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연구하며
“한국에서는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노하우를 궁금해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럼 내 노벨상을 한국 정부에 파는 건 어떻겠소?”
이런 식이었다. 2002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이자 분자생물학의 살아 있는 전설인 시드니 브레너 박사(사진)는 범접하기 힘든 천재 과학자라기보다 끝없이 농담을 던지는 유쾌한 할아버지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의 농담들 속엔 ‘뼈’가 있었다. 이를테면 ‘한국은 왜 그토록 노벨상에 목을 매는가’와 같은 물음이다.
나는 대학원에서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작은 벌레를 연구한다. 브레너 박사는 길이 1밀리미터의 작은 벌레일 뿐인 예쁜꼬마선충을 생물학 연구 대상으로 발굴한 주인공이며, 그 업적으로 2002년 노벨상을 받았다. 이제 예쁜꼬마선충은 생쥐·초파리와 함께 실험실의 모델 동물로 자리를 잡았고, 덕분에 신경과 발생 연구 분야에서 거대한 과학 지식의 장을 새로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나는 지난달 12~16일 같은 연구실의 서범석 형과 함께 브레너 박사의 한국 방문 일정을 도우며 수행했다. 여든일곱살에 휠체어를 탄 그는 생면부지의 20대 연구자들과도 따뜻한 과학의 인연을 이어주었다. 첫 만남에서 “박사님이 제 지도교수의 지도교수의 지도교수의 지도교수이십니다”라 소개했더니, 그는 “네가 나의 에프4(F4, 4대손을 뜻하는 유전학 용어)로구나! 최근엔 에프6(6대손)도 본 적 있다네! 허허허”라고 응수했다. 그의 ‘자손’이라 할 수 있는 세계 수천명 과학자들이 이 작은 벌레를 통해 미지의 생명 현상을 탐구하고 있다.
그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연구 분야를 바꿔 꼬마선충 연구에 착수한 것은 1960년대 초였다. 당시엔 모두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를 이용해 분자생물학 연구를 수행해 성과를 내고 있을 때였다. 브레너 박사는 또한 디엔에이 염기서열이 세 개씩 짝을 이뤄 하나의 아미노산을 만드는 이른바 ‘삼중코드’의 비밀을 밝히는 데 핵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당시에 예쁜꼬마선충에 관한 첫 논문을 발표하기까지는 10년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그사이에 주목할 만한 성과가 없었는데도 연구소는 그의 ‘과학적 포부’를 응원하며 지원했다. 그가 자신의 과학을 할 수 있게 도운 것만으로도 연구소는 노벨상 수상에 기여한 셈이다. 케임브리지대학이 ‘노벨상의 산실’이 될 수 있었던 건 과학자들이 자기만의 질문과 색깔을 갖고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겉보기에 우리의 연구 환경은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연구비도 점점 늘고 있다. 그런데도 브레너 박사처럼 10년을 내다보며 자기 과학을 해내기엔 그리 우호적인 환경이 아니다. 내 주위 젊은 과학도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다. 연구생의 인권이 지켜지지 않는다고, 또 연구노동에 생활이 피폐해졌다고 호소한다. 미래도 불투명하다. 이공계 박사 실업자는 나날이 는다. 학위를 받는 데 바친 젊음은 경제활동은 물론이고 가정을 꾸리는 데 발목을 잡기도 한다. 결혼도 엄두가 안 나는데 어찌 노벨상을 꿈꿀 수 있을까?
그래서 휠체어 탄 브레너 박사를 모시고 계단이 즐비한 강연장에 도착했을 때, 그때의 막막함은 내게 어떤 상징처럼 다가왔다. 화려한 무대 중앙으로 이어지는 계단 바로 앞에서 무기력하게 휠체어에 앉아 있는 우리 젊은 세대의 모습이 떠올랐다. 노벨상을 받은 천재 과학자가 계단 앞에서 그저 무기력한 여느 노인이 되었듯이, 창조적이고 열정적인 젊은 과학자들도 사회의 높은 벽과 가파른 계단 앞에서 그저 청년 구직자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일 죽을 것처럼 살며, 영원히 살 것처럼 공부하라”는 간디의 말은 내 삶의 좌우명이다. 나는 이번 닷새 동안 여든일곱살에도 열정적으로 사는 시드니 브레너한테서 ‘내일 죽을 것처럼 살라’를 보았다. 종종 산소를 공급받아야 하는데도 이동 중에 연구원과 연구계획을 논의하며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큰 물음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모습에선 ‘영원히 살 것처럼 공부하라’를 보았다.
출국 날 공항에서 노벨상을 얼마쯤에 팔 건지 물어보았더니 브레너 박사는 ‘글쎄, 1000억 원 정도에 팔면 될까’ 하고 역시 농담으로 즉답했다. 설마 한국 정부가 그 돈을 주고 노벨상을 사는 우를 범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노벨상은 인류가 던지는 큰 질문의 여정을 보여주는 징표이지 그 목적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영원히 살 것처럼 연구하는’ 열정적인 과학자들이 창조적 연구를 포기하지 않게 북돋워주는 사회 분위기가 마련된다면 노벨상은 틀림없이 그들 중 누군가를 찾아갈 것이다.
이대한 서울대 생명과학부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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