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는 유전자의 작용으로 생긴 옥수수 알맹이 색깔의 변화. 자가수분하는 옥수수에서 다양한 색깔의 알맹이가 나타나는 현상에 주목한 유전학자 바버라 매클린톡이 1950년대 뛰는 유전자를 처음 발견됐다. 네이처 제공
[사이언스 온] DNA 암흑에 숨은 ‘뛰는 유전자’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무더위가 지난 요즘은 하늘이 좀 더 맑아졌는지 별들이 꽤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밤하늘의 어디를 바라보건 우리 눈에 더 많이 보이는 것은 작은 별빛의 배경이 되는 ‘암흑’이다. 2000년 인간 디엔에이(DNA) 전체를 들여다본 유전학자들은 마치 밤하늘의 암흑과 같은 디엔에이의 거대한 암흑을 발견했다. 인간 유전체(게놈) 지도의 초안을 완성하고 보니 인간 디엔에이 중에서 기능을 지닌 유전자의 비중은 고작 1.5%에 불과했던 것이다. 비유하면, 유전학자들이 디엔에이 지도에서 유전자를 찾는 일이란 마치 천문학자들이 어둠으로 가득 찬 우주 공간에서 별을 찾는 것과 비슷한 일인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대체 유전자 주위를 온통 차지하고 있는 저 거대한 암흑은 무엇일까? 어떤 과학자들은 그 암흑 디엔에이 영역을 골치 아픈 ‘쓰레기’라고 불렀고 또 어떤 이들은 거기에 진화의 단서가 있다며 ‘진화의 보고’라고 주장했다.
위험한 악성코드 ‘뛰는 유전자’
사람의 경우에, 30억쌍의 염기서열로 이뤄진 디엔에이의 절반가량은 ‘트랜스포존’이라 불리는 ‘뛰는 유전자’(점핑 유전자)가 어둡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뛰는 유전자는 우리 디엔에이에 잠입한 ‘악성코드’ 같은 존재로도 비유된다. 이들은 세포나 개체에 도움을 주는 기능을 거의 하지 않으면서, 자기 사본을 만들어 디엔에이 곳곳을 뛰어다니며 자기와 똑같은 악성코드를 심는다고 알려졌다. 지난 수억년 동안 이런 악성코드가 끊임없이 증식한 결과물이 바로 생물체 디엔에이의 거대한 암흑을 이루고 있다. 악성코드에 비유했지만, 이런 복제 방식은 사실 바이러스가 생명체에 침입해 증식하는 방식 중 하나이다. 이 사실을 토대로 많은 과학자들은 뛰는 유전자가 바이러스를 통해 몸으로 유입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의 존재는 1951년 미국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의 바버라 매클린톡에 의해 처음 알려졌고, 이 여성 과학자는 198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에서 악성코드가 통제되지 않은 채 멋대로 퍼져나가듯이, 뛰는 유전자도 다른 유전자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을 증폭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생물체의 유전자 입장에서 보면, 뛰는 유전자는 ‘이기적 유전자’ 자체다. 뛰는 유전자는 자신의 유전 정보를 충실히 복제하는 과정에서 무심코 중요한 기능을 하는 유전자 속으로 뛰어들기도 한다. 그러면 정상 기능을 하던 유전자는 본래 기능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실제로 최근 몇 가지 면역질환과 근육위축증, 특정 암이 뛰는 유전자가 정상 유전자 속에 끼어들어 일으킨 문제임이 밝혀졌다.
생체기능 없이 DNA 절반 차지
사본 만들어 쉼없는 자기증식
정상 유전자에 간혹 해 끼쳐
‘꼬마 RNA’가 탐지해 억제시켜
묶어놓기만 하고 없애진 않아 신경 다양성 높일 가능성 등
다른 유전자와 오래 공존해온
‘숨은 쓸모’에 대한 연구 진전 하지만 뛰는 유전자들이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채우도록 방임하기에는 우리 유전자가 감당해야 할 위험 부담이 너무나 크다. 그래서 생물의 유전체는 뛰는 유전자를 막아낼 방어망을 구축해야 했다. 악성코드에 맞서 우리 세포를 보호할 ‘백신’ 말이다. 이런 백신 시스템이 잘 갖춰져 현재 인간 디엔에이에선 뛰는 유전자의 활성이 극도로 억제돼 있다. 악성코드 잡는 ‘파이 RNA’ 악성코드에 대처하려면? 먼저 악성코드를 탐지해야 한다. 우리 세포는 거대한 디엔에이의 암흑세계에서 어떻게 뛰는 유전자들을 검출할 수 있을까? 2012년 미국 크레이그 멜로 연구팀과 영국 에릭 미스카 연구팀이 과학저널 <셀>에 예쁜꼬마선충에서 뛰는 유전자를 탐지하는 과정을 밝힌 논문을 동시 발표했다. 다른 생물처럼 실험용 벌레인 예쁜꼬마선충의 생식세포도 자신의 유전자를 온전히 다음 세대로 전달하기 위해 유전자 침입을 강력히 억제하고 있다. 두 논문에 따르면, 예쁜꼬마선충은 일부러 집어넣은 디엔에이에서 자신에게 본래 존재하지 않는 염기서열을 인지하는 탐지 체제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그 탐지기는 꼬마 아르엔에이(마이크로 RNA)의 일종인 ‘파이 아르엔에이’였다. 꼬마 아르엔에이는 단백질을 만드는 일을 하지는 않지만 단백질 만드는 유전자가 작동하는 데 관여해 갖가지 기능을 하는 아주 작은 아르엔에이인데, 근래 들어 의학과 생물학 연구 분야에서 크게 주목받는 생화학 분자다. 그 한 종류가 뛰는 유전자를 탐지하는 기능을 한다는 얘기다. 모든 유전자는 자신만의 고유한 염기서열로 이뤄진 일종의 ‘바코드’를 갖고 있다. 파이 아르엔에이는 외부에서 침입한 디엔에이를 인식하는 일종의 ‘바코드 판독기’이다. 파이 아르엔에이가 침입자의 바코드를 확인하면 세포는 단백질 기구들을 동원해 그 침입자를 억제한다. 멜로 연구팀의 실험에서 흥미롭게도 파이 아르엔에이가 뛰는 유전자도 외부 침입자로 취급한다는 게 밝혀졌다. 이는 세포가 뛰는 유전자를 ‘내 안의 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제 파이 아르엔에이에 감지된 뛰는 유전자한테는 침입자를 식별하는 낙인이 찍힌다. 낙인이 찍힌 디엔에이는 위험 악성코드로 분류되어 꼼짝할 수 없게 단백질(히스톤)로 꽁꽁 싸매지게 된다. 쓰레기 DNA의 ‘쓸모’ 컴퓨터 백신 프로그램이라면, 이런 악성코드를 탐지하면서 제거하는 기능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왜 세포는 악성코드 같은 뛰는 유전자를 제거하지 않고 꽁꽁 싸매두기만 한 걸까? 혹시 뛰는 유전자에 어떤 ‘쓸모’가 있는 것은 아닐까? 뛰는 유전자가 작동하면 정상 기능의 다른 유전자 하나를 망가뜨리는 것 이상의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여러 연구결과가 있다. 예컨대, 뛰는 유전자가 ‘점핑’하면서 근처 유전자도 함께 데려가 새로운 형태의 유전자를 만들기도 한다. 또 뛰는 유전자가 몰려 있는 디엔에이 영역은 생식 단계에서 서로 다른 염색체간의 교차가 일어날 확률이 높다고 한다. 뛰는 유전자의 매개로 일어나는 이런 돌연변이들은 대부분 생물 개체에 나쁜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극히 낮은 확률이겠지만 우연히 환경에 더 적합한 돌연변이가 만들어진다면, 개체는 환경에 적응해 빠른 속도로 퍼지게 될 것이다. 우연한 돌연변이가 만들어내는 이런 다양성은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어쩌면 뛰는 유전자가 만들어낸 변화는 수많은 자연의 풍파 속에서 종종 생물체의 버팀목이 되어 준 건 아닐까? 유전체 지도가 완성되고 ‘쓰레기’라는 오명을 쓴 뛰는 유전자들에 다양한 쓸모가 있음이 드러나고 있지만 아직 그 오명이 다 벗겨진 것은 아니다. 중생대 백악기 후기(약 8000만년 전)에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실러캔스’라는 물고기가 1938년 남아프리카 주변에서 발견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물고기에 있는 뛰는 유전자 일부가 현존하는 수많은 다른 물고기에도 잘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이 2006년 일본 연구팀에 의해 밝혀졌다. 즉, 이 뛰는 유전자는 지난 8000만년 동안 생존해온 것이다. 뛰는 유전자가 정말 쓰레기에 불과하다면 자연의 정교한 수선공인 ‘자연선택’이 이들을 생명체 디엔에이 안에 남겨뒀을 리가 없다. 최근 들어 뛰는 유전자의 ‘쓸모’에 대한 몇 가지 보고들이 나오고 있다. 인간 배아 발생 과정에서 뛰는 유전자의 활성이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에서 특이적으로 증가한다고 한다. 이런 작용은 신경의 다양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또한 어떤 뛰는 유전자는 자신한테서 수십만 염기서열이나 멀리 떨어진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역할도 한다. 뛰는 유전자들엔 우리가 아직 찾지 못한 쓸모가 더 있지 않을까? 우주의 암혹에 대해서도, 디엔에이의 암흑에 대해서도 아직은 우리가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김천아 서울대 생명과학부 박사과정 ※ 사이언스온 연재 ‘논문 읽어주는 엘레강스 펜클럽’에 실린 글을 필자가 다시 구성하고 다듬어 쓴 글입니다.
사본 만들어 쉼없는 자기증식
정상 유전자에 간혹 해 끼쳐
‘꼬마 RNA’가 탐지해 억제시켜
묶어놓기만 하고 없애진 않아 신경 다양성 높일 가능성 등
다른 유전자와 오래 공존해온
‘숨은 쓸모’에 대한 연구 진전 하지만 뛰는 유전자들이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채우도록 방임하기에는 우리 유전자가 감당해야 할 위험 부담이 너무나 크다. 그래서 생물의 유전체는 뛰는 유전자를 막아낼 방어망을 구축해야 했다. 악성코드에 맞서 우리 세포를 보호할 ‘백신’ 말이다. 이런 백신 시스템이 잘 갖춰져 현재 인간 디엔에이에선 뛰는 유전자의 활성이 극도로 억제돼 있다. 악성코드 잡는 ‘파이 RNA’ 악성코드에 대처하려면? 먼저 악성코드를 탐지해야 한다. 우리 세포는 거대한 디엔에이의 암흑세계에서 어떻게 뛰는 유전자들을 검출할 수 있을까? 2012년 미국 크레이그 멜로 연구팀과 영국 에릭 미스카 연구팀이 과학저널 <셀>에 예쁜꼬마선충에서 뛰는 유전자를 탐지하는 과정을 밝힌 논문을 동시 발표했다. 다른 생물처럼 실험용 벌레인 예쁜꼬마선충의 생식세포도 자신의 유전자를 온전히 다음 세대로 전달하기 위해 유전자 침입을 강력히 억제하고 있다. 두 논문에 따르면, 예쁜꼬마선충은 일부러 집어넣은 디엔에이에서 자신에게 본래 존재하지 않는 염기서열을 인지하는 탐지 체제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그 탐지기는 꼬마 아르엔에이(마이크로 RNA)의 일종인 ‘파이 아르엔에이’였다. 꼬마 아르엔에이는 단백질을 만드는 일을 하지는 않지만 단백질 만드는 유전자가 작동하는 데 관여해 갖가지 기능을 하는 아주 작은 아르엔에이인데, 근래 들어 의학과 생물학 연구 분야에서 크게 주목받는 생화학 분자다. 그 한 종류가 뛰는 유전자를 탐지하는 기능을 한다는 얘기다. 모든 유전자는 자신만의 고유한 염기서열로 이뤄진 일종의 ‘바코드’를 갖고 있다. 파이 아르엔에이는 외부에서 침입한 디엔에이를 인식하는 일종의 ‘바코드 판독기’이다. 파이 아르엔에이가 침입자의 바코드를 확인하면 세포는 단백질 기구들을 동원해 그 침입자를 억제한다. 멜로 연구팀의 실험에서 흥미롭게도 파이 아르엔에이가 뛰는 유전자도 외부 침입자로 취급한다는 게 밝혀졌다. 이는 세포가 뛰는 유전자를 ‘내 안의 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제 파이 아르엔에이에 감지된 뛰는 유전자한테는 침입자를 식별하는 낙인이 찍힌다. 낙인이 찍힌 디엔에이는 위험 악성코드로 분류되어 꼼짝할 수 없게 단백질(히스톤)로 꽁꽁 싸매지게 된다. 쓰레기 DNA의 ‘쓸모’ 컴퓨터 백신 프로그램이라면, 이런 악성코드를 탐지하면서 제거하는 기능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왜 세포는 악성코드 같은 뛰는 유전자를 제거하지 않고 꽁꽁 싸매두기만 한 걸까? 혹시 뛰는 유전자에 어떤 ‘쓸모’가 있는 것은 아닐까? 뛰는 유전자가 작동하면 정상 기능의 다른 유전자 하나를 망가뜨리는 것 이상의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여러 연구결과가 있다. 예컨대, 뛰는 유전자가 ‘점핑’하면서 근처 유전자도 함께 데려가 새로운 형태의 유전자를 만들기도 한다. 또 뛰는 유전자가 몰려 있는 디엔에이 영역은 생식 단계에서 서로 다른 염색체간의 교차가 일어날 확률이 높다고 한다. 뛰는 유전자의 매개로 일어나는 이런 돌연변이들은 대부분 생물 개체에 나쁜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극히 낮은 확률이겠지만 우연히 환경에 더 적합한 돌연변이가 만들어진다면, 개체는 환경에 적응해 빠른 속도로 퍼지게 될 것이다. 우연한 돌연변이가 만들어내는 이런 다양성은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어쩌면 뛰는 유전자가 만들어낸 변화는 수많은 자연의 풍파 속에서 종종 생물체의 버팀목이 되어 준 건 아닐까? 유전체 지도가 완성되고 ‘쓰레기’라는 오명을 쓴 뛰는 유전자들에 다양한 쓸모가 있음이 드러나고 있지만 아직 그 오명이 다 벗겨진 것은 아니다. 중생대 백악기 후기(약 8000만년 전)에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실러캔스’라는 물고기가 1938년 남아프리카 주변에서 발견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물고기에 있는 뛰는 유전자 일부가 현존하는 수많은 다른 물고기에도 잘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이 2006년 일본 연구팀에 의해 밝혀졌다. 즉, 이 뛰는 유전자는 지난 8000만년 동안 생존해온 것이다. 뛰는 유전자가 정말 쓰레기에 불과하다면 자연의 정교한 수선공인 ‘자연선택’이 이들을 생명체 디엔에이 안에 남겨뒀을 리가 없다. 최근 들어 뛰는 유전자의 ‘쓸모’에 대한 몇 가지 보고들이 나오고 있다. 인간 배아 발생 과정에서 뛰는 유전자의 활성이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에서 특이적으로 증가한다고 한다. 이런 작용은 신경의 다양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또한 어떤 뛰는 유전자는 자신한테서 수십만 염기서열이나 멀리 떨어진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역할도 한다. 뛰는 유전자들엔 우리가 아직 찾지 못한 쓸모가 더 있지 않을까? 우주의 암혹에 대해서도, 디엔에이의 암흑에 대해서도 아직은 우리가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김천아 서울대 생명과학부 박사과정 ※ 사이언스온 연재 ‘논문 읽어주는 엘레강스 펜클럽’에 실린 글을 필자가 다시 구성하고 다듬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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