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미래&과학 과학

주체할 수 없는 그 감정…‘중2병’은 정말 병일까

등록 2013-10-08 19:01수정 2013-10-09 15:20

10대 초중반 사춘기의 소외감, 허세, 자기망상 등 심리상태를 낮잡아 부르는 말인 ‘중2병’을 유행시킨 계기인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10대 초중반 사춘기의 소외감, 허세, 자기망상 등 심리상태를 낮잡아 부르는 말인 ‘중2병’을 유행시킨 계기인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사이언스 온] 사춘기 뇌에선 무슨 일이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면 안 돼….’

거대 생체병기에 올라탄 열네살 소년이 되뇌는 말이다. 그의 이름은 이카리 신지,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신지가 작품에서 보여주는 행동과 대사는 언제부턴가 ‘중2병’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중2병이란 ‘사춘기 청소년이 흔히 겪는 심리적 상태, 즉 자신은 남과 다를 뿐 아니라 우월하다는 사고방식, 그리고 그에 바탕을 둔 행동’을 가리키는 속어다. 보통은 상대를 얕잡거나 비꼬아 이르는 말로 쓰인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생 또래가 중2병을 앓는 것이 정녕 문제가 될까? 10대 초중반에 겪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고려할 때 그것을 ‘질병’처럼 낮잡아 일러도 되는 걸까? 기초적 인지기능은 11~12살을 지나며 얼추 완성된다. 그렇다면 감정 조절이나 사회적 상호작용과 같은 기능은 어떨까? 앞서 말한 신지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거대한 로봇을 타고 정체불명의 적과 맞서 싸우려면 두려움을 조절해야 하고, 낯선 환경에서 남들과 지내려면 좋은 사회적 관계를 맺는 능력도 필수적이다. 이런 능력도 인지기능처럼 빠르게 발달할까?

뜨거운 신경경로, 차가운 신경경로

이에 관한 행동 실험이 하나 있다. 2011년 캐나다 토론토대학 연구팀은 8~15살 피험자 102명을 나이에 따라 네 그룹으로 나누어, 순수하게 인지기능만을 평가하는 ‘차가운’ 과제와 감정 조절·활용을 평가하는 ‘뜨거운’ 과제를 각각 내주고 그 성취도를 비교했다. 숫자 거꾸로 세기와 같은 ‘차가운 과제’의 정확도와 반응속도는 가장 어린 그룹(8~9살)에서 다음으로 어린 그룹(10~11살)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가장 큰 폭으로 향상되었다.

반면에, 작지만 꾸준한 보상을 주는 카드 패와 큰 보상 혹은 큰 손실을 주는 카드 패를 주고서 카드를 고르게 하는 ‘뜨거운’ 과제에선 14~15살의 그룹만이 ‘감’을 제대로 활용해 높은 점수를 얻었다. 그러니 ‘감’, 즉 느낌을 적절히 사용하는 능력은 나이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우리 뇌의 신경경로에서도 ‘뜨거운’ 경로와 ‘차가운’ 경로를 구분하곤 한다. 대체로 뜨거운 경로란 주로 감정을 담당하는 대뇌 변연계 부위를 가리키며, 차가운 경로는 높은 수준의 인지기능을 담당하는 전전두엽 부위를 가리킨다.

이제 뜨거운 경로와 차가운 경로를 비교하는 연구를 살펴보자. 2011년 미국 예일대학 연구팀은 어린이와 어른 그룹을 대상으로, 뇌 영상을 촬영하는 자기공명영상(fMRI) 장치 안에서 점수를 따는 게임을 하도록 했다. 사실 게임은 두 번째 단계에선 무조건 점수를 크게 잃도록 설계돼 있었다.

10대 불안한 심리를 일컬어
‘중2병’이라 부르지만
그 시기는 감정 과잉을 거쳐
감정 조절과 배려심을 배우는
자연스런 뇌발달 과정이다

오히려 쉴새 없는 학습으로
‘차가운 인지’만 강요하는
사회 현실이 더 문제 아닐까

이때 피험자의 감정은 크게 동요하게 마련인데, 변연계에 있는 편도체(두려움·분노 등을 담당하는 뇌 부위)의 활성화 정도를 측정해 보니 어린이에 비해 어른의 편도체 활성화가 훨씬 덜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와 인지기능을 담당하는 전전두엽 피질 사이의 연결은 어른한테서 훨씬 더 튼튼한 것으로 관찰됐다. 즉 ‘차가운’ 인지기능 영역이 ‘뜨거운’ 감정 영역을 원활히 조절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이다.

뜨거운 뇌 영역과 차가운 뇌 영역은, 10대 초반에 시작해 사춘기를 거쳐 2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연결을 꾸준히 만들어가며 비로소 ‘어른의 뇌’로 성숙해 간다.

감정과 자의식 그리고 관계의 ‘과잉’

이른바 중2병의 특징 중 하나로 꼽히는 감정 과잉은 이런 발달의 과정에 나타나는 산물로 이해할 수 있다. 2008년 코넬대학 의대 연구팀은 어린이, 청소년, 어른 그룹을 대상으로 이와 관련된 자기공명영상 실험을 했다. 행복하거나 겁에 질린 얼굴 모습이 화면에 나타날 땐 버튼을 누르고, 무표정한 얼굴이 나타날 땐 버튼을 누르지 않도록 하라는 과제였다. 이 실험에서 청소년의 반응 속도는 가장 늦었지만, 세 그룹을 통틀어 가장 큰 폭으로 편도체 부위가 활성화했다.

즉 비슷한 감정을 일으키는 자극이라 해도 청소년이 훨씬 큰 영향을 받아 더 큰 반응을 보였다. 반면 의식적으로 행동을 제어하며 감정을 조절하는 전전두엽의 영향력은 비교적 약한 것으로 관찰됐다. 낙엽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고 운다는 게 빈말은 아닌 듯하다.

자의식은 또 어떨까? 2013년 미국 오리건대학 연구팀은 10살 어린이들한테 자신의 사회적 자아를 스스로 평가해보도록 한 뒤 3년이 지나서 같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다시 같은 평가를 했다. 이 결과에서, 자신의 자아를 평가하는 데 관여하는 전전두피질 영역이 이전보다 더 활성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사실은 자의식, 즉 자신을 돌아보고 상대에 비추어 생각하는 능력이 그만큼 커졌음을 뜻한다. 때로 과다하게 느껴지는 청소년의 자의식은 뇌가 발달하며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다.

사회관계를 맺는 능력도 이 시기에 크게 발달한다. 이 때문에, 감정 과잉이나 자의식 과잉 못잖게 청소년은 ‘관계 과잉’을 보여준다. 함께하는 또래 집단에서 거절당하는 것은 처음 만난 세상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사회적 거절’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실험 디자인에 ‘사이버볼’이라는 것이 있다. 온라인에서 공놀이를 하는데 어느 순간 ‘나’(피험자)만 따돌림을 당하게 되는 방식이다. 2011년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 런던 연구팀이 청소년과 어른 그룹에 각각 사이버볼을 실행했을 때, 어른은 사회적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뇌 영역이 크게 활성화했으나 청소년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청소년이 사회적 거절 때 받는 정신적 타격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려준다.

차가운 인지만 강조하는 한국사회

인지 발달의 수준만 고려하면 청소년은 분명 독립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격체다. 하지만 행복한 삶에는 그 이상의 능력이 필요하다. 울컥 치미는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하고,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의 마음을 느끼고 답할 줄 알아야 한다. 위의 연구들을 통해 볼 때, 이는 청소년에서 어른에 이르는 ‘과잉’의 시간을 몸소 살아내야 얻어지는 값진 능력이다.

한국 사회의 청소년에겐 그 시간이 참 잔혹하다. 입시는 초등학교 때 시작한다. 10살을 갓 넘긴 어린이들은 뛰노는 대신 선행학습을 위해 학원으로 내몰린다. 고등학생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학원에서 학습과 문제풀이에 여념이 없이 산다. 연중무휴로 불이 꺼지지 않는 학교는 닭장처럼 답답하다. 탈출구나 다름없다는 게임마저 셧다운제를 도입해 꺼버린다. 그들 각자가 엄청난 책임과 부담을 짊어진 채 끝없이 싸워야 하는 ‘또 다른 신지들’이다.

삶에서 한번 찾아오는 중요한 시간, 어쩌면 일생의 행복을 결정할지도 모르는 그 시간을 오직 ‘차가운’ 인지기능을 단련하는 데 쏟아붓도록 몰고 가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감정을 느끼고 판단하는 힘,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힘이 길러지는 소중한 시기를 그렇게 보내버리게 하는 게 정말 괜찮은 일일까? 사회를 이끌어갈 미래의 어른들이 그 시기를 ‘어떻게’ 살아가도록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김서경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섐페인)

인지신경과학 박사과정

※사이언스온에 실린 글을 필자가 다시 구성하고 다듬었습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미래&과학 많이 보는 기사

과학자들은 외계인의 존재를 얼마나 믿을까? 1.

과학자들은 외계인의 존재를 얼마나 믿을까?

영양 가득 ‘이븐’하게…과학이 찾아낸 제4의 ‘달걀 삶는 법’ 2.

영양 가득 ‘이븐’하게…과학이 찾아낸 제4의 ‘달걀 삶는 법’

온 우주 102개 색깔로 ‘3차원 지도’ 만든다…외계생명체 규명 기대 3.

온 우주 102개 색깔로 ‘3차원 지도’ 만든다…외계생명체 규명 기대

2032년 소행성 충돌 위험 2.2%로 상승…지구 방위 논의 시작되나 4.

2032년 소행성 충돌 위험 2.2%로 상승…지구 방위 논의 시작되나

시금치·양파·고추…흰머리 덜 나게 해주는 루테올린의 발견 5.

시금치·양파·고추…흰머리 덜 나게 해주는 루테올린의 발견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