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온] 살며 연구하며
몇 해 전 독일 막스플랑크 화학생태학연구소에 처음 왔을 때, 먼저 와 계신 한국인 곤충 연구자 한 분이 이곳 생활에 익숙해지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식물만 공부해 왔던 내게 재미있는 곤충 이야기를 처음 맛보게 해준 분이기도 했다. 우리 연구소가 있는 옛 동독 지역의 예나 시내 거리를 함께 걸으며 오래된 도시에 숨은 역사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고, 길가에 흔히 보이는 민달팽이를 연구하며 화학생태학이라는 학문을 연 1세기 전 곤충학자이자 전 예나대학 교수 에른스트 슈탈(1848~1919)에 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생태학(ecology)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도 이 대학 교수였던 에른스트 헤켈(1834~1919)이니, 이 동네에 생태학연구소를 세우기로 결정한 막스플랑크 사람들의 감각도 참 뛰어나다는 칭찬도 했다.
한번은 강가를 함께 산책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생물학 하는 사람들에게 ‘고전’이란 것이 있을까? 불과 몇십 년 전 생물학자가 예견하지 못했던 첨단 기술과 장비를 갖추고 실험하는 지금, 우리가 참고해야 하는 책이 있을까, 이런 물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대화의 끝에 나온 얘기는 ‘자연이 곧 우리의 고전이자 참고해야 하는 문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약간 어중간한 결론이었다. 원론적으론 맞는 말이고 또 좋은 말이지만, 연구 현장에 파묻혀 사는 내게 그런 결론이 어떤 실질적인 도움이 될까 하는 의구심도 약간 있었기 때문이다.
박사과정 동안에 애기장대라는 모델식물을 실험실에서 연구하며 나는 이 식물이 현대 식물학에서 가장 중요한 식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실제로 현대 식물학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식물 중 하나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여러 식물의 다양한 생활사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동안 나는 얼마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많은 식물을 무시(?)했는지, 또는 ‘애기장대가 이러니 다른 식물도 이럴 것이다’ 하는 식의 성급한 일반화를 했는지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한 해에 한 번꼴로 미국 유타 사막에서 수행하는 야생담배 현장 연구는 호미와 삽을 들고서 땅을 일구는 일로 시작한다. 도관을 연결하고, 물길을 내고, 물이 마른땅 위로 그냥 흐르지 않고 밑으로 잘 스며들 수 있도록 세심한 신경을 쓴다. 식물을 옮겨 심은 뒤에는 잘 자라는지 정성스레 돌본다. 기본적으로 농사를 짓는 일이다. 시골 출신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흙을 만지는 일이 좋다.
가끔 유타 사막에서 지도교수와 함께 하이킹을 할 때엔 길가에서 만나는 식물들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런 이야기 속에서 연구 주제를 찾기도 하고 실제 연구를 하기도 한다. 자연에서 자라는 식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내가 궁금하지 않니’ 하고 내게 많은 물음을 들려주는 듯하다. 확신하건대 누군가도 과거에 그런 질문을 자연에서 들으며, 또 자연에 던지며 연구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현대적인 연구와 실험 도구를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됐다. 이제 자연이 과학의 고전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조금씩 더 구체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글·사진 김상규 독일 막스플랑크 화학생태학연구소 프로젝트그룹 리더(식물분자생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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