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 실험을 할 때 자주 이용하는 이른바 `셀 방’은 청정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외부와 격리된 공간이었다. 이곳에서는 때때로 라디오를 켜놓고 청취자의 애환 편지에 공감하면서 실험할 수 있었고, 또 어쩌다 다른 사람과 함께 실험하는 날이면 어김 없이 이야기 꽃이 활짝 피어났다. 사진/ 한아름
[사이언스온] 라운지 - 연구생들의 청춘 스케치
한아름의 “실험실의 좌충우돌 일상” (4)
한아름의 “실험실의 좌충우돌 일상” (4)
이른 아침 출근 시간에 붐비는 지하철 환승역. 인산인해를 이루어 내 몸조차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다. 출근하고서 하루 종일 직장 동료와 함께 업무에 시달리고는 다시 극심한 교통 체증을 뚫고 집에 돌아온다. 치열하게 되풀이되는 이런 일상 속에서, 불현듯 조용한 ‘나만의 공간’이 필요함을 느낀다. 직장인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밀려드는 시험과 과제에서 벗어나고 싶을때가 있을 것이고, 부모님도 우리를 잠시나마 떼어놓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며, 연인 사이에서도 가끔 혼자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하루의 일상을 보내다가, 또는 바쁜 시간을 보낸 뒤에 문득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5살짜리 조카도 엄마한테 혼난 뒤에 방문을 닫고 들어가면 아무리 불러도 나오려 하지 않으니, 정말 누구에게나 어떤 때에는 이런 혼자의 공간과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과학을 공부하는 연구원도 마찬가지이다. 과중한 실험 스케줄이 눈앞에 쌓여 있지만 잠시나마 실험실 밖에서 차 한 잔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실험을 잊고서 조용한 음악 한 곡 듣거나 따라 부르고 싶을 때도 있다. 열 명 남짓 되는 실험실 식구들과 아침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실험실이라는 좁은 공간 안에서 서로 부대끼며 생활하다 보면, 식사 정도는 실험실 바깥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날, 또는 똑같이 반복하는 실험이라도 하루 정도는 부대낌 없이 혼자의 공간에서 조용히 해보고 싶은 날이 있더라는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어느 실험실에나 있을 법한 ‘나만의 공간’,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엔 별다를 것 없는 그저그런 창고나 기계실에 지나지 않을 ‘아지트’ 몇 군데에 깃든 추억을 얘기하려고 한다.
#1. 셀 방: ‘그 안에서 시간은 어찌 그리 빨리 가는지’ 우리 실험실에서는 암세포나 줄기세포 등의 세포에 다양한 화학물질이나 펩타이드를 처리한 뒤에 그 효과를 확인하는 실험도 했다. 그런데 세포를 다룰 때에는, 세포나 세포배양액이 공기중의 오염물질에 쉽게 변성될 수 있기 때문에 클린벤치(Clean bench)라는 상자형 용기 안에서 알코올 램프도 켜놓고 벤치와 손도 알코올로 깨끗하게 소독한 다음에 실험에 나서야 한다 (▷클린벤치: 무균 조작을 해야 할 때 ‘무균 실험대’로 사용되는 상자형 용기. 무균 공기를 만들어내고 에어커튼으로 외부와 단절할 수 있으므로 오염된 공기는 들어오지 못한다). 우리 실험실 뒷편에 클린벤치가 설치된 작은 방이 있었는데 그 방에는 세포배양기(Incubator)와 세포를 보관하는 액체 질소탱크 같은 세포실험용 장비가 가득해서 우리끼리는 ‘셀(cell) 방’이라고 불렀다. 실험실에서 유일하게 ‘격리된’ 공간인 셀 방에서 실험을 한 번 시작하면 사람들이 한동안 밖에 나오지 않기에, 누군가가 들어가서 물어보면 셀 방에 있던 사람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였다. 내가 실험실에 들어온 뒤 처음 몇 달 동안은 RNA에 결합할 수 있는 화학물질이나 펩타이드를 설계(디자인)하고 합성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셀 방에서 실험할 기회가 없었다. 그저 그 안에서 실험하는 언니들을 부러워하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 방에서 실험하지 못하는 신참인 나는 당시에 ‘과연 저 안에서 실험하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신비감마저 가지고 있었다. 셀 방에는 세포실험장치 이외에 형광분광기(Fluorescence Spectrophotometer)가 있어서 그 방에서 실험할 수 있는 사람은 세포 실험을 하거나 형광분광 측정실험을 하는 사람뿐이었다 (▷형광분광기: 형광의 강도를 광전류로 변화시켜 그 강도를 측정하는 장치). 그러다 여섯 달쯤 지나서 처음 형광분광 실험을 하게 되었다. 실험 도구를 챙겨 설레는 마음으로 셀 방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마치 거실에서만 생활하던 막내가 드디어 내 방을 갖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험 시료(샘플)가 필요할 때에도 등 바로 뒤에 있는 냉장고에서 편하게 꺼내어 쓸 수 있고, 더운 여름날 에어컨도 내 마음대로 조절해가며 쾌적하게 실험할 수 있었다. 라디오를 켜놓고 청취자의 애환 편지에 공감하면서 실험할 수 있었으니 지상낙원이 따로 없었다. 어쩌다 세포실험을 하는 사람과 시간이 겹쳐 함께 이 방에서 함께 실험하는 날이면 어김 없이 이야기 꽃이 활짝 피어났다. 셀 방에서 실험만 하면 시간이 어찌 그렇게 빨리 흐르는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문을 열고 바깥 세상으로 나와보면 시계 바늘이 훌쩍 돌아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안에서나 밖에서나 어차피 실험한다는 것은 같은데 장소만 살짝 옮긴 것에 그토록 색다른 기분을 느끼고 미소 짓던 실험실 사람들이 귀엽게 느껴진다.
#2. 동위원소실: ‘주섬주섬 실험도구 들고서 찾아가던’ 셀 방과 같은, 그러나 좀 더 특별하고도 독립된 공간이 있었으니 바로 동위원소실이다. RNA와 화학물질 간의 결합력을 측정하는 방법 중 하나가 동위원소를 사용하는 방법인데, 방사성을 띠는 이 동위원소를 어떤 화학물질에다 표식처럼 붙인(표지한) 다음에, 동위원소 표지를 한 화학물질과 RNA 물질을 결합시키고서 방사능 세기를 측정하면 두 물질이 얼마나 상호작용을 잘 하는지 알 수 있다. 동위원소로 표지한 물질은 나노 단위의 미량으로도 감지되기 때문에 미세한 양의 물질에서 일어나는 결합 정도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실험 방법이다. 이 때 사용되는 동위원소는 원소의 원자핵이 붕괴하면서 방사선을 방출하므로 방사성 동위원소를 취급하는 실험실은 특별한 허가를 받아야 하고 동위원소를 다루는 실험시설은 특정 건물 안에 일반 실험실과 구분하여 설치해야 한다. 이런 동위원소실에는 실험에 쓰고 남은 동위원소를 처리하기 위한 두꺼운 플라스틱 폐기물 상자 또는 납으로 만들어진 상자, 그리고 실험대마다 방사능 피폭을 방지하기 위한 차폐막이 설치되어 있어서 처음 그 방에 들어가 보았을 때 조금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우리 실험실에서 형광분광 실험으로 물질간의 전반적인 결합력을 확인한 다음에 동위원소 실험을 추가로 진행하기 위해 동위원소 사용 교육을 받고 사용 허가를 받았다. 흔히 몇 개의 실험실들이 동위원소실 하나를 함께 이용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그 실험을 위해서는 실험에 필요한 도구를 잔뜩 챙긴 다음에 어깨에 짊어지고 동위원소실이 설치된 건물까지 걸어가야 했다. 무더운 여름에 꼼꼼하게 실험 준비를 해서 뜨거운 햇빛을 뚫고 이동하는 것이 고역일 때가 있다. 특히, 실험 도중에 필요한 용액이나 준비물을 챙겨오지 못한 것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다시 우리 실험실로 돌아가서 빠뜨린 물건을 챙겨와야 했다. 장마철에는 우산과 실험도구를 두 손 가득히 들고 바지는 빗물로 다 젖어가면서 동위원소실에 도착하곤 했는데, 그런 내 모습에 정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방사성 동위원소실 안. 방사성 동위원소를 어떤 물질에 ‘표지’로 붙이면 그 물질을 미량이라도 관측할 수 있기 때문에 RNA와 어떤 화학물질 간의 결합력을 확인하고자 할 때에 방사성 동위원소실의 시설을 이용했다. 특별한 교육과 사용 허가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는 그곳은 일상적인 실험실에서 벗어난 또 하나의 공간이 되곤 했다. 사진/한아름
이렇게 불편함을 감수하고 멀리 떨어진 새로운 실험실에 도착해서 각종 방사성 위험 표지들이 붙어 있는 실험대 앞에 앉아 있노라면 서글픔이 마구 밀려온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어떤 때에는 동위원소실에서 너무 실험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른 아침부터 랩 미팅에서 실컷 혼나고 나서 주섬주섬 실험 도구를 챙겨 ‘나만의 공간’에 도착하면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라디오 볼륨을 크게 올리고 잠시 앉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험을 핑계로, 주눅들어 있는 나의 눈치를 살피는 실험실 동료들의 시선에서 잠시 피해 셀 방보다 더 먼, 또 다른 공간에 잠시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3. 휴게실: ‘실험실 공동체생활의 애환이 묻어나는’ 나의 석사과정 졸업이 가까워질 무렵에야 드디어 ‘우리만의 공간’이라 부를 만한 제대로 된 공간이 마련되었다. 실험실 맞은편 방을 쓰시던 분이 떠나시면서 빈 공간이 하나 생겼다. 탁자와 의자를 놓고 하루 이틀 점심 식사를 하다 보니, 또한 전자레인지, 커피 포트, 토스트기까지 가져다 놓게 되면서, 그곳은 점점 우리만의 휴게실로 변해갔다. 실험실 식구 중 누군가가 생일을 맞으면 그곳에서 케이크와 촛불을 준비해두고 깜짝 파티를 열기도 했고, 고백컨대 점심 식사 뒤에 식곤증이 밀려올 때에는 그곳에서 잠시 쪽잠을 청하기도 하였다. 또 언젠가부터 지도교수님께서 파스타 요리에 심취하셔서 새로 배운 파스타 요리를 직접 만들어 오실 때가 있었다. 그 때에도 휴게실에 둘러앉아 텀블러에 와인을 한 잔씩 채우고 파스타와 샐러드를 일회용 접시에 놓아 테이블에 차리면 우리 휴게실은 근사한 파스타 파티장으로 변신했다. 특히 나는 개인적으로 석사 졸업논문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나고 실험실 식구들에게 감사의 글을 쓸 때에도 이 휴게실을 이용했다. 조용히 앉아서 텅 빈 공간을 바라보며 이 곳에서 있었던 일을 되뇌어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실험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스스로 실망하며 혼자 휴게실에서 눈물을 훔치던 동료의 어깨도 감싸주었고, 졸업을 앞두고 취업 원서를 쓰거나 면접 준비를 할 때에도 ‘우리만의 공간’은 저력을 발휘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내가 졸업 논문 심사를 앞두고 발표 준비를 할 때에도 이 작은 공간에서 동료들의 도움을 받고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으니 어쩌면 실험실에서 씩씩하게 실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휴게실에서 주고 받았던 따뜻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자신들이 겪는 일상에서 조금 떨어진, 그리고 조용히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의 따뜻한 집이 될 수도 있고, 내 방, 자동차, 아니면 근처 자주 들르는 카페나 서점 또는 영화관 등이 될 수도 있겠다. 종교에 관련된 장소를 찾아 마음의 휴식을 취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집 근처 백화점에서 재충전을 하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실험실에 몸담은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앞서 소개한 공간들을 보고 ‘이게 무슨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공간이야?’ 하고 생각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 내가 소개한 실험실 속의 우리만의 작은 공간은 겉에서 보았을 때 단순한 작업장 또는 빈 방 정도로 인식될 수 있지만 우리 연구원들에게는 정말 필요할 때 쉼터가 되어주고 실험실 생활 중에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소소한 재미를 주는, 작지만 크고 넓은 공간들이다. 실험실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을 풀어낼 공간이 마땅치 않은 환경에서, 이런 나만의, 우리만의 ‘아지트’에 잠시 몸을 숨기고 있는 동안에도 실험에 차질이 없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싸인 채, 연구원들은 점차 ‘소박한 것들’에 기쁨을 느끼고 감동받게 되는 것 같다. 또, 실험실 생활을 조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이런 소소한 공간이 때로는 얼마나 위안이 되고 또 필요한지 알 것이다. 동물조차도 먹이를 주지 않을 때 못지 않게 자신의 공간이 확보되지 않을 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연구 결과를 뉴스 보도에서 본 적이 있다. 각 실험실마다 마땅히 존재할 ‘우리만의 작은 공간’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그곳에서 얻은 소소함과 편안함을 다시 느끼면서 흐뭇한 미소와 함께 오늘도 그 공간이 함께하는 실험실에서 또 한번 더 힘을 내어 보자!
한아름
"화려하고 심오한 모든 것의 본질은 단순하다" 경북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생 / 서울대학교 화학교육과 생화학석사 / 장래 희망은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할 수 있도록 돕는 따뜻한 과학인이 되는 것. | 트위터 @areumhan24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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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셀 방: ‘그 안에서 시간은 어찌 그리 빨리 가는지’ 우리 실험실에서는 암세포나 줄기세포 등의 세포에 다양한 화학물질이나 펩타이드를 처리한 뒤에 그 효과를 확인하는 실험도 했다. 그런데 세포를 다룰 때에는, 세포나 세포배양액이 공기중의 오염물질에 쉽게 변성될 수 있기 때문에 클린벤치(Clean bench)라는 상자형 용기 안에서 알코올 램프도 켜놓고 벤치와 손도 알코올로 깨끗하게 소독한 다음에 실험에 나서야 한다 (▷클린벤치: 무균 조작을 해야 할 때 ‘무균 실험대’로 사용되는 상자형 용기. 무균 공기를 만들어내고 에어커튼으로 외부와 단절할 수 있으므로 오염된 공기는 들어오지 못한다). 우리 실험실 뒷편에 클린벤치가 설치된 작은 방이 있었는데 그 방에는 세포배양기(Incubator)와 세포를 보관하는 액체 질소탱크 같은 세포실험용 장비가 가득해서 우리끼리는 ‘셀(cell) 방’이라고 불렀다. 실험실에서 유일하게 ‘격리된’ 공간인 셀 방에서 실험을 한 번 시작하면 사람들이 한동안 밖에 나오지 않기에, 누군가가 들어가서 물어보면 셀 방에 있던 사람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였다. 내가 실험실에 들어온 뒤 처음 몇 달 동안은 RNA에 결합할 수 있는 화학물질이나 펩타이드를 설계(디자인)하고 합성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셀 방에서 실험할 기회가 없었다. 그저 그 안에서 실험하는 언니들을 부러워하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 방에서 실험하지 못하는 신참인 나는 당시에 ‘과연 저 안에서 실험하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신비감마저 가지고 있었다. 셀 방에는 세포실험장치 이외에 형광분광기(Fluorescence Spectrophotometer)가 있어서 그 방에서 실험할 수 있는 사람은 세포 실험을 하거나 형광분광 측정실험을 하는 사람뿐이었다 (▷형광분광기: 형광의 강도를 광전류로 변화시켜 그 강도를 측정하는 장치). 그러다 여섯 달쯤 지나서 처음 형광분광 실험을 하게 되었다. 실험 도구를 챙겨 설레는 마음으로 셀 방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마치 거실에서만 생활하던 막내가 드디어 내 방을 갖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험 시료(샘플)가 필요할 때에도 등 바로 뒤에 있는 냉장고에서 편하게 꺼내어 쓸 수 있고, 더운 여름날 에어컨도 내 마음대로 조절해가며 쾌적하게 실험할 수 있었다. 라디오를 켜놓고 청취자의 애환 편지에 공감하면서 실험할 수 있었으니 지상낙원이 따로 없었다. 어쩌다 세포실험을 하는 사람과 시간이 겹쳐 함께 이 방에서 함께 실험하는 날이면 어김 없이 이야기 꽃이 활짝 피어났다. 셀 방에서 실험만 하면 시간이 어찌 그렇게 빨리 흐르는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문을 열고 바깥 세상으로 나와보면 시계 바늘이 훌쩍 돌아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안에서나 밖에서나 어차피 실험한다는 것은 같은데 장소만 살짝 옮긴 것에 그토록 색다른 기분을 느끼고 미소 짓던 실험실 사람들이 귀엽게 느껴진다.
#2. 동위원소실: ‘주섬주섬 실험도구 들고서 찾아가던’ 셀 방과 같은, 그러나 좀 더 특별하고도 독립된 공간이 있었으니 바로 동위원소실이다. RNA와 화학물질 간의 결합력을 측정하는 방법 중 하나가 동위원소를 사용하는 방법인데, 방사성을 띠는 이 동위원소를 어떤 화학물질에다 표식처럼 붙인(표지한) 다음에, 동위원소 표지를 한 화학물질과 RNA 물질을 결합시키고서 방사능 세기를 측정하면 두 물질이 얼마나 상호작용을 잘 하는지 알 수 있다. 동위원소로 표지한 물질은 나노 단위의 미량으로도 감지되기 때문에 미세한 양의 물질에서 일어나는 결합 정도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실험 방법이다. 이 때 사용되는 동위원소는 원소의 원자핵이 붕괴하면서 방사선을 방출하므로 방사성 동위원소를 취급하는 실험실은 특별한 허가를 받아야 하고 동위원소를 다루는 실험시설은 특정 건물 안에 일반 실험실과 구분하여 설치해야 한다. 이런 동위원소실에는 실험에 쓰고 남은 동위원소를 처리하기 위한 두꺼운 플라스틱 폐기물 상자 또는 납으로 만들어진 상자, 그리고 실험대마다 방사능 피폭을 방지하기 위한 차폐막이 설치되어 있어서 처음 그 방에 들어가 보았을 때 조금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우리 실험실에서 형광분광 실험으로 물질간의 전반적인 결합력을 확인한 다음에 동위원소 실험을 추가로 진행하기 위해 동위원소 사용 교육을 받고 사용 허가를 받았다. 흔히 몇 개의 실험실들이 동위원소실 하나를 함께 이용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그 실험을 위해서는 실험에 필요한 도구를 잔뜩 챙긴 다음에 어깨에 짊어지고 동위원소실이 설치된 건물까지 걸어가야 했다. 무더운 여름에 꼼꼼하게 실험 준비를 해서 뜨거운 햇빛을 뚫고 이동하는 것이 고역일 때가 있다. 특히, 실험 도중에 필요한 용액이나 준비물을 챙겨오지 못한 것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다시 우리 실험실로 돌아가서 빠뜨린 물건을 챙겨와야 했다. 장마철에는 우산과 실험도구를 두 손 가득히 들고 바지는 빗물로 다 젖어가면서 동위원소실에 도착하곤 했는데, 그런 내 모습에 정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방사성 동위원소실 안. 방사성 동위원소를 어떤 물질에 ‘표지’로 붙이면 그 물질을 미량이라도 관측할 수 있기 때문에 RNA와 어떤 화학물질 간의 결합력을 확인하고자 할 때에 방사성 동위원소실의 시설을 이용했다. 특별한 교육과 사용 허가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는 그곳은 일상적인 실험실에서 벗어난 또 하나의 공간이 되곤 했다. 사진/한아름
방사성 동위원소실 안. 방사성 동위원소를 어떤 물질에 ‘표지’로 붙이면 그 물질을 미량이라도 관측할 수 있기 때문에 RNA와 어떤 화학물질 간의 결합력을 확인하고자 할 때에 방사성 동위원소실의 시설을 이용했다. 특별한 교육과 사용 허가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는 그곳은 일상적인 실험실에서 벗어난 또 하나의 공간이 되곤 했다. 사진/한아름
#3. 휴게실: ‘실험실 공동체생활의 애환이 묻어나는’ 나의 석사과정 졸업이 가까워질 무렵에야 드디어 ‘우리만의 공간’이라 부를 만한 제대로 된 공간이 마련되었다. 실험실 맞은편 방을 쓰시던 분이 떠나시면서 빈 공간이 하나 생겼다. 탁자와 의자를 놓고 하루 이틀 점심 식사를 하다 보니, 또한 전자레인지, 커피 포트, 토스트기까지 가져다 놓게 되면서, 그곳은 점점 우리만의 휴게실로 변해갔다. 실험실 식구 중 누군가가 생일을 맞으면 그곳에서 케이크와 촛불을 준비해두고 깜짝 파티를 열기도 했고, 고백컨대 점심 식사 뒤에 식곤증이 밀려올 때에는 그곳에서 잠시 쪽잠을 청하기도 하였다. 또 언젠가부터 지도교수님께서 파스타 요리에 심취하셔서 새로 배운 파스타 요리를 직접 만들어 오실 때가 있었다. 그 때에도 휴게실에 둘러앉아 텀블러에 와인을 한 잔씩 채우고 파스타와 샐러드를 일회용 접시에 놓아 테이블에 차리면 우리 휴게실은 근사한 파스타 파티장으로 변신했다. 특히 나는 개인적으로 석사 졸업논문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나고 실험실 식구들에게 감사의 글을 쓸 때에도 이 휴게실을 이용했다. 조용히 앉아서 텅 빈 공간을 바라보며 이 곳에서 있었던 일을 되뇌어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실험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스스로 실망하며 혼자 휴게실에서 눈물을 훔치던 동료의 어깨도 감싸주었고, 졸업을 앞두고 취업 원서를 쓰거나 면접 준비를 할 때에도 ‘우리만의 공간’은 저력을 발휘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내가 졸업 논문 심사를 앞두고 발표 준비를 할 때에도 이 작은 공간에서 동료들의 도움을 받고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으니 어쩌면 실험실에서 씩씩하게 실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휴게실에서 주고 받았던 따뜻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자신들이 겪는 일상에서 조금 떨어진, 그리고 조용히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의 따뜻한 집이 될 수도 있고, 내 방, 자동차, 아니면 근처 자주 들르는 카페나 서점 또는 영화관 등이 될 수도 있겠다. 종교에 관련된 장소를 찾아 마음의 휴식을 취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집 근처 백화점에서 재충전을 하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실험실에 몸담은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앞서 소개한 공간들을 보고 ‘이게 무슨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공간이야?’ 하고 생각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 내가 소개한 실험실 속의 우리만의 작은 공간은 겉에서 보았을 때 단순한 작업장 또는 빈 방 정도로 인식될 수 있지만 우리 연구원들에게는 정말 필요할 때 쉼터가 되어주고 실험실 생활 중에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소소한 재미를 주는, 작지만 크고 넓은 공간들이다. 실험실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을 풀어낼 공간이 마땅치 않은 환경에서, 이런 나만의, 우리만의 ‘아지트’에 잠시 몸을 숨기고 있는 동안에도 실험에 차질이 없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싸인 채, 연구원들은 점차 ‘소박한 것들’에 기쁨을 느끼고 감동받게 되는 것 같다. 또, 실험실 생활을 조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이런 소소한 공간이 때로는 얼마나 위안이 되고 또 필요한지 알 것이다. 동물조차도 먹이를 주지 않을 때 못지 않게 자신의 공간이 확보되지 않을 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연구 결과를 뉴스 보도에서 본 적이 있다. 각 실험실마다 마땅히 존재할 ‘우리만의 작은 공간’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그곳에서 얻은 소소함과 편안함을 다시 느끼면서 흐뭇한 미소와 함께 오늘도 그 공간이 함께하는 실험실에서 또 한번 더 힘을 내어 보자!
"화려하고 심오한 모든 것의 본질은 단순하다" 경북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생 / 서울대학교 화학교육과 생화학석사 / 장래 희망은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할 수 있도록 돕는 따뜻한 과학인이 되는 것. | 트위터 @areumhan24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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