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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과학

실험실 안에 떠도는 정체불명의 이것은?

등록 2012-06-12 14:56수정 2012-06-12 15:11

실험실 공간의 생활문화 들여다보기
‘청춘 스케치’에 연재하는 다른 필자들과 달리, 나는 그동안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자연과학 ‘밖’의 사람들과 나누었던 경험을 많이 이야기했다. 이번 글은 ‘안’의 이야기이다. 실험실·연구실에서 생기는 생활 에피소드를 통해, 인간이라면 고민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다. 다른 필자들의 연재에서 ‘실험실의 일상’에 관해 많이 언급되었으니,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대학원 실험실의 특성 몇 가지를 간추려보자.

- 연구라는 하나의 목적을 갖고 모인 집단이다.
– 나이가 지긋한 교수님부터 갓 학부를 졸업한 석사생들까지 폭이 넒은 연령대로 구성되어 있다.
– 실험실이라는 공간을 공유한다.
– 아침부터 저녁까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 서로 어려운 실험이 있거나 고민이 있으면, 돕고 들어준다.

사실, 위에 간추린 특성에서 몇 단어만 바꾸면 실험실의 특성은 일반 회사의 특성과 별 다를 게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험실은 그 자체만이 지닐 수 있는 특수한 환경 속에 있다. 일반 기업처럼 연봉을 받고 일하는 곳이 아니다. 연구생들은 일정 수준의 인건비를 받고 연구 활동에 참여하지만 임금을 받고 주어진 일을 직업적으로 처리하는 회사원과는 다르다. 당장의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거나 영리를 추구하는 집단도 아니다.

한편, 대학원 실험실이 교육기관인 대학교에 소속되어 있으니 그저 고등교육의 일부를 담당하는 곳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나의 대답은 ‘그런 곳이 아니다’이다. 대학원생도 등록금을 내고 수업을 듣는다. 하지만 이는 실험실에서 하는 일이 아니다. 상급(senior) 과학자에게서 교육을 받지 않느냐고 반문한다면, 대학이 아닌 연구소에도 해당하는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실 과학자들이 자신의 대학원 과정을 돌이키면서 말할 때, ‘대학원은 직장과 학교도 아닌 중간 단계’라고 자주 평한다. 과연 대학원 실험실의 정체는 무엇일까.

실험실 환경이 특수하다고 이야기했지만, 실험실이라는 공간에 있는 사람들, 즉 구성원(member)들이 직장인, 학생들과 유별나게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실험실 안 세대의 터울은 20~30년이다. 50대 교수님과 20대 대학원생. 구성원의 연령대가 넓은 데다가, 대체로 서로 주장이 강하고 경험한 문화도 다르다. 사실 10년 안팎으로 차이가 나도 서로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기는 어렵기 마찬가지이다. 권위주의 시대에 살았던 기성세대와 자유분방한 시대를 사는 청춘세대 사이에는 분명 간극이 존재한다. 세대 차이는 어떤 집단에서도 겪는 보편적인 문제이다.

학교 같기도, 직장 같기도, 가족 같기도…

실험실은 말 그대로 실험‘실’(室)이라는 공간을 공유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공동기기를 사용하며, 제한된 장소에서 생활한다. 주로 활동하는 일과시간을 조절하여 서로 부딪치지 않고 지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함께 모여 일을 한다면, 확률이 얼마나 될지 계산하지 않더라도 개인 간 충돌은 한 번 쯤 빚어질 수 있다. 다양한 환경에서 자라 각기 다른 가치관이 이미 형성된 상태에서 한 데 모인 사람들이 있는 곳이 실험실이다. 그래서 각자가 나름대로 정해놓은 기준이 있게 마련이고, 그 기준을 상대방이 어겼을 때 하루에도 몇 번씩 오해는 발생한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어느 곳이든 비슷한 모양이다.

보편적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상당히 독특한 정체불명 환경의 실험실…, 내가 주목한 점이 바로 이것이다. 보편적 인간이라는 점은 인문적 사유가 통용될 수 있다는 뜻이고, 정체불명 환경이라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는 학교 같기도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직장처럼 업무 중심으로 일을 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실험실 구성원의 면면을 살펴보면 서로 분명하게 다른 삶의 철학이 발견된다. 어떤 연구원은 공자가 말한 유교적 예를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어떤 대학원생은 양주가 주장한 소탈하고 아나키즘적인 생활을 추구한다. 나의 경우는 묵자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공자가 말한 유교적 예의 실천’이라고 빗대어 말한 것은 학위로 나뉘는 지식의 서열구조가 한국사회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식이 권력이 되면 안 된다는 말(엘리티즘)이 있기도 하지만 잘 안 지켜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실험실 내에서 토론 중에 석사생의 의견이 무시되거나 언론에 보도되어 나오듯 대학원생이 논문의 공동저자 목록에서 누락이 되는 경우는 사람을 계층화, 차별화하는 유교적 무의식적 습관이 드러난 결과라고 생각한다. 양주의 철학을 빌려온 대학원생의 경우에는 규율에 얽매어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실험실의 특성상 약간의 자유는 구속되는 것이 현실이기에 이런 대학원생한테는 스스로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 있다.

나는 실험실에서 묵자의 철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묵자의 사상은 한마디로 ‘차별 없는 사랑’이다. 겸애(兼愛)라고 표현되는 묵자의 생각은 누구나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측면에서 유교적 관습이 깊게 배인 연구원과는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또한 실험실에서는 구성원의 이기적인 모습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한된 시간 안에 의미 있는 결과를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의 실험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동료 구성원이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더라도 감싸주고 이해하는 게 올바른 길이라고 믿는 것이다.

철학자들을 잠시 모셔왔지만, 결론은 하나이다.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실험실에 모여 있으며 사실 따지고 보면 그들의 생각도 이미 2000년 전에 성현들이 성찰했던 삶의 태도와도 닿아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제자백가가 끊임없이 고뇌했던 문제가 우리 실험실에서도 재현되어 나타난다고 생각하니 흥미롭기도 하지만, 더 많은 생각거리를 내게 던져준다. 내게는 실험실 구성원 각각 한 사람이 공자, 맹자, 양주, 한비자… 이렇게 보인다.

‘비온 뒤에 땅 굳듯이’ 오해와 갈등 잘 풀어내기

그러나 더 재미있는 사실은 가변적인 실험실의 환경이다. 일반적으로 환경에 따라서 사람들의 생각은 달라진다. 환경에 맞춰 최적화된 방향으로 적응한다. 나는 실험실에서 가족 같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물론이고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직장에서 겪는 좌절감 등을 모두 다 느끼곤 한다. 가족 구성원들은 오랜 동안 함께 지내며 서로를 너무도 잘 알듯이, 실험실 구성원들도 하루 9시간 정도 얼굴을 마주하며 지내기에 어떤 때엔 가족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학위 과정이라는 약간 인위적인 면이 있지만, 그 기간에 어찌 보면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실험실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보낸다.

그래서 충돌이 생기고 이로 인해 빚어지는 오해도 생긴다. 차분한 대화로 오해를 푼다. 갈등은 풀리고 원만한 관계가 다시 지속된다. 비온 뒤에 땅이 굳듯이 서로 생각이 다름을 인정하고 도리어 좋은 분위기는 더 안정적으로 이어지게 된다. 비록 잘못한 일이 있다 해도 용서하고 기회를 주고 용기를 북돋아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노력들이 실패한다면 심한 때에는 관계의 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또한 연구 주제와 내용을 두고서 실험실 구성원과 함께 논의를 할 때에는, 학교 선생님의 가르침 같은 분위기도 느껴진다.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알려주는 것이 아닌, 생각이 막혀 돌파구가 필요할 때 실험실 사람들의 한 마디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일 때 미적분 문제를 재밌게 설명해주신 수학 선생님과 연구 주제의 방향을 논리적으로 제시해주는 실험실 구성원은 내게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때로는 선배가 직장 상사처럼 후배에게 일을 맡긴다. 지도교수도 지도학생에게 피도 눈물도 없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물론 연구의 효율성과 엄밀성, 정직성에 초점을 맞췄을 때 이는 당연히 올바른 태도이다. 흔히 냉정한 직장 분위기를 떠올릴 때에 우리는 실패를 잘 용인하지 않고 동료와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일도 피하는 개인주의와 경쟁주의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 정도는 아니지만 회사 분위기가 실험실에서도 느껴질 때가 있다.

하나의 가치관으로 형성된 인격체를 이루는 실험실 구성원들이 어떤 때에는 가족 같고 또 어떤 때에는 학교 같고, 회사 같은 실험실의 독특한 환경에 적응하는 데에는 어쩌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자신이 지닌 삶의 철학을 강조하거나 심지어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묵자의 철학을 고수하는 나는 실험실에서 회사 분위기가 느껴질 때에 가장 견디기가 힘들다. 실수이건 어떻든 간에 실패한 어떤 실험 결과에 대해 수많은 질책이 주어질 때, 나는 질책만 할 것이 아니라 신뢰의 신호를 다시금 보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저 회사 분위기라면 그런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실례를 들지 않았지만, 실험실 구성원 중에 한비자의 철학을 고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실험실이 가족 분위기처럼 느껴질 때 가장 견디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사소한 잘못이라도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환경과 철학이 다른 사람들의 공존이야말로 실험실을 경계가 불분명한 공간으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실험실에 있다 보면 말 한 마디에도 서로 상처를 주고 입는 모습을 자주 본다. 그 때마다 느끼는 것은 왜 항상 가족처럼 잘 지내는 사람들이 사소한 일 하나로 관계가 틀어지는가이다. 나는 그 이유가 무엇일지 항상 의문을 품었었다. 그리고 실험실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는 경계가 모호하고 그 안에 생각이 서로 다른 구성원들이 생활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하나의 공동체로서 실험실이 움직이지만 그 속의 구성원들은 개인주의 속성을 오롯이 갖고 유연하게 생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안쪽’의 사람들은 연구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받지만 관계 형성, 유지, 회복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마치 과학자들이 실험기구와 씨름하는 사람들로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사회를 이루는 모든 사람들은 비슷한 고민과 비슷한 생활양식을 갖고 살아간다.

한정규/서울대학교 대학원 뇌과학협동과정 (신경과학 전공) / 현미경, 시냅스 기작 연구 | 트위터 @jayhan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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