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일흔 가까이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논문을 쓰며 왕성한 연구활동을 펼치는 파리11대학의 앙리 알룰 명예연구원. 필리프 멘델 제공
[사이언스 온] 내가 경험한 프랑스 연구현장
프랑스의 이공계 명문 중 한 곳인 파리11대학은 이름이 무색하게도 파리 외곽으로 멀리 떨어진 작은 마을 오르세에 자리잡고 있다. 나는 3~4년 전 파리에 살며 이 대학 고체물리연구소로 출퇴근을 했는데, 시외로 나와서도 고속전철을 타고 30분은 더 가야 하는 제법 먼 거리였다. 차창 밖으로 시골 풍경을 감상하며 출근길의 지루함을 덜기도 했지만, 열차 안 승객들을 훔쳐보다 보면 날마다 기분 좋은 ‘문화 충격’을 경험하곤 했다.
아침에 전철이 시내를 빠져나와 외곽으로 들어서면 열차에 남은 승객들은 오르세 주변 학교와 연구소로 향하는 학생, 교수, 연구원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열차 안 분위기도 사뭇 학구적이다. 한번은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와 마주 앉았는데, 그는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가죽가방 위에 종이뭉치를 꺼내 놓고는 뭔가를 열심히 쓰는 중이었다.
호기심에 슬쩍 엿봤더니 종이 위에 복잡한 수식이 가득했다. 마침 내 전공이 물리학인지라 수식들을 조금 알아볼 수 있었는데, 미시 세계를 다룰 때 사용하는 ‘양자역학 섭동이론’에 관한 것이었다. 연구중인 문제를 풀고자 애쓰는 건지 아니면 강의 준비를 하는 건지 괜히 궁금했지만, 할아버지는 내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빼곡히 수식을 전개하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또 한번은 건너편에 백발을 동여맨 할머니가 분자식이 가득 담긴 화학 논문을 읽고 있었다. 내 편견 어린 눈에는 뜨개질하는 모습이 더 어울릴 듯한 할머니였는데, 실제로는 펜으로 빨간 줄 치고 주석을 달아가며 논문을 수정하는 데 한창이었다.
할머니·할아버지 과학자들이 이렇게 출근길 자투리 시간부터 연구에 빠져 있다. 그들에겐 열차 안이 벌써 연구소인가 보다. ‘저분들은 지난 수십년 동안 날마다 저렇게 하루의 과학을 시작했겠지’ 하는 생각이 들면, 정신을 차리고 나도 논문이라도 꺼내 펼쳐 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은퇴 뒤 직함뿐인 명예연구원 아니라
논문발표 등 현직 못잖게 왕성한 활동
학생·젊은 교수들과 함께 주제 토론
“머리 쓰는 게 예전 같지 않겠지만
내 손은 실험을 기억하고 있더라” 노과학자의 열정은 그대로 연구실로 이어진다. 고체물리연구소에서 내가 속해 있던 ‘새로운 전자상태’ 연구팀의 최연장자인 앙리 알룰 박사를 예로 들어 보자. 그는 이미 퇴직했고 나이는 일흔에 가깝지만, 여전히 날마다 사무실에 출근해 데이터를 살펴 분석하고, 논문을 쓰고, 토론에 참여한다. 연구실 책임자였던 그는 이제 퇴직하고서 행정 업무에서 벗어나니 연구에 더 집중할 수 있다며 좋아한다. 지금 연구실은 그의 제자인 오십대의 필리프 멘델 교수를 중심으로 삼사십대 젊은 교수급 연구자 셋이 함께 꾸려가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알룰 박사와 따로 이야기를 나눠봤다. 현재 알룰 박사의 직함은 ‘명예연구원’. 이게 이름만 그럴듯하게 걸어 놓는 자리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는 5년마다 엄격한 평가에 따라 연구활동 지원 여부가 결정된다고 한다. 알룰 박사는 퇴직 뒤 5년 동안 스무 편 남짓한 논문을 이름난 국제학술지에 발표했다고 하니, 여느 현직 못잖게 활발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활동 내용을 들여다보면 더 놀랍다. “그 스무 편 남짓한 논문 중에 연구실 후임과 함께 쓴 건 총설 논문 한 편뿐이야.” 그는 퇴직 전까지 길게는 수십년 함께 연구했던 연구실 동료 후임들과는 연구논문을 더 쓰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에는 후임들이 얻은 연구 결과에 이름만 올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뜻도 담겨 있다. 그 대신에 다른 외부 연구자들과 공동 작업을 통해 연구활동을 계속하고 있단다. 실제로 그는 퇴직 후에 자신의 기존 전공 분야를 넘어 새로운 실험방법까지 배워가며 연구의 폭을 넓혀가고 있으니 후학들에겐 큰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막상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부분은 다른 데 있다. “연구실 후임들과 함께 더 논문을 쓰지 않는 건, 그 친구들이 내 영향력 바깥에서 연구하면서 내 이름이 함께 오르지 않는 논문을 발표해야만 학계에서 독립적으로 성장하고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야.” 연구실 후임들과 함께 일하면 편하게 업적을 늘려갈 수 있을 텐데, 그들의 앞길을 위해 미련없이 정도를 가는 모습에서 어진 스승의 마음뿐 아니라 학자로서의 자신감도 볼 수 있었다. 함께 논문을 쓰지는 않지만, 각자 새로운 논문을 준비할 때마다 서로 의견을 구하고 조언하는 데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대학원생들의 막무가내 질문에 막힘없이 답하는 만물박사 구실도 한다. 그래서 여전히 연구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퇴직 뒤에도 연구현장을 떠나지 않는 노과학자들이 프랑스만의 모습일까? 몇 해 전 나는 한 국제학회에서 미국 듀크대학의 호스트 마이어 교수와 인사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내 박사학위 지도교수의 지도교수의 지도교수의 지도교수였다. 우리는 무려 다섯 세대를 가로지른 사제간 만남에 함께 놀라며 반가워했다. 그는 첫 연구논문을 1951년에 출간한 이래 지난해에도 논문을 발표했으니, 자그마치 육십년 넘는 연구경력을 지닌 셈이다. 미국 대학에서는 활발하게 연구활동을 계속하는 한 은퇴는 없도록 사무실과 실험실을 제공하는 제도의 뒷받침이 있다고 한다. 일본의 원로 물리학자인 야스오카 히로시 박사는 도쿄대학에서 퇴임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방문연구원으로서 연구활동을 계속하는 열정을 보이고 있다. 그는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얼마 전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제1 저자로 논문을 발표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지인을 통해 들으니 “(두 손을 내밀어 보이며) 내가 머리 쓰는 게 예전 같지 않겠지. 그런데 말이야, 내 손은 실험하는 걸 기억하고 있더라고” 하며 노익장을 과시한단다. 프랑스 연구소에선 머리가 하얗게 센 연구자가 커다란 액체질소 통을 낑낑대며 끌고 실험실을 오가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백발의 과학자가 열정적인 눈빛으로 손수 실험하는 모습을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외국 실험실 현장에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한국 현실에선 여러모로 어려운 게 사실이다. 앞서 소개한 노학자들의 관성에 가까운 열정은 오랜 시간 전통으로 녹아든 과학 문화의 뒷받침을 받는 듯하고 그 열정의 실현은 잘 구축된 제도 덕을 보는 것 같다. 문화를 바꾸는 건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도의 뒷받침은 조금 신경 쓰면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도 세대간 단절 없이 지식과 지혜가 삼대에 걸쳐 공유되는 연구실 풍경이 나타나길 꿈꿔 본다. 정민기 프랑스 국립고자기장연구소 연구원(양자물성)
※사이언스온 연재물 ‘청춘스케치’에 썼던 글을 필자가 더 취재하고 다듬어 다시 쓴 것입니다.
알룰 박사의 제자이자 현재 연구실 책임자인 멘델 교수가 초전도자석에 액체 헬륨을 충전하는 모습. 나이는 오십대 중반이고 행정 업무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틈나는 대로 실험실에 들러 손을 보태려 한다. 장크리스토프 오랭 제공
논문발표 등 현직 못잖게 왕성한 활동
학생·젊은 교수들과 함께 주제 토론
“머리 쓰는 게 예전 같지 않겠지만
내 손은 실험을 기억하고 있더라” 노과학자의 열정은 그대로 연구실로 이어진다. 고체물리연구소에서 내가 속해 있던 ‘새로운 전자상태’ 연구팀의 최연장자인 앙리 알룰 박사를 예로 들어 보자. 그는 이미 퇴직했고 나이는 일흔에 가깝지만, 여전히 날마다 사무실에 출근해 데이터를 살펴 분석하고, 논문을 쓰고, 토론에 참여한다. 연구실 책임자였던 그는 이제 퇴직하고서 행정 업무에서 벗어나니 연구에 더 집중할 수 있다며 좋아한다. 지금 연구실은 그의 제자인 오십대의 필리프 멘델 교수를 중심으로 삼사십대 젊은 교수급 연구자 셋이 함께 꾸려가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알룰 박사와 따로 이야기를 나눠봤다. 현재 알룰 박사의 직함은 ‘명예연구원’. 이게 이름만 그럴듯하게 걸어 놓는 자리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는 5년마다 엄격한 평가에 따라 연구활동 지원 여부가 결정된다고 한다. 알룰 박사는 퇴직 뒤 5년 동안 스무 편 남짓한 논문을 이름난 국제학술지에 발표했다고 하니, 여느 현직 못잖게 활발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활동 내용을 들여다보면 더 놀랍다. “그 스무 편 남짓한 논문 중에 연구실 후임과 함께 쓴 건 총설 논문 한 편뿐이야.” 그는 퇴직 전까지 길게는 수십년 함께 연구했던 연구실 동료 후임들과는 연구논문을 더 쓰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에는 후임들이 얻은 연구 결과에 이름만 올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뜻도 담겨 있다. 그 대신에 다른 외부 연구자들과 공동 작업을 통해 연구활동을 계속하고 있단다. 실제로 그는 퇴직 후에 자신의 기존 전공 분야를 넘어 새로운 실험방법까지 배워가며 연구의 폭을 넓혀가고 있으니 후학들에겐 큰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막상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부분은 다른 데 있다. “연구실 후임들과 함께 더 논문을 쓰지 않는 건, 그 친구들이 내 영향력 바깥에서 연구하면서 내 이름이 함께 오르지 않는 논문을 발표해야만 학계에서 독립적으로 성장하고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야.” 연구실 후임들과 함께 일하면 편하게 업적을 늘려갈 수 있을 텐데, 그들의 앞길을 위해 미련없이 정도를 가는 모습에서 어진 스승의 마음뿐 아니라 학자로서의 자신감도 볼 수 있었다. 함께 논문을 쓰지는 않지만, 각자 새로운 논문을 준비할 때마다 서로 의견을 구하고 조언하는 데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대학원생들의 막무가내 질문에 막힘없이 답하는 만물박사 구실도 한다. 그래서 여전히 연구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퇴직 뒤에도 연구현장을 떠나지 않는 노과학자들이 프랑스만의 모습일까? 몇 해 전 나는 한 국제학회에서 미국 듀크대학의 호스트 마이어 교수와 인사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내 박사학위 지도교수의 지도교수의 지도교수의 지도교수였다. 우리는 무려 다섯 세대를 가로지른 사제간 만남에 함께 놀라며 반가워했다. 그는 첫 연구논문을 1951년에 출간한 이래 지난해에도 논문을 발표했으니, 자그마치 육십년 넘는 연구경력을 지닌 셈이다. 미국 대학에서는 활발하게 연구활동을 계속하는 한 은퇴는 없도록 사무실과 실험실을 제공하는 제도의 뒷받침이 있다고 한다. 일본의 원로 물리학자인 야스오카 히로시 박사는 도쿄대학에서 퇴임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방문연구원으로서 연구활동을 계속하는 열정을 보이고 있다. 그는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얼마 전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제1 저자로 논문을 발표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지인을 통해 들으니 “(두 손을 내밀어 보이며) 내가 머리 쓰는 게 예전 같지 않겠지. 그런데 말이야, 내 손은 실험하는 걸 기억하고 있더라고” 하며 노익장을 과시한단다. 프랑스 연구소에선 머리가 하얗게 센 연구자가 커다란 액체질소 통을 낑낑대며 끌고 실험실을 오가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백발의 과학자가 열정적인 눈빛으로 손수 실험하는 모습을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외국 실험실 현장에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한국 현실에선 여러모로 어려운 게 사실이다. 앞서 소개한 노학자들의 관성에 가까운 열정은 오랜 시간 전통으로 녹아든 과학 문화의 뒷받침을 받는 듯하고 그 열정의 실현은 잘 구축된 제도 덕을 보는 것 같다. 문화를 바꾸는 건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도의 뒷받침은 조금 신경 쓰면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도 세대간 단절 없이 지식과 지혜가 삼대에 걸쳐 공유되는 연구실 풍경이 나타나길 꿈꿔 본다. 정민기 프랑스 국립고자기장연구소 연구원(양자물성)
※사이언스온 연재물 ‘청춘스케치’에 썼던 글을 필자가 더 취재하고 다듬어 다시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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