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서부 사막에 자생하는 야생담배의 하나. 산불이 난 뒤에 갑자기 번성한다. 김상규 연구원 제공
[사이언스온] 살며 연구하며
여기에서 5월이면 그늘에서도 온도는 거의 섭씨 40도나 된다. 아침에 일어나 바로 일하러 나가는 것도 가장 뜨거운 시간대를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햇빛을 피하려고 우산을 쓴 적도 있는데 가끔 엄청나게 부는 바람 때문에 포기했다. 몸에서 나는 땀은 끈적거릴 틈도 없이 말라버려 계속 물을 마시지 않으면 쉽게 두통이 찾아오기에 물통은 항상 챙긴다. 음악을 들으려고 이어폰을 끼는 것도, 강렬한 햇빛을 피하려고 선글라스를 쓰는 것도 금지돼 있는데 뱀을 모르고 밟는 최악의 상황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간이숙소로 쓰는 트레일러는 밤에도 열기가 식지 않아, 본격 더위가 시작되면 1인용 텐트(모기장)에서 잠을 잔다. 물론 텐트에는 낮 동안 쌓인 모래가 수북하지만 뭐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여기는 미국 중서부 그레이트베이슨 사막에 있는 독일 막스플랑크 화학생태학연구소의 야외 실험실이고 나는 그곳에 자생하는 식물인 야생담배(니코티아나 아테누아타)를 연구하는 박사후연구원이다.
건조한 사막에선 마른번개로 산불도 종종 일어난다. 산불이 났을 때 긴급 대피하며 911에 신고했는데 정작 전화를 받는 사람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처리하더라는 주변 사람의 경험담은 이곳에 작은 산불이 얼마나 자주 나는지 말해준다.
그런데 골칫거리인 산불을 이용해 잘 사는 식물도 있다. 우리가 연구하는 야생담배도 그렇다. 이 식물은 산불이 나면 연기에 있는 어떤 물질을 인식해 이듬해 봄에 싹을 틔운다. 근처에 경쟁 식물이 없고 타고 남은 재 속에 영양분이 풍부할 때를 틈타 식물 성장에 최적인 환경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해가 지나고 다른 식물 씨앗이 날아와 자라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야생담배 씨앗은 발아를 멈추고 다음 산불을 기다린다. 그래서 세대 간 차이는 수백년이나 될 때도 있다. 부모는 수백년 뒤에 일어날지 모를 산불을 기다리는 자식 씨앗한테 긴 시간을 버티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담아주고 초식 곤충 같은 적을 피할 수 있게 방어 물질을 만드는 디엔에이(DNA) 정보도 넘겨준다.
언젠가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봄비가 두 차례 내렸다. 아주 드문 일이라 했다. 며칠 뒤 그곳에 오래 있던 동료도 못 본 풍경을 보았다. 행운이었다.
눈이 닿는 주변이 온통 분홍으로 덮였는데, 이름 모를 작은 식물의 꽃이 빚어낸 빛깔이었다. 다 자라 10㎝도 되지 않은 채 단 한 송이의 꽃을 피웠다. 얼마나 많은 씨앗이 그곳에서 사막의 기후를 견디며 얼마나 봄비를 기다려왔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얼마나 많은 씨앗이 그곳에 있었는지는 더 알 수 없었다. 그러고는 야생담배가 다음 산불을 기다리듯이 이 식물도 언제 올지 모를 다음 봄비를 기다리며 씨앗을 남긴 채 얼마 뒤 사라졌다. 사막은 이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현상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김상규 독일 막스플랑크 화학생태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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