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의 지하 재배실에서 자라는 벌노랑이. 개화가 빠른 개체들 간, 또는 개화가 느린 개체들 간의 교배 실험이 재배의 주 목적이다. 이렇게 해서 개화가 아주 빠른 개체와 아주 느린 개체를 얻을 수 있으며 다시 이를 대상으로 유전자 비교분석을 하면 개화 관련 유전자를 추려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연구를 하고 있다. 사진/ 오하나
오하나의 “식물 실험실의 생명 왈츠” (2) 유학의 동기, 그리고 입학 이후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이 편한 고국 땅을 떠나 유학을 결심하게 되는 이유는 제각각인 것으로 보인다. 전공이 문과냐, 이과냐에 따라 유학의 이유와 유학국 선정 기준도 또한 크게 달라진다. 이과였던 친구들의 유학 동기를 물어 보니, 좀 더 좋은 연구 시설과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는 연구 환경에서 연구를 하고 싶어서, 관심 있는 연구 분야가 국내에는 없어서, 막연히 새로운 곳에서 학문을 하고 싶어서, 명문대의 이름이 학위 과정 이후 취직에 도움이 될까 해서, 학문과 동시에 영어 의사소통 능력도 갖추기 위해서, 등등 다양했다. 개인이 연구를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에 따라 조금씩 그 목적들이 세분화되어 있는 가운데.
나의 경우는 다른 무엇보다도 좋은 교수 아래에서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학부 시절에는 소비자학이라는 문과 계통의 분야를 전공했는데, 전공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다른 대학의 전공과 교양 수업을 주로 듣고 다녔던 주변부적인 생활을 하였다. 보전생물학이나 수목학 등, 식물과 관련한 수업도 수강했던 것들 중 한 부류였는데, 수업을 듣다 보니 재미가 있었고, 재미가 있다 보니, 식물에 대해 앎 이상의 발견을 하고 싶어졌다.
좋은 지도교수, 내가 찾아보자
그래서 서울에 있는 어느 대학교의 농대학원에 진학하였지만, 이러저러한 사정에 의해 결국 졸업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었다. 이 때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하나의 소신을 안겨 주었는데, 그것은 ‘어딜 가나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연구가 됐든, 회사일이 됐든, 주변에 좋은 사람이 있으면 안 될 일도 잘 되고, 잘 될 일은 더 잘 된다는 단순한 원리 말이다. 연구라는 것은 지도교수와 그 아래에 있는 몇 안 되는 학생이 주축이 되어 작은 조직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므로, 궁합 맞는 좋은 지도교수 연구실에 소속되느냐 마느냐가 학생의 학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생들은 짧은 기간에 연구를 설계하고 수행하여 논문으로 정리하는 일련의 과정을 습득하는데, 이 과정은 보통 지도교수의 스타일을 따라 하며 얻어 나간다. 이 때, 좋은 지도교수의 지도를 받은 학생은 본보기가 될 만한 연구자의 연구 태도와 방식도 함께 체득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지도교수 밑에서 장기간 생활해 보지 않는 이상, 그 지도교수가 어떤 사람인지 객관적으로 파악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부 학생들은 어떤 지표로 좋은 지도교수를 선별할 수 있을까? 이런 방법이 가장 좋을 것 같다. 그 지도교수의 수업을 사전에 들어 보는 건 어떨까. 6개월 단위의 수업을 들으면, 지도교수의 연구에 대한 철학이나 열정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을 테고, 더불어, 지도교수의 학생 지도 스타일도 수업 시간을 통해 파악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그것과는 별도로, 연구자로서 얼마나 꾸준히 논문을 내고 있는지, 즉 능력 있는 연구자인지는 수업만을 듣고서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것은 인터넷으로 그 사람의 연구 실적을 검색해 보면, 어느 정도 알아낼 수 있다. 연구자로서 기본적인 성품과 열정을 갖추고 꾸준히 연구 실적을 내는 사람. 이런 연구자를 찾는게 수월해 보이지만, 의외로 하늘의 별따기라는 게 연구계의 현실이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믿어 줄까.
정식 입학일보다 석 달 앞서 연구실 생활을 시작한 탓에, 나는 공식적인 책상을 얻을 수 없었다. 반대편 학생의 얼굴과 마주치지 않도록 달력으로 어설프게 칸을 막은 채, 그렇게 석 달 동안 간이 책상에서 공부했다.
그래서 나는 2년 전에 우연히 방문했던 현재 연구실에서 교수의 학생 지도 철학과 연구 방식에 깊게 감동했던 기억을 더듬어, 이곳 연구실에 연락을 취하고 유학에 필요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까지는 내 선택에 단 한번도 후회를 해 본 적이 없다.
그렇게 교토대학교 히로아키 세토구치 연구실의 입학을 위해, 유학 시험(인간환경학과 전공과목 시험과 영어·일본어 시험, 그리고 면접)을 준비한 후 시험을 치뤄냈고, 운이 좋게도 6개월 뒤에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2011년 4월 석사과정 입학이 확정되었는데, 난 서둘러 연구 주제를 정하고 실험을 시작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뭐가 그리 조급했을까 싶기도 한데, 아무래도 그 전의 석사과정을 좋게 마무리 짓지 못했다는 불편한 마음에 한시라도 빨리 논문을 써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4월 입학보다 석 달이나 빠른 1월부터 교토의 연구실 생활을 시작했고, 4명이 한 방을 쓰는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며 연구실에 나가기 시작했다.
벌노랑이의 종내 분화에 관심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지도교수와 상의해 연구 주제를 선정하는 일이었다. 연구 주제의 선정도 또한 만만치 않은 작업으로 보통 학생은 지도교수가 미리 생각해 놓은 연구 주제를 받는다. 정부 입장에서는 독창적이고 유용한 연구 주제일수록 환영하며, 교수 입장에서는 좋은 연구 실적을 지속적으로 낼 수 있는 연구 주제를 선정하고자 한다. 배우는 학생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지만, 그래도 교수가 제시한 연구 주제가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는 연구 주제와 동떨어져 있는 것이라면 교수와 상담할 때 거절할 권리가 있다.
나는 비교적 하고 싶었던 연구 대상과 주제가 구체적이었는데, 같은 식물이더라도 야생 집단의 개체들을 대상으로 연구하고 싶었으며, 연구 주제로는 식물의 종 다양성과 진화 과정, 또는 보전생물학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때마침 지도교수는 일본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는 ‘벌노랑이’라는 식물의 종 분화 과정을 연구하고 싶어 했다.
벌노랑이라는 식물은 일본, 한국, 중국, 대만, 파키스탄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지역에 넓게 분포하며, 위도 차가 큰 지역 환경에 적응해 지역에 따라 개화 시기를 달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식물에서 개화란 다음 세대를 생산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생애 단계로서, 개화 시기의 분리가 갖는 의미는 굉장히 크다. 같은 종이라도 개화 시기가 두세 달 정도 차이가 나 버리면, 다른 지역 간 개체들의 교배 기회는 0에 가까워 진다. 이는 생식적 격리를 불러일으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 같은 종이라도 다른 유전적 배경과 표현 형질을 갖는 종내 분화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오! 연구 주제만 들어도 벌노랑이의 종내 분화 현상을 다 밝혀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벌노랑이의 야생 집단 샘플을 이용하여, 개화 시기와 관련한 유전자를 추려내고, 지역별로 유전자 유형을 조사해 보자. 그런데 개화 시기와 관련한 유전자는 도대체 뭐가 있지? 아, 그것과 동시에 야생 집단의 개화 시기를 재확인해야 할 것 같고…. 어라? 야생 집단 표본이 부족하군. 그러고 보니, 난 분자생물학 실험도 잘 모르잖아? ……
“힘들구나, 네 유전자 비밀을 알려줘”
그렇게 연구실 생활을 시작한 뒤로 정신 없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별 일이 없다면 학교에 나가 실험에 매달렸다. 그 결과 나는 두 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1. 쏟아 넣은 시간과 노력만큼의 실험 결과. 벌노랑이 야생 집단의 개화 시기 분화에 관여할 것 같았던 광수용체 유전자 그룹이 별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연구 결과였다 (이를 정리하여 일본식물학회와 일본식물분류학회에서 발표를 하고 현재는 국제 저널에 논문을 투고해 재수정하는 중이다).
2. 나머지 하나는 ‘일자 목’ 증세 악화로 인한 어깨 통증과 만성 요통 (이래서 운동은 필요한가 보다).
부정적인 연구 결과와 더불어 찾아온 ‘일자 목’ 증세는 나를 조금 지치게 했다. 담배라도 피워 볼까? 하다가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벌노랑이가 있는 재배실에 가 보았다. 그리고 활짝 만개한 그 얼굴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물어 봤다. 네 얼굴을 피게 한 유전자들의 비밀을 알려다오.
벌노랑이는 애석하게도 형광등만 바라 보고 있었다.
오하나/일본 교토대학교 인간환경학연구과 상관환경학 전공 석사 과정 | 식물의 환경 적응 및 종분화 연구 중. | 개인 블로그 (http://flowersneversay.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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