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서 오는 빛을 관측해 태초 우주의 원시 중력파 를 찾으려는 남극의 관측시설. 미국과학재단 제공
테마산책
우주의 시초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태초의 한 장면을 엿보는 연구 결과가 최근 발표됐습니다. 지난달 미국 천체물리학 연구진이 우주에서 오는 빛에서 우주 탄생의 빅뱅(대폭발) 직후에 생겼을 중력파의 흔적을 관측했다고 발표해 큰 뉴스가 됐지요. 이 연구는 태초 우주에 ‘빛보다 빠른 공간의 급팽창’ 순간이 있었다는 오랜 급팽창(인플레이션) 가설을 입증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빅뱅이나 급팽창 가설은 우리한테 무얼 말해주는 걸까요?
빅뱅이라는 태초 우주의 모습은 지금 우주가 관측의 위치나 방향에 상관없이 동일하다(우주의 균질성·등방성 원리)는 전제에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해 얻어진 것입니다. 우주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점점 팽창하고 있지요. 그런 우주의 태초가 ‘빅뱅’이었는데, 그 이름처럼 실제 폭발이 있었다는 뜻은 아니고 이유를 알 순 없지만 우주가 아주 작은 점(특이점)에서 시작해 지금처럼 점점 커졌다는 것입니다. 빅뱅 우주론은 우주의 구조와 역동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우주 진화의 이론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빅뱅 우주론에도 약점은 있습니다. 너무 복잡한 얘기라 생략하고, 아무튼 그 약점을 보완하고자 30여년 전에 등장한 것이 바로 급팽창 가설입니다.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물질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없지만 공간 자체는 빛보다 빠르게 팽창할 수 있고, 이처럼 빠른 공간 팽창의 순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급팽창 가설은 태초의 급팽창을 통해 좁은 각도 범위에 있는 근거리의 두 지점이 360도 전 각도 범위로 관측 가능한 전 우주에 퍼질 수 있었다고 말해줍니다. 즉 빛의 태초 출발점이 급팽창을 거쳤기에, 오늘날 이 거대한 우주 공간에서 날아와 관측되는 빛의 온도가 거의 동일한 값을 지닌다는 거죠. 또한 급팽창은 우주가 지금 평탄하고 균일하다는 점을 설명해줍니다. 아주 커다란 공 위를 걷는 개미는 자기가 둥근 공이 아니라 평면 위를 걷는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주의 거대 구조인 행성, 은하, 은하단의 형성 과정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도 급팽창 가설입니다.
여기서 물음을 하나 던져 보죠. 그렇다면 모든 우주론적 사유의 출발점인 우주의 균질성·등방성 원리를 포기하면, 또는 일반상대성이론이 그저 근사치의 이론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빅뱅이니 급팽창 같은 생소한 가설 없이도 우주를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실제로 현대 우주론에서는 이를 위해 여러 변형의 이론 모형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런 모형들은 우주 관측량의 일부만을 설명하는 수준입니다. 아직 우주의 전 관측량을 빅뱅과 급팽창 이론보다 더 잘 설명하는 모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바꿔 말하면 빅뱅과 급팽창 가설보다 실제 관측량을 더 잘 설명하는 이론이 등장한다면 그것을 수용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입니다.
뉴턴 역학은 특수상대성이론의 근사식이고, 특수상대성이론의 상위 이론은 일반상대성이론입니다. 그렇다면 일반상대성이론보다 더 높은 이론은 없을까요? 상대론과 양자역학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그야말로 완벽한 이론! 양자중력이론, 초끈이론 등이 그 가능성에 도전 중이지만 지켜봐야 할 문제입니다.
만일 언젠가 이런 상위 이론이 등장한다면, 빅뱅과 급팽창 가설 없이도 관측되는 우주를 더 잘 설명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특수상대론의 근사식인 뉴턴 역학이 일상생활을 잘 설명하듯이, 빅뱅과 급팽창 가설은 현재 양자적 상대론을 기술하는 데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빅뱅과 급팽창은 무언가 낯설고 어설픈 이름 같지만 지금 우주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됩니다.
이석천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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