스퇴르는 외부 생명체가 들어가야만 발효, 즉 생명의 탄생이 일어나며 단지 공기와 재료만 있다고 해서 생명의 자연발생이 일어날 수는 없음을 증명해낸 것이다. 근현대 생물학은 파스퇴르의 살균법, 자연발생설의 부정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적어도 우리는 이렇게 배우고 있다. 하지만 사실 이런 공로의 상당 부분은 17~18세기 기생충학자들에게도 돌아가야 한다.
파스퇴르가 살균법을 사용한 일련의 실험들, 즉 자연발생설을 부정한 실험은 사실 파스퇴르보다 200년 앞서 기생충학자가 진행했던 실험의 재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파스퇴르는 기생충학자들이 잘 차려놓은 밥상에 숫가락만 얹었을 뿐이다.
파스퇴르 ‘자연발생설 부정’ 실험보다 앞선
‘기억되지 않은’ 17세기 기생충학자의 발견 18~19세기를 거치며 생물학은 완전히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근현대 생물학이 형성되었던 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다. 그 중에 세 가지를 꼽자면, 첫째가 레벤후크의 현미경으로 로버트 훅이 세포를 발견해 ‘세포설’을 제창한 일이다. 두번째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다. 그리고 세번째가 바로 파스퇴르가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자연발생설을 부정한 것이다. 하지만 파스퇴르는 과연 자연발생설을 부정한 ‘첫번째’ 인물일까? 그는 천재적 통찰력으로 자연발생설이 뭔가 옳지 않음을 꿰뚫어 본 것일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우리 눈에는 난데없이 등장한 것처럼 보이는 과학 발견이나 기술 발전도 사실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점진적인 진보에 바탕을 두어 이루어진 것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연발생설의 부정도 역시 그러했다.
자연발생설은 근대 이전 생물학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학설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사람들은 생물이 무생물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생각에 바탕을 두어, 사람들은 생물 뿐만 아니라 질병도 ‘체액’ 불균형, ‘독기’, ‘나쁜 공기’ 같은 무생물학적 요인에 의해 일어난다고 보았다. 물론 이는 서양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중국이나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자연발생설을 생물학의 기본 관점으로 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자연발생설을 부정한다는 것은 전통 생물학의 뿌리를 뒤흔드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그렇기 때문에 자연발생설을 부정하는 것은 생물학, 특히 의학 분야의 진보에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즉 사람들이 뱃속의 벌레나 고열이 체내의 체액 균형이 어긋나 어느 순간에 갑자기 나타나는 게 아니라, 다른 생명체(예컨대 기생충)가 체내에 들어와 일어날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은 과학 연구의 측면 뿐만 아니라 공중 보건의 측면에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자연발생설의 부정을 얘기하려면 사실 파스퇴르가 활동한 시대의 200여 년 전인 1600년대 초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마도 영화나 소설에서 ‘호문큘러스(homunculus)’라는 개념을 듣거나 읽은 적이 있을 것이다. 호문큘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완전한 형태의 인간이 이미 형성돼 있고, 이 호문큘러스가 자라 태아가 되고 또 아기가 되어 태어난다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개념이다. 즉 생명은 무생물에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다른 생명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개념이 이 시기에 희미하게나마 자리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개념은 매우 모호했다. 이런 시절에 프란체스코 레디(Francesco Redi: 1626~1697)라는 학자가 등장했다.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레디는 훌륭한 기생충학자이자 곤충학자인 의사였다. 그는 서유럽에서는 거의 처음 쓰인 기생충학서(Osservazioni Intorno Agli Animali Viventi che si Trovano Negli Animali Viventi)의 지은이이며 동시에 자연발생설을 부정하는 실험을 진행한 사람이기도 했다.
사실 기생충학자들이 자연발생설에 도전한 첫번째 과학자들이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질환을 일으키는 다른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와 달리, 기생충은 눈에 띄는 생물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장내 기생충은 감염성 질환이 ‘다른 생물’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는 개념을 제공해준 장본인이었다. 즉 10미터도 넘는 기생충이 그저 나쁜 공기를 마시거나 몸에 체액이 불균형해 어느 순간에 번쩍 하고 나타난다는 것은 아무래도 믿기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오랜 세월 곤충과 기생충을 관찰해온 레디는 이런 복잡한 생명체들이 썩어가는 고깃덩이에서 난데없이 생겨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즉 썩은 고기에서 나타나는 파리 같은 생물은 외부에서 유입되며, 썩어가는 고기는 그저 영양분과 안식처를 제공할 뿐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여느 훌륭한 과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이를 증명하려는 실험을 진행했다. 레디는 자연발생설을 부정하기 위해 굉장히 많은 실험을 진행했다.1)
첫째로 그는 죽은 뱀 몇 마리를 내다놓고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 뱀은 구더기로 뒤덮였지만 살점이 대부분 사라지자 구더기도 함께 사라졌다. 구더기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번에는 구더기로 뒤덮인 뱀이 든 상자의 출구를 모조리 막아 보았다. 관찰을 계속하던 레디는 일정 시간이 지나자 구더기들이 움직임을 멈춘 채 쪼그라든 알처럼 보이는 상태로 변한 것을 보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들이 번데기라 부르는 것들이다. 레디는 이 쪼그라든 알들을 추려내어 종이로 덮은 상자 안에 넣어 두었다. 일주일쯤 지나자 쪼그라든 알들이 깨지며 파리들이 빠져나왔다.
여기에서 레디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관찰해냈다. 비슷한 종류의 알에서는 비슷한 파리들이 나온다는 것, 언제나 죽은 동물의 종류와 상관 없이 죽은 동물 주위를 배회하는 파리와 비슷한 파리들이 번데기에서 나타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파리가 죽은 동물 위에 ‘알을 낳는다’는 점을 관찰했다. 이런 관찰을 바탕으로 레디는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썩은 고기에서 나타나는 구더기들은 사실 파리들이 낳은 무언가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지, 단지 고기가 썩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레디는 ‘실험적 증명 없는 믿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믿음으로 결정적인 실험을 진행했다. 쇠고기 조각, 죽은 뱀, 물고기 같은 재료를 각각 주둥이가 넓은 플라스크 안에 넣어두고 입구를 단단히 막았다. 그리고 대조군으로 같은 재료가 든 플라스크들을 준비해 입구를 막지 않고 놓아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구가 열린 플라스크에서는 구더기들이 나타났지만 입구가 닫힌 플라스크에서는 시간이 흘러도 구더기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뿐 아니라 알에서 구더기로, 구더기에서 번데기로, 번데기에서 파리로 성장하는 과정을 꼼꼼히 기록해 파리가 낳은 알이 다시금 파리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지금 우리 눈에는 단순하기 그지 없는 실험처럼 보일지라도, 당시 생물학 지식을 고려하면 놀라울 정도로 앞서간 실험이었다. 레디의 실험과 기록에 비추어보면 파스퇴르의 연구가 레디 실험의 축약판인 듯이 느껴질 정도다.
파스퇴르 발견의 바탕이 되었던
‘자연발생설 도전’ 200년 간의 발걸음들 하지만 불행히도 시대를 앞서간 학자인 레디도 자연발생설을 다 부정하지는 못했다. 레디는 일부 기생충이 알에서 태어나 인간을 감염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현미경 이전 시대에 눈에 보이지 않는 기생충 알이나 유충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 때문에 레디는 일부 기생충이나 벌레는 자연발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발생설에 대한 기생충학자들의 도전은 레디에서 그치지 않았다. 1700년 니콜라스 앤드리(Nicolas Andry: 1658~1742)가 쓴 기생충학 책에서는 레디의 관점을 보완한 가설이 등장했다. 1698년 6월4일 앤드리는 고열, 각혈, 좌측 흉통을 호소하는 환자를 보게 된다. 그리고 5일 뒤 환자는 5미터 길이에 가까운 촌충을 토해냈다. 이 경험에 자극받은 앤드리는 책에 이렇게 적었다. “이 기생충들은 기생충이 들어 있는 작은 씨앗을 통해 인간이나 동물의 몸 속으로 들어가 번식한다. 모든 동물들은 이런 씨앗을 몸에 지니고 태어난다.” 하지만 앤드리도 당시 생물학을 지배하고 있던 통념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기생충이 씨앗, 즉 작은 알을 통해 자라난다는 점에서는 옳았지만 알이 외부에서 유입되는 게 아니라 동물이나 사람이 타고 난다고 보았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어떤 기생충을 지니는지는 그 사람의 체액 성향에 따라 다르다고 보았다. 즉 특정 체액이 씨앗을 특정 기생충으로 자라게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도 도전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연발생설을 쓰러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또 하나의 개념이 나타나게 된다. 바로 ‘한살이’ 개념이다. 18세기에 현미경이 발달하고 전혀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면서 자연발생설의 입지는 점차 흔들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기생충알이 유충이 되고, 이 유충이 10미터 넘는 성충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과연 이처럼 전혀 다른 형태의 생명체들이 실제로는 ‘하나의 생명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취하는 다른 모습들이라 믿을 수 있을까? 호문큘러스처럼 온전한 형태의 축소형태가 그저 성장하고 커질 뿐이라는 개념이 부정된 것도 기생충학자에 의해서였다. 1790년 덴마크 학자인 피터 크리스쳔 아빌가드(Peter Cristian Albildgaard)는 큰가시고기 안에서 발견한 기생충 유충(촌충의 편절)이 물고기를 잡아먹는 비오리 안에서 발견한 기생충(촌충 성충)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생겼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두 기생충은 뭔가 연관이 있는게 틀림 없었다.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는 비오리 두 마리를 구해 큰가시고기에서 채집한 기생충들을 잔뜩 먹여 보았다. 3일 뒤에 두 마리의 비오리를 해부하자 한 마리에서는 63마리의 성충 촌충이, 다른 한 마리에서는 한 마리의 성충 촌충이 나타났다. 아빌가드는 실험적으로 생명체가 ‘한살이’를 이어간다는 것을 증명해 냈지만, 덴마크는 연구의 중심지가 아니라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왜 파스퇴르만이 교과서에 남았는가?:
과학, 정치권력, 헤게모니의 역사 이처럼 파스퇴르의 연구는 갑작이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사실 200년 넘게 이어진 실험들의 연장선에 놓여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왜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는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교과서에서 파스퇴르는 자연발생설을 부정한 최초의 사람인양 추앙되고 있을까? 왜 교과서 어디에서도 레디, 앤드리, 아빌가드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을까? 이런 물음에 답하려면 과학만의 역사가 아니라 정치와 권력의 역사도 되짚어 봐야 한다. 파스퇴르가 활동한 19세기 후반은 제국주의가 극에 달하고 유럽 열강 사이에서 힘의 경쟁에 한창이던 시기였다. 식민지는 팽창일로에 있었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처럼 유럽 내 전쟁도 잦았다. 이렇게 팽창할 대로 팽창한 제국을 유지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했다. 첫째는 당연히 군사력이었다. 식민지는 힘으로 지배해야 했고 다른 열강에 맞서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서도 군사력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다른 하나는 조금 색다른 것이었다. 바로 과학, 특히 의학이었다. 식민지는 대부분 열대 및 아열대 지역에 있었다. 이런 지역에 군대를 파견하면 다른 열강과 벌이는 전투나 식민지 안 반란이나 폭동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 병사 수보다 지역 풍토병으로 병사하는 비율이 훨씬 높았다. 군사력이 약화하고 파견 관료가 질병으로 숨지면 그만큼 지역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도 약해졌다. 이 때문에 제국 열강들은 과학 그리고 의학에 막대한 지원을 해주었다. 과학과 의학은 제국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영국에는 ‘열대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패트릭 맨슨과, 말라리아가 모기에 의해 전파됨을 처음으로 밝힌 로날드 로스가 있었다. 독일에는 ‘미생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코흐와 ‘화학요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폴 에리히가 있었다. 이탈리아에는 말라리아학의 대가이자 인간 사이에서도 말라리아가 모기로 전파됨을 확증한 지오바니 그라시가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에는 자연발생설을 부정해낸 첫번째 학자이자 광견병 백신 개발을 통해 면역학의 새 장을 연 루이스 파스퇴르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제 과학은 과학적 토론의 장이 아니라 정치의 장이 되었다. 각국은 이 학자들을 영웅으로 대접했다. 국가는 이들의 학문적 성과를 과대 포장하여 선전하기 바빴고, 이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사이가 극도로 나빠진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특히 심했다. 그라시는 로스가 말라리아 전파 경로를 밝혀낸 것은 조류 모델이었으므로 인간을 대상으로 확인한 자신이 첫번째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흐는 말라리아 연구에서 자신을 제외한 그라시에 화를 내어 노벨상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코흐와 파스퇴르 사이에서는 결핵 백신 경쟁이 불붙어 무리하게 진행한 임상실험으로 많은 피험자들이 피해를 보기도 했다. 이제 과학은 국가의 선전도구로 전락했다. 물론 코흐나 파스퇴르 같은 이들이 대단한 과학자인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들 이전에 다른 많은 학자들이 이룩하고 쌓아온 실험과 가설들이 있었건만, 그것들은 모두 잊혀진 채 이제는 ‘영웅의 업적’만이 기억되고 있다. (앞에서 쓴 ‘말라리아의 정치학’(”말라리아 방제실패는 냉전시대 정치갈등의 산물”) 글에서도, 국가에 의해 조장된 과학계 안의 헤게모니 싸움이 어떻게 과학계를 갈라놓고, 나아가 공중 보건에 대한 접근법을 파탄냈는지 잠시 얘기한 적이 있다.) ‘맥락 잊은 채 결과만을 바라보기’
영웅 만들기가 초래하는 재앙 다시 말해보자. 파스퇴르는 어떻게 유명해졌나? 국가가 그와 그의 과학을 좋은 선전 도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가? 과학자의 영웅화는 과학적 사실 대신에 헤게모니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과학계는 과학을 논하는 장이 아닌 정치를 논하는 장이 되었고, 과학 내 특정 개념이 형성돼온 역사적 맥락은 잊혀진 채 영웅들의 결과만이 남게 되었다. 우습다면 우습고, 슬프다면 슬픈 이야기다. 역설적이게도 과학 교육에서는 결과가 아닌 과정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지만 교과서의 페이지를 몇 장 더 넘기면 역사적, 과학적 맥락과 단절한 채 자연발생설과 파스퇴르의 관계를 설명하는 대목이 으레 등장한다. 무심코 우유 곽에 쓰인 문구을 보며 떠올린 파스퇴르에 대한 생각이 오늘날 한국의 모습으로 번진다. 과학자 뿐만 아니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몇 해 전 줄기세포 논문조작 사건이 우리에게 던져준 충격을 아직도 생생히 떠올릴 것이다. 사건 이후에 많은 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했다. 논문 실적에 연연하는 한국 과학계의 병폐, 연구윤리의 부족부터 착취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석박사 과정 연구생들의 업무환경까지. 하지만 사건이 표면에 등장하기 이전에 오랫동안 국가는, 그리고 우리는 ‘황우석’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얻으려 했던가? 우리사회는 19세기 말엽 제국들이 그러했듯이 ‘영웅’을 만들고 싶어했다. 하지만 과학자를 ‘영웅’으로 만들고자 했던 제국의 시도는 재앙을 낳았다. 과학게가 정치 권력의 장이 되었다는 건 사소한 일일지도 모른다. 영웅들의 자존심은 너무 높았고 영웅들의 자존심 때문에 공중보건은 현실적인 접근 방식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파스퇴르가 자연발생설을 부정하기까지, 그리고 파스퇴르가 유명세를 얻기까지, 그 이면에는 자연발생설의 부정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21세기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고 맥락 없이 결과만을 바라보며 계속 ‘영웅 만들기’만을 원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황우석’을 계속해서 만나게 될 것이다. 사이언스온 정준호 [사이언스온 원문보기] <한겨레 인기기사> ■ 세입자엔 ‘빚내서 전세금 올려줘라’…부자에겐 ‘이 기회에 집 많이 사라’
■ 아랍 시민혁명 이집트서 꽃피다
■ ‘매몰’ 돈사 10m 옆 사체 방치…경기도 “무관한 사진” 억지
■ “부처가 밥주냐? 예수 믿으라” 70대 목사, 조계사 경내서 소란
■ 청와대 등 수도권 방어 대공포 알고보니 ‘짝퉁포’
■ 조석준 ‘음주 뺑소니’…청와대 알고도 임명 강행
■ “물가 불안” 아우성인데…한은 ‘환율 방어’ 택했다
자연발생설을 부정하는 파스퇴르의 실험에 쓰인 호리병 모양의 실험기구 그림. 출처/ Wikimedia Commons
파스퇴르 ‘자연발생설 부정’ 실험보다 앞선
‘기억되지 않은’ 17세기 기생충학자의 발견 18~19세기를 거치며 생물학은 완전히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근현대 생물학이 형성되었던 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다. 그 중에 세 가지를 꼽자면, 첫째가 레벤후크의 현미경으로 로버트 훅이 세포를 발견해 ‘세포설’을 제창한 일이다. 두번째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다. 그리고 세번째가 바로 파스퇴르가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자연발생설을 부정한 것이다. 하지만 파스퇴르는 과연 자연발생설을 부정한 ‘첫번째’ 인물일까? 그는 천재적 통찰력으로 자연발생설이 뭔가 옳지 않음을 꿰뚫어 본 것일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우리 눈에는 난데없이 등장한 것처럼 보이는 과학 발견이나 기술 발전도 사실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점진적인 진보에 바탕을 두어 이루어진 것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연발생설의 부정도 역시 그러했다.
자연발생설은 근대 이전 생물학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학설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사람들은 생물이 무생물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생각에 바탕을 두어, 사람들은 생물 뿐만 아니라 질병도 ‘체액’ 불균형, ‘독기’, ‘나쁜 공기’ 같은 무생물학적 요인에 의해 일어난다고 보았다. 물론 이는 서양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중국이나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자연발생설을 생물학의 기본 관점으로 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자연발생설을 부정한다는 것은 전통 생물학의 뿌리를 뒤흔드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그렇기 때문에 자연발생설을 부정하는 것은 생물학, 특히 의학 분야의 진보에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즉 사람들이 뱃속의 벌레나 고열이 체내의 체액 균형이 어긋나 어느 순간에 갑자기 나타나는 게 아니라, 다른 생명체(예컨대 기생충)가 체내에 들어와 일어날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은 과학 연구의 측면 뿐만 아니라 공중 보건의 측면에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프란체스코 레디(Francesco Redi: 1626~1697).
‘자연발생설 도전’ 200년 간의 발걸음들 하지만 불행히도 시대를 앞서간 학자인 레디도 자연발생설을 다 부정하지는 못했다. 레디는 일부 기생충이 알에서 태어나 인간을 감염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현미경 이전 시대에 눈에 보이지 않는 기생충 알이나 유충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 때문에 레디는 일부 기생충이나 벌레는 자연발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발생설에 대한 기생충학자들의 도전은 레디에서 그치지 않았다. 1700년 니콜라스 앤드리(Nicolas Andry: 1658~1742)가 쓴 기생충학 책에서는 레디의 관점을 보완한 가설이 등장했다. 1698년 6월4일 앤드리는 고열, 각혈, 좌측 흉통을 호소하는 환자를 보게 된다. 그리고 5일 뒤 환자는 5미터 길이에 가까운 촌충을 토해냈다. 이 경험에 자극받은 앤드리는 책에 이렇게 적었다. “이 기생충들은 기생충이 들어 있는 작은 씨앗을 통해 인간이나 동물의 몸 속으로 들어가 번식한다. 모든 동물들은 이런 씨앗을 몸에 지니고 태어난다.” 하지만 앤드리도 당시 생물학을 지배하고 있던 통념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기생충이 씨앗, 즉 작은 알을 통해 자라난다는 점에서는 옳았지만 알이 외부에서 유입되는 게 아니라 동물이나 사람이 타고 난다고 보았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어떤 기생충을 지니는지는 그 사람의 체액 성향에 따라 다르다고 보았다. 즉 특정 체액이 씨앗을 특정 기생충으로 자라게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도 도전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연발생설을 쓰러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또 하나의 개념이 나타나게 된다. 바로 ‘한살이’ 개념이다. 18세기에 현미경이 발달하고 전혀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면서 자연발생설의 입지는 점차 흔들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기생충알이 유충이 되고, 이 유충이 10미터 넘는 성충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과연 이처럼 전혀 다른 형태의 생명체들이 실제로는 ‘하나의 생명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취하는 다른 모습들이라 믿을 수 있을까? 호문큘러스처럼 온전한 형태의 축소형태가 그저 성장하고 커질 뿐이라는 개념이 부정된 것도 기생충학자에 의해서였다. 1790년 덴마크 학자인 피터 크리스쳔 아빌가드(Peter Cristian Albildgaard)는 큰가시고기 안에서 발견한 기생충 유충(촌충의 편절)이 물고기를 잡아먹는 비오리 안에서 발견한 기생충(촌충 성충)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생겼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두 기생충은 뭔가 연관이 있는게 틀림 없었다.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는 비오리 두 마리를 구해 큰가시고기에서 채집한 기생충들을 잔뜩 먹여 보았다. 3일 뒤에 두 마리의 비오리를 해부하자 한 마리에서는 63마리의 성충 촌충이, 다른 한 마리에서는 한 마리의 성충 촌충이 나타났다. 아빌가드는 실험적으로 생명체가 ‘한살이’를 이어간다는 것을 증명해 냈지만, 덴마크는 연구의 중심지가 아니라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왜 파스퇴르만이 교과서에 남았는가?:
과학, 정치권력, 헤게모니의 역사 이처럼 파스퇴르의 연구는 갑작이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사실 200년 넘게 이어진 실험들의 연장선에 놓여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왜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는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교과서에서 파스퇴르는 자연발생설을 부정한 최초의 사람인양 추앙되고 있을까? 왜 교과서 어디에서도 레디, 앤드리, 아빌가드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을까? 이런 물음에 답하려면 과학만의 역사가 아니라 정치와 권력의 역사도 되짚어 봐야 한다. 파스퇴르가 활동한 19세기 후반은 제국주의가 극에 달하고 유럽 열강 사이에서 힘의 경쟁에 한창이던 시기였다. 식민지는 팽창일로에 있었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처럼 유럽 내 전쟁도 잦았다. 이렇게 팽창할 대로 팽창한 제국을 유지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했다. 첫째는 당연히 군사력이었다. 식민지는 힘으로 지배해야 했고 다른 열강에 맞서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서도 군사력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다른 하나는 조금 색다른 것이었다. 바로 과학, 특히 의학이었다. 식민지는 대부분 열대 및 아열대 지역에 있었다. 이런 지역에 군대를 파견하면 다른 열강과 벌이는 전투나 식민지 안 반란이나 폭동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 병사 수보다 지역 풍토병으로 병사하는 비율이 훨씬 높았다. 군사력이 약화하고 파견 관료가 질병으로 숨지면 그만큼 지역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도 약해졌다. 이 때문에 제국 열강들은 과학 그리고 의학에 막대한 지원을 해주었다. 과학과 의학은 제국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영국에는 ‘열대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패트릭 맨슨과, 말라리아가 모기에 의해 전파됨을 처음으로 밝힌 로날드 로스가 있었다. 독일에는 ‘미생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코흐와 ‘화학요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폴 에리히가 있었다. 이탈리아에는 말라리아학의 대가이자 인간 사이에서도 말라리아가 모기로 전파됨을 확증한 지오바니 그라시가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에는 자연발생설을 부정해낸 첫번째 학자이자 광견병 백신 개발을 통해 면역학의 새 장을 연 루이스 파스퇴르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제 과학은 과학적 토론의 장이 아니라 정치의 장이 되었다. 각국은 이 학자들을 영웅으로 대접했다. 국가는 이들의 학문적 성과를 과대 포장하여 선전하기 바빴고, 이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사이가 극도로 나빠진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특히 심했다. 그라시는 로스가 말라리아 전파 경로를 밝혀낸 것은 조류 모델이었으므로 인간을 대상으로 확인한 자신이 첫번째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흐는 말라리아 연구에서 자신을 제외한 그라시에 화를 내어 노벨상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코흐와 파스퇴르 사이에서는 결핵 백신 경쟁이 불붙어 무리하게 진행한 임상실험으로 많은 피험자들이 피해를 보기도 했다. 이제 과학은 국가의 선전도구로 전락했다. 물론 코흐나 파스퇴르 같은 이들이 대단한 과학자인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들 이전에 다른 많은 학자들이 이룩하고 쌓아온 실험과 가설들이 있었건만, 그것들은 모두 잊혀진 채 이제는 ‘영웅의 업적’만이 기억되고 있다. (앞에서 쓴 ‘말라리아의 정치학’(”말라리아 방제실패는 냉전시대 정치갈등의 산물”) 글에서도, 국가에 의해 조장된 과학계 안의 헤게모니 싸움이 어떻게 과학계를 갈라놓고, 나아가 공중 보건에 대한 접근법을 파탄냈는지 잠시 얘기한 적이 있다.) ‘맥락 잊은 채 결과만을 바라보기’
영웅 만들기가 초래하는 재앙 다시 말해보자. 파스퇴르는 어떻게 유명해졌나? 국가가 그와 그의 과학을 좋은 선전 도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가? 과학자의 영웅화는 과학적 사실 대신에 헤게모니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과학계는 과학을 논하는 장이 아닌 정치를 논하는 장이 되었고, 과학 내 특정 개념이 형성돼온 역사적 맥락은 잊혀진 채 영웅들의 결과만이 남게 되었다. 우습다면 우습고, 슬프다면 슬픈 이야기다. 역설적이게도 과학 교육에서는 결과가 아닌 과정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지만 교과서의 페이지를 몇 장 더 넘기면 역사적, 과학적 맥락과 단절한 채 자연발생설과 파스퇴르의 관계를 설명하는 대목이 으레 등장한다. 무심코 우유 곽에 쓰인 문구을 보며 떠올린 파스퇴르에 대한 생각이 오늘날 한국의 모습으로 번진다. 과학자 뿐만 아니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몇 해 전 줄기세포 논문조작 사건이 우리에게 던져준 충격을 아직도 생생히 떠올릴 것이다. 사건 이후에 많은 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했다. 논문 실적에 연연하는 한국 과학계의 병폐, 연구윤리의 부족부터 착취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석박사 과정 연구생들의 업무환경까지. 하지만 사건이 표면에 등장하기 이전에 오랫동안 국가는, 그리고 우리는 ‘황우석’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얻으려 했던가? 우리사회는 19세기 말엽 제국들이 그러했듯이 ‘영웅’을 만들고 싶어했다. 하지만 과학자를 ‘영웅’으로 만들고자 했던 제국의 시도는 재앙을 낳았다. 과학게가 정치 권력의 장이 되었다는 건 사소한 일일지도 모른다. 영웅들의 자존심은 너무 높았고 영웅들의 자존심 때문에 공중보건은 현실적인 접근 방식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파스퇴르가 자연발생설을 부정하기까지, 그리고 파스퇴르가 유명세를 얻기까지, 그 이면에는 자연발생설의 부정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21세기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고 맥락 없이 결과만을 바라보며 계속 ‘영웅 만들기’만을 원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황우석’을 계속해서 만나게 될 것이다. 사이언스온 정준호 [사이언스온 원문보기] <한겨레 인기기사> ■ 세입자엔 ‘빚내서 전세금 올려줘라’…부자에겐 ‘이 기회에 집 많이 사라’
■ 아랍 시민혁명 이집트서 꽃피다
■ ‘매몰’ 돈사 10m 옆 사체 방치…경기도 “무관한 사진” 억지
■ “부처가 밥주냐? 예수 믿으라” 70대 목사, 조계사 경내서 소란
■ 청와대 등 수도권 방어 대공포 알고보니 ‘짝퉁포’
■ 조석준 ‘음주 뺑소니’…청와대 알고도 임명 강행
■ “물가 불안” 아우성인데…한은 ‘환율 방어’ 택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