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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과학

대표성 흠집난 잡초, 생명의 다양성 가르치다

등록 2013-12-03 19:59

식물의 생명현상을 연구하는 기초과학 분야의 생명과학자 대다수는 생장이 빠르고 구조가 비교적 단순한 쌍떡잎식물 ‘애기장대’를 모델식물로 삼아 식물을 연구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식물의 생명현상을 연구하는 기초과학 분야의 생명과학자 대다수는 생장이 빠르고 구조가 비교적 단순한 쌍떡잎식물 ‘애기장대’를 모델식물로 삼아 식물을 연구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사이언스 온] ‘모델식물’ 애기장대를 위한 변론
사람들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내 직업을 식물학 연구자로 소개할 때마다 나는 그 순간이 참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다. 다음에 이어질, 몇 년 동안 고민했지만 여전히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무슨 식물을 연구하세요?”

사실, 나는 대다수 사람들은 그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을, 이른바 ‘잡초’를 키우고 있다. 하필 잡초를 연구 대상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더욱 난감해진다. 내가 유별난 주제를 연구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농학자나 원예학자 등을 제외하고, 현재 기초과학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식물생명과학자들의 대다수도 바로 이 잡초의 생명 현상을 연구하고 있다.

물론 식물생명과학자 대부분은 지상에 녹색의 생명을 불어넣는 풀과 나무 그 자체를 매우 좋아하며, 식물의 생명 현상에 큰 관심을 두고 연구를 시작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처럼 분자 수준에서 식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델생물’ 이외에 다른 식물을 연구할 기회는 매우 드물다.

자연의 길잡이 ‘모델생물’, 애기장대의 등장

‘모델생물’이란 긴 시간에 걸쳐 다수 연구자들에 의해 널리 연구된 생물종을 총칭하는 용어다. 우리가 생명과학에 대해 생각할 때 흔히 연상하는 쥐, 초파리, 효모, 대장균 등이 모델생물의 예이다. 유전 법칙을 발견한 그레고어 멘델(1822~1884)이 모델생물로 선택한 완두콩이 아마 식물학계의 모델생물 중에서는 가장 대중적인 사례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연구자들은 자신이 풀고자 하는 문제에 가장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는 생명체를 모델생물로 선정하곤 한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생물이 있지만, 이 모든 생물에 적합한 실험 방법이 모두 고안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델생물은 일반적으로 다른 생물들에 비해 그 구조가 간단하며, 사육과 재배가 쉽고, 다양한 실험이 가능하다는 특징을 갖추고 있다.

물론 필요한 경우에는 연구하고자 하는 특정 생물체에 최적화한 실험 기법을 개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개발된 실험 방법을 다른 실험실에서 재현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기 때문에, 대부분 연구자들은 선행 연구를 통해 다양한 실험 기법이 고안된 모델생물을 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현재 식물생명과학을 연구하는 나와 동료들이 사용하는 모델생물은 무엇일까? 앞에서 ‘잡초’로 소개한 식물의 이름은 바로 ‘애기장대’(Arabidopsis thaliana)로, 배추·무와 함께 십자화과에 속하는 쌍떡잎식물이다. 다 자란 성체의 폭이 5㎝, 키가 60㎝밖에 되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엄연히 우리나라 땅에서도 자생하는 식물이다. 생장 주기가 4~6주로 매우 짧아 빠른 속도로 연구를 수행할 수 있으며, 자화 수분(제꽃가루받이)이 가능해 곤충 같은 수분 매개자 없이도 온실에서 키울 수 있다.

전통적으로 식물생명과학에서는 식량 생산량의 증대와 병충해의 예방 같은 농학의 주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벼, 옥수수, 밀 같은 주요 식량작물을 비롯해, 담배나 토마토 같은 특용작물을 대상으로 다양한 연구가 이뤄졌다. 그러나 이런 연구 경향은 1990년대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인간 유전체 해독 프로젝트(HGP)가 시작되면서, 식물 유전체 해독 프로젝트의 대상이 될 첫 번째 후보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루어졌고, 그 결과로 염색체가 다섯 쌍뿐이어서 유전체 분석이 손쉬운 애기장대가 최종 선정됐다. 2000년 12월 애기장대의 유전체 해독이 완전히 끝났고,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본격적인 애기장대 식물학의 시대가 열렸다.

아래는 국내 대학의 식물생장실에서 재배중인 애기장대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아래는 국내 대학의 식물생장실에서 재배중인 애기장대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무수한 종들의 복잡한 생명현상
모델생물 통해 실체 들여다본다
식물에선 애기장대를 주로 쓴다
그런데 굳게 믿었던 대표성에
의문 던지는 연구 결과 나왔다

자연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생명현상들이 무궁무진하다
이것이 우리가 자연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과연 모델식물은 모든 식물을 대표할까

하지만 이런 애기장대 중심의 연구 경향이 식물의 다양한 생명 현상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제시됐다. 영국 리즈대학의 브렌던 데이비스 연구팀은 최근 발표한 논문에서 ‘난센스 전사체 분해’라는 현상에 관여하는 주요 유전자인 에스엠지1(SMG1)이 다양한 식물종의 유전체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얼핏 보면 식물 유전체에서 유전자 하나를 찾아낸 단순한 연구 같지만, 이 연구의 시작에는 흥미로운 전제가 깔려 있다.

여기에서 ‘난센스 전사체’란, 단백질을 합성하는 암호정보인 유전자 전사체(mRNA)의 돌연변이 중 하나로, 이런 전사체를 토대로 단백질이 합성되면 단백질이 원래 크기보다 짧아지는 불완전 형태로 생성돼 세포에 해를 끼치게 된다. 그러니 ‘난센스 전사체 분해’는 이런 전사체를 세포가 미리 인식해 분해함으로써 불완전한 단백질이 생성되는 것을 방지하는 작용을 말한다. 이 과정은 암을 비롯해 다양한 유전병과 식물의 면역 시스템 같은 생리 현상에 관여해 현재 관련 연구들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동물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SMG1 유전자가 이런 현상에 관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나, 식물의 대표 모델인 애기장대의 유전체에선 이 유전자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이런 결과를 바탕으로 많은 연구자들은 동물과 식물의 전사체 분해 조절 방법이 다를 것이라 예측하며, 식물에서는 SMG1을 대신하는 새로운 유전자가 있을 것이라 가정하고 있었다.

이번에 발표된 연구 결과는 이런 인식에 함정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SMG1 유전자는 모델식물인 애기장대에 없었을 뿐, 다른 많은 식물종의 유전체에는 존재한다는 사실이 규명됐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심지어 애기장대와 아주 가까운 친척 식물종(Arabidopsis lyrata)에서도 이 유전자를 찾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 연구는 현재의 연구 풍토에서 우리가 소홀히 다루기 쉬운 의문을 던져준다. 부끄럽게도, 이제까지 연구자들은 애기장대에 대한 연구 결과가 다른 수많은 식물에서도 동일할 것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알게 모르게 내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모델생물에 집중하는 우리는 생명의 다양한 생명 현상 중 한쪽 면만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순 모델의 효용, 복잡함을 푸는 열쇠

생명과학의 문제들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문제들은 대부분 간단하지 않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그 실체를 한눈에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방법은, 일단 그 문제를 먼저 현재의 지식으로 풀 수 있을 만한 수준으로 간단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고서 이렇게 만든 모델의 풀이 방법을 바탕으로, 원래 문제에 관여하는 요소들을 하나씩 더하며 실제 상황에 최대한 가까운 답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모델생물의 정립은 생명과학자들이 문제의 해결 방안을 가장 효율적으로 찾고자 노력한 결과물로서, 식물학자들은 애기장대라는 간단하면서도 훌륭한 자연 탐구의 길잡이를 이용해 단시간에 식물생명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물론 우리는 하나의 모델을 이용해 그 문제의 해결책을 고민하는 것과 동시에, 처음에 세운 단순한 모델이 실제 상황을 완벽하게 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지구 생명체의 다양성은 무궁무진하며, 그 속에는 아직 우리가 찾아내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흥미로운 생명 현상이 숨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연구자들이 모델생물을 공부하면서도, 자연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수민 포스텍 생명과학과 박사후연구원

※사이언스온에 실린 글을 필자가 줄이고 다듬어 다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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