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삶의 균형을 생각하게 해준 딸아이 재인이와 함께. 신동화 제공
[사이언스 온] 살며 연구하며
머나먼 이탈리아에 와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지내며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 중 하나는 여기 관공서나 상점의 짧은 근무시간이었다. 관공서는 1주일 중 2~3일 동안 오전에만 여는 곳이 많고, 상점은 점심시간에 두세 시간 문을 닫는 곳도 많다. 자기 가게를 운영하는 경우에도 몇 시간씩 자리를 비우고 식사를 하는 것이 내 눈에는 너무 한가해 보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그들 눈에는 오히려 내가 신기하게 보인다는 점을 깨달았다. 금요일에 얘기한 일을 주말 동안 처리해 월요일에 그 결과물을 가져다준다거나 식사 자리에서도 논문 이야기를 꺼내는 나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사실 내가 특별히 부지런한 사람이거나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사람도 아니니, 우리나라에서 교육받고 일하는 많은 사람이 대체로 이렇게 비친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일과 삶의 균형’에 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찾아왔다. 지난 6월 딸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딸아이는 예정일보다 약 일주일 먼저 태어났다. 본래 예정으로는 연구실에서 2주 동안 휴가를 받고 귀국해 아내가 산후조리원에 있는 사이에 집도 이사해두고서 이탈리아로 돌아올 계획이었는데, 아이가 일찍 태어난데다 집 계약 문제로 거의 한달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지도교수와 면담이 있던 날, 한달이나 되는 휴가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물쭈물하던 끝에 아내의 출산 예정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 지도교수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가족이야말로 진짜 일(real business)이다. 연구는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가족에 비하면 반쯤 취미(half hobby)라고도 할 수 있다. 기간이나 일은 신경쓰지 말고 필요한 만큼 다녀와도 좋다.”
내가 연구원으로 있는 ‘폴리테크니코 디 토리노’(토리노공대)는 이탈리아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연구기관이고 이곳 교수들은 바쁘게 살아간다. 우리보다 먼저 산업화했고 우리가 지금 겪는 문제들을 먼저 겪었을 나라에서 바쁜 시절을 살아온 교수의 입에서 나온 ‘가족에 비하면 네가 하는 일은 반쯤 취미다’라는 말이 가벼이 들리지 않는 까닭이다.
딸아이가 태어나던 날, 이탈리아를 떠나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있는 병원에 도착해 아이를 처음 보고 든 생각은 이 조그만 아이가 얼마나 힘들게 세상에 나왔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정말 많은 일을 혼자 감내했던 아내의 고생도 이루 말할 수 없다. 꿈을 좇아, 좋아하는 일을 좇아 지구 반 바퀴 돌아 떠나온 내가 일과 삶의 균형이나 가족의 소중함을 말할 처지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일도 삶도 가족도 모두 소중하다는 것을 내가 가슴 깊이 느꼈다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예쁜 딸을 낳아준 아내와 마침내 아빠를 만난 딸아이 재인이한테 전해주고 싶다.
신동화 이탈리아 토리노공대 연구원(컴퓨터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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