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재승의 영혼공작소
(10) 넛지 디자인
(10) 넛지 디자인
언젠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한 벤처회사의 기술 개발을 총괄하고 있는 최고기술경영자(CTO) 한 분을 식사 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한국의 가전회사에 근무할 때의 경험을 샤브샤브 향기에 실어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그가 비디오플레이어 개발에 참여하고 있던 시절, 어떤 제품이 가장 많이 팔리는지를 시장조사해 보니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됐다. 가전제품이 많이 팔리는 데에는 좋은 성능이 중요하긴 하지만, ‘할인마트나 백화점 진열대 중에서 어느 위치에 놓이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라는 걸 알게 됐다는 것이다. 백화점이나 할인매장에는 다양한 제품을 쌓아놓고 팔다 보니, 비디오플레이어의 경우에도 여러 제품들을 포개어 쌓아놓을 경우 맨 위에 올려진 제품이 판매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쌓여 있는 물건들 중에서 맨 아래 제품을 꺼내는 수고로움을 우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진열대에서 눈높이가 중요한 건 특별하지도 않다.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다. “저희 제품을 맨 위에 놓아주세요”라고 할인마트 점원에게 부탁만 할 순 없는 노릇이다. 묘안이 없을까? 그래서 그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한다. 비디오플레이어의 위 커버를 둥그렇고 볼록하게 만들어 그 위에 다른 제품을 올려놓을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면 자신들의 제품이 항상 맨 위에 놓이게 될 테니까. 그 결과, 백화점이나 할인매장에서 비디오를 쌓아놓고 팔 때 자신들의 제품이 항상 맨 위에 놓이게 되었고, 덕분에 매출액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고 한다. 성능은 하나도 바뀐 것이 없는데 말이다.
개인 선택을 부드럽게 유도하는 넛지
이처럼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을 행동경제학에서는 ‘넛지’라고 부른다. 이 개념은 몇 해 전 행동경제학이 주목받으면서 대한민국을 강타한 바 있다. 원래 ‘넛지’(nudge·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너지’)는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미국 시카고경영대학원의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탈러와 하버드 로스쿨의 캐스 선스타인 교수가 <넛지>라는 저서를 통해 사람들에게 어떤 선택을 금지하거나 그들의 경제적 인센티브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고도,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그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를 ‘넛지’로 새롭게 정의하고 그것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화제가 됐다.
넛지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예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스히폴 국제공항의 남자 화장실 소변기일 것이다. 많이들 들어보셨을 이곳의 소변기에는 중앙에 파리 모양의 스티커가 붙어 있다. 그러면 남자들은 소변을 볼 때 자연스레 소변기 중앙에 있는 파리 모양 스티커를 맞히려 노력하게 되고, 그 결과 소변기 밖으로 튀는 소변의 양이 파리 그림을 붙이기 이전보다 80%나 줄어들었다는 것이 그 설명이다.(필자도 스히폴 공항에 갔을 때 제일 먼저 화장실에 들어가 그 유명한 소변기를 사진 찍은 바 있다. 최근 스히폴 공항의 소변기에는 파리 외에도 다양한 동물 스티커가 붙어 있다.)
“한발 다가오세요”나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같은 표어를 붙이거나 캠페인을 벌이는 것보다,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 적절한 선택을 유도하는 것을 ‘넛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남성들의 뇌에는 흔히 ‘사냥꾼의 회로’라 불리는 뇌영역이 있어서, 이렇게 사냥감을 보여주기만 해도 뭔가를 조준해 맞히려는 성향이 있다.
이처럼 넛지의 효과는 명령이나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사람들의 선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소변기에 파리 그림을 붙이는 것은 ‘넛지’지만, ‘파리 그림을 맞히시오’라고 경구를 써붙이는 것은 넛지가 아니라는 얘기다. 명령이나 인센티브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선택에 부드럽게 간섭하지만 여전히 개인에게 선택의 자유가 열려 있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간섭주의’라고 부른다.
리처드 탈러 교수 등은 인간이 결코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는 데에서 ‘넛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만약 인간이 매우 합리적인 동물이라면 유용한 정책을 만들고 가격 대 성능비가 우수한 제품을 만들면 그 자체로 선택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므로 그들의 선택을 도와줄 장치가 필요하다. 게다가 그것이 강압적이거나 타인에 의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면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넛지처럼 부드럽게 개입하는 개선책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선거일 바로 전날에 투표할 의향이 있는지를 물어보면, 투표율이 무려 25%나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게다가 ‘이번 선거는 예년에 비해 투표율이 올라갈 것으로 예상됩니다’라는 뉴스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실제로 투표율이 크게 올라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것을 자동차나 휴대전화 등의 특정 제품에 대한 구매의사를 높이는 데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 실제로 이 이슈에 대해 연구한 과학자들이 있다. 그들에 따르면, 전국 각지에서 4만명 이상의 사람들을 표본으로 선정하여 조사를 실시한 결과 “향후 6개월 안에 새 차를 구매할 의사가 있습니까?”라는 간단한 질문만으로도 구매율을 35%나 높일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는 뜻 ‘넛지’
미 교수 책 출간 이후 세계적 유행
강요나 제약 않고도 행동 변화 유도
명령·지시 없이 개인 선택에 영향
행동경제학에 관심 몰려 화장실 파리 스티커가 대표적인 예
녹화재생기 디자인 적용해 대히트
공공분야 활용 방안 모색 움직임
미 정부, 신용카드 개선에 적용 검토
오류 막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도 오바마 정부, 공공정책에 넛지 활용 넛지의 중요성은 아마도 공공정책 분야에서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하리라 예상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넛지에 관심을 보이면서 실제로 넛지 연구자들이 오바마 정부에 합류해 규제정보국에서 일하게 되기도 했다. 특정한 정책이나 방침이 좀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되면, 민간의 기업이나 공공 부문의 관리자들이 넛지를 이용해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현명한 선택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비용을 덜 들이고 경제적 인센티브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어떻게 넛지를 설계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넛지’를 가할 수 있는, 이른바 ‘선택 설계자’의 범위를 공공의 영역으로 확대하는 것이 각별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오바마 대통령이 개혁을 시도하고 있는 신용카드 제도에도 넛지를 적용해볼 수 있다. 리처드 탈러 교수는 신용카드 회사들이 매년 인쇄물과 온라인을 통해 ‘1년 동안 발생한 모든 요금’을 항목별로 정리해 합산한 명세서를 발송하도록 규정하는 제도를 제안했다. 신용카드 사용자들이 카드를 쓰면서 물어야 하는 비용을 정확히 알게 되면, 결과적으로 나중에 크게 손해 보는 일이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통신요금이 이렇게 많았어?”라고 깨달으면, 무분별한 소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세심한 장치 하나가 구매나 사용법 같은 중요한 의사결정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다. “죄송합니다. 파일을 첨부하는 것을 깜빡 잊었네요. 다시 보내드립니다.” 이메일을 사용하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보냈을 법한 메시지다. 이처럼 이메일에는 파일을 첨부해 보내주겠다고 써놓고, 깜빡 잊고 그냥 보내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만약 구글이나 야후, 한메일 같은 이메일 서비스 회사에서 본문 내용 중에 ‘파일 첨부’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데 파일을 첨부하지 않은 경우에 “혹시 첨부해야 할 파일은 없습니까?”라고 메시지로 알려주면 어떨까? 이처럼 넛지의 가장 매력적인 응용은 디자인 분야가 아닐까 싶다. 이메일이 아니더라도, 인간들은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다. 그것도 아주 자주. ‘실수하는 동물’ 인간을 위해, 사용자들이 오류를 범할 것을 예상하고 제품이나 서비스가 알아서 최대한 ‘기술적 배려’를 해준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아마도 미래는 고객의 실수를 예상하고(이런 것을 ‘오류 예상’이라고 부른다), 실수를 줄여주는 스마트 제품들이 세상을 독차지하게 될 것이다. 오류를 줄이는 인지 디자인 오류를 예상하고 방지하는 디자인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으면 경고음을 울려준다거나, 연료가 떨어지면 ‘경고 표시’(warning sign)가 뜬다거나 하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된다. 요즘 많은 자동차 회사들은 사고 방지를 위해 주행 중에는 ‘내비게이션 시스템’에 입력을 할 수 없게 해놓았다. 헤드라이트가 주행 중에는 켜지고 주행이 멈추면 꺼지도록 자동 스위치가 장착된 차들도 있어서, 밤새 헤드라이트를 켜둠으로써 배터리가 방전되는 낭패를 없앤 신형차들도 많다. 엔진오일 교환 시기를 알려주는 자동차는 이제 다반사가 되었다. 연료 공급 노즐의 차별화도 ‘오류 방지 디자인’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디젤 연료를 공급하는 노즐은 너무 커서 휘발유를 사용하는 자동차의 주입구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휘발유 자동차에 디젤 연료를 넣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오류 방지 디자인을 채택하는 속도는 놀랍도록 느리다. 예를 들어, 아직도 주유구 뚜껑이 자동차 차체와 연결돼 있지 않은 차들이 많이 있다. 주유구 뚜껑에 그것과 차체를 연결하는 플라스틱이나 철 재질의 끈이 부착돼 있어서 주유를 끝낸 뒤 뚜껑을 놔두고 그냥 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지만, 아직도 1000원도 채 하지 않는 이 플라스틱 끈을 달지 않은 차들이 많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걸까? 심리학자들은 이를 ‘완성 후 오류’(postcompletion fallacy)라고 부른다. 주유구 뚜껑을 잊어버리고 가는 것은 ‘완성 후 오류’에 해당되는 전형적인 실수인데, 사람들은 주요 임무를 끝내고 나면 그 이전 단계들에 관련된 사항들을 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완성 후 오류의 가장 흔한 예는 현금자동인출기(ATM)에서 현금을 인출한 후에 카드를 그대로 꽂아두고 가거나, 복사를 끝마친 후에 복사기에 원본을 남겨두는 경우일 것이다. <디자인과 인간 심리>(The Design of Everyday Things, 1990)의 저자 돈 노먼에 따르면, ‘기능 강제’(forcing function) 방식을 활용하면 이런 실수가 발생하지 않도록 배려할 수 있다. ‘기능 강제’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먼저 다른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이미 많은 제품들이 이런 기능을 활용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 개발된 현금자동인출기는 카드를 삽입하고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카드를 즉시 돌려줌으로써 카드를 놓고 가는 실수를 막아주고 있다. 카드를 먼저 뽑아야만 현금을 인출할 수 있다면, 카드를 잊고 가는 일이 없게 된다. 가장 유능한 디자이너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설계자이다. 인간이 언제 실수하고 제품을 보면 어떻게 사용하려고 하는지 이해해야만, 직관적으로 쉽게 사용하는 제품을 디자인할 수 있다. 사용설명서가 없는 제품일수록 이런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사용자를 배려하는 ‘오류 방지 디자인’을 근사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오류를 예상하는 실험이 필수적이다. 실험 공간에 제품을 갖다 놓고, 사용자들이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몰래카메라를 이용해 행동관찰을 해야만 정확히 ‘오류 예상’을 할 수 있다. 디자이너가 인지신경과학을 이해한다면, 고객의 작은 실수까지도 놓치지 않고 배려하려는 최고의 디자인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정재승 교수
▶ 정재승 카이스트(KAIST·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카이스트 물리학과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박사를 받은 뒤 예일대 정신과 연구원, 컬럼비아의대 정신과 조교수 등을 거쳤다.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 <크로스>(공저) 등의 책을 냈다. 신경과학적인 관점에서 인간과 사회의 행동을 탐구하는 연구를 해오고 있다. 이 연재물은 영혼을 조종하는 뇌의 탐구를 통해 자연과학과 공학·인문학·사회과학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를 모색하려는 시도다. 격주 연재.
미 교수 책 출간 이후 세계적 유행
강요나 제약 않고도 행동 변화 유도
명령·지시 없이 개인 선택에 영향
행동경제학에 관심 몰려 화장실 파리 스티커가 대표적인 예
녹화재생기 디자인 적용해 대히트
공공분야 활용 방안 모색 움직임
미 정부, 신용카드 개선에 적용 검토
오류 막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도 오바마 정부, 공공정책에 넛지 활용 넛지의 중요성은 아마도 공공정책 분야에서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하리라 예상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넛지에 관심을 보이면서 실제로 넛지 연구자들이 오바마 정부에 합류해 규제정보국에서 일하게 되기도 했다. 특정한 정책이나 방침이 좀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되면, 민간의 기업이나 공공 부문의 관리자들이 넛지를 이용해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현명한 선택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비용을 덜 들이고 경제적 인센티브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어떻게 넛지를 설계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넛지’를 가할 수 있는, 이른바 ‘선택 설계자’의 범위를 공공의 영역으로 확대하는 것이 각별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오바마 대통령이 개혁을 시도하고 있는 신용카드 제도에도 넛지를 적용해볼 수 있다. 리처드 탈러 교수는 신용카드 회사들이 매년 인쇄물과 온라인을 통해 ‘1년 동안 발생한 모든 요금’을 항목별로 정리해 합산한 명세서를 발송하도록 규정하는 제도를 제안했다. 신용카드 사용자들이 카드를 쓰면서 물어야 하는 비용을 정확히 알게 되면, 결과적으로 나중에 크게 손해 보는 일이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통신요금이 이렇게 많았어?”라고 깨달으면, 무분별한 소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세심한 장치 하나가 구매나 사용법 같은 중요한 의사결정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다. “죄송합니다. 파일을 첨부하는 것을 깜빡 잊었네요. 다시 보내드립니다.” 이메일을 사용하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보냈을 법한 메시지다. 이처럼 이메일에는 파일을 첨부해 보내주겠다고 써놓고, 깜빡 잊고 그냥 보내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만약 구글이나 야후, 한메일 같은 이메일 서비스 회사에서 본문 내용 중에 ‘파일 첨부’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데 파일을 첨부하지 않은 경우에 “혹시 첨부해야 할 파일은 없습니까?”라고 메시지로 알려주면 어떨까? 이처럼 넛지의 가장 매력적인 응용은 디자인 분야가 아닐까 싶다. 이메일이 아니더라도, 인간들은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다. 그것도 아주 자주. ‘실수하는 동물’ 인간을 위해, 사용자들이 오류를 범할 것을 예상하고 제품이나 서비스가 알아서 최대한 ‘기술적 배려’를 해준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아마도 미래는 고객의 실수를 예상하고(이런 것을 ‘오류 예상’이라고 부른다), 실수를 줄여주는 스마트 제품들이 세상을 독차지하게 될 것이다. 오류를 줄이는 인지 디자인 오류를 예상하고 방지하는 디자인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으면 경고음을 울려준다거나, 연료가 떨어지면 ‘경고 표시’(warning sign)가 뜬다거나 하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된다. 요즘 많은 자동차 회사들은 사고 방지를 위해 주행 중에는 ‘내비게이션 시스템’에 입력을 할 수 없게 해놓았다. 헤드라이트가 주행 중에는 켜지고 주행이 멈추면 꺼지도록 자동 스위치가 장착된 차들도 있어서, 밤새 헤드라이트를 켜둠으로써 배터리가 방전되는 낭패를 없앤 신형차들도 많다. 엔진오일 교환 시기를 알려주는 자동차는 이제 다반사가 되었다. 연료 공급 노즐의 차별화도 ‘오류 방지 디자인’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디젤 연료를 공급하는 노즐은 너무 커서 휘발유를 사용하는 자동차의 주입구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휘발유 자동차에 디젤 연료를 넣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오류 방지 디자인을 채택하는 속도는 놀랍도록 느리다. 예를 들어, 아직도 주유구 뚜껑이 자동차 차체와 연결돼 있지 않은 차들이 많이 있다. 주유구 뚜껑에 그것과 차체를 연결하는 플라스틱이나 철 재질의 끈이 부착돼 있어서 주유를 끝낸 뒤 뚜껑을 놔두고 그냥 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지만, 아직도 1000원도 채 하지 않는 이 플라스틱 끈을 달지 않은 차들이 많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걸까? 심리학자들은 이를 ‘완성 후 오류’(postcompletion fallacy)라고 부른다. 주유구 뚜껑을 잊어버리고 가는 것은 ‘완성 후 오류’에 해당되는 전형적인 실수인데, 사람들은 주요 임무를 끝내고 나면 그 이전 단계들에 관련된 사항들을 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완성 후 오류의 가장 흔한 예는 현금자동인출기(ATM)에서 현금을 인출한 후에 카드를 그대로 꽂아두고 가거나, 복사를 끝마친 후에 복사기에 원본을 남겨두는 경우일 것이다. <디자인과 인간 심리>(The Design of Everyday Things, 1990)의 저자 돈 노먼에 따르면, ‘기능 강제’(forcing function) 방식을 활용하면 이런 실수가 발생하지 않도록 배려할 수 있다. ‘기능 강제’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먼저 다른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이미 많은 제품들이 이런 기능을 활용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 개발된 현금자동인출기는 카드를 삽입하고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카드를 즉시 돌려줌으로써 카드를 놓고 가는 실수를 막아주고 있다. 카드를 먼저 뽑아야만 현금을 인출할 수 있다면, 카드를 잊고 가는 일이 없게 된다. 가장 유능한 디자이너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설계자이다. 인간이 언제 실수하고 제품을 보면 어떻게 사용하려고 하는지 이해해야만, 직관적으로 쉽게 사용하는 제품을 디자인할 수 있다. 사용설명서가 없는 제품일수록 이런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사용자를 배려하는 ‘오류 방지 디자인’을 근사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오류를 예상하는 실험이 필수적이다. 실험 공간에 제품을 갖다 놓고, 사용자들이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몰래카메라를 이용해 행동관찰을 해야만 정확히 ‘오류 예상’을 할 수 있다. 디자이너가 인지신경과학을 이해한다면, 고객의 작은 실수까지도 놓치지 않고 배려하려는 최고의 디자인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정재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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