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전기차의 메카 꿈꾸는 제주
‘한번 타본' 여행자 권오성 기자
오르막 ‘516도로’ 가다 연료 바닥
각오했건만 충전으로 허둥지둥
‘공포 체험'으로 마무리하다
‘매일 타는' 제주도민 김형미씨
한달 3만원 유지비 ‘비교불가'지만
가정 충전소 설치는 오매불망
정비소는 전기차 잘 모르더라
‘한번 타본' 여행자 권오성 기자
오르막 ‘516도로’ 가다 연료 바닥
각오했건만 충전으로 허둥지둥
‘공포 체험'으로 마무리하다
‘매일 타는' 제주도민 김형미씨
한달 3만원 유지비 ‘비교불가'지만
가정 충전소 설치는 오매불망
정비소는 전기차 잘 모르더라
달조차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옆자리 아내의 얼굴은 창백했다. 여행 내내 비친 미소가 자취를 감췄다. “무섭나 보구나? 하하, 여기 있어. 갔다 올게.” 호기롭게 차 밖으로 나섰지만, 긴장하긴 마찬가지였다. ‘야생동물 따위가 튀어나오진 않겠지….’ 숲 속에서 뭔가 나를 노려보고 있진 않을까 하는 불쾌한 상상이 엄습했다. 충전카드를 충전기에 인식하고 플러그를 전기자동차에 꽂는 시간이 더디게만 느껴졌다. 그렇다, 불빛 한 점 없는 이곳은 전기차 충전소다. 급속충전기로 방전된 차를 완전히 충전하는 데에는 30분가량이 걸린다. 하지만 우리는 15분도 채 못 기다리고 시동을 걸고 얼른 빠져나왔다. 아내가 말했다. “그나마 둘이 있어서 다행이지, 여자 혼자라면 저런 데서 어떻게 충전해?” 남자인 나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다음날 아침에 안 일이지만, 우리는 전기차 충전구 마개조차 닫지 않고 도망치듯 나섰던 것이다.
으스스한 충전의 기억
제주도를 지난달 10일 전기차를 빌려 여행했다. 출장이나 가족여행 등으로 몇 번 찾은 적이 있었지만, 이번 여행은 전기차와 함께한다는 점이 달랐다. 제주도는 우리나라 전기차 도입의 선봉장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환경부가 매년 1월 발표하는 ‘전기자동차 및 충전 인프라 지역별 현황’을 보면, 지난해 국내 전체 전기차 5767대 가운데 40%가 넘는 2368대가 제주도에 분포했다. 서울의 대수는 1316대에 불과했다. 한국전기차충전서비스(한국충전)의 김영민 마케팅팀장은 “올 연말이면 제주도에는 주유소보다 충전소가 더 많아진다”고 말했다. 한국충전은 케이티(KT), 한국전력, 현대자동차 등이 합작해서 지난해 만든 민영 충전 인프라 회사로, 현재 가장 활발하게 충전소를 구축하고 있다. 한국충전 조사를 보면 현재 제주도 내 충전 시설은 모두 177개가 있는데, 이 회사는 올해 안에 70개를 추가할 계획이다. 그러면 충전소는 247개로 늘어난다. 제주도 내 주유소는 현재 225개다(한국주유소협회).
제주도는 2030년까지 도내 모든 자동차를 전기차로 바꾸겠다는 ‘탄소 없는 섬 2030’ 계획을 야심 차게 추진 중이다. 지난해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연설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자랑스럽게 소개한 곳도 제주도다. 내년 중앙정부의 전기차 보급 계획 3만대 가운데 절반인 1만5천대를 제주도가 맡는다. 제주도는 우리나라 전기차 도입·전환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존재인 셈이다.
전기차와 함께하는 제주도 여행은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새로 나오는 휘발유차들보다 월등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조용함은 전기차를 탈 때 느끼는 가장 큰 장점이었다. 시동을 걸어도 걸렸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공항 렌터카 업체에서 출발해 협재해수욕장(제주시 한림읍), 제주조각공원(서귀포시 안덕면) 등 제주 전역을 도는 내내 가속력과 승차감도 나쁘지 않았다. 유일한 불편함이라면 충전이었다. 우리가 빌린 차는 기아 ‘쏘울EV’였는데, 완전히 충전했을 때 140㎞가량을 갈 수 있다. ‘만땅’에서 600~700㎞를 달리는 휘발유차에 비해 많이 짧다. 하지만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 등을 통해 주변 충전소 위치와 현재 사용 여부를 알 수 있는 웹페이지(ev.or.kr)가 구축돼 있어서 크게 불편한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다른 충전 차량을 기다리느라 보내는 시간은 ‘여행의 쉼표’로 생각하기로 했다. 완전 충전 시 3000원에 불과한 전기값(당시 행사 중이라 무료)은 휘발유·경유값에 비하면 매우 저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호감은 이날 밤 ‘공포의 충전 체험’으로 무너져버렸다.
저물녘까지만 해도 숙소까지 전력이 충분하다고 여겼는데, 오르막이 많은 ‘제주 516도로’를 타는 순간 소모가 빨라지면서 자동차가 경고등을 깜빡인 것이다. 우리는 급하게 스마트폰을 검색했지만 가장 가까운 충전소는 ‘완속 충전기’뿐이라 ‘꽝’이었다. 완속 충전기는 완전히 충전하는 데 4~6시간은 걸린다. 가장 가까운 급속 충전기는 산굼부리 분화구 주차장(제주시 조천읍)에 있었다. 낮에는 녹음이 아름다운 관광지 주차장이었겠지만, 해가 떨어진 암중 산속 그곳에는 아무런 빛이 없었다. 아직 주행시간이 짧은 전기차의 기술적 한계와 그에 따른 잦은 충전이 불완전한 충전 인프라와 결합했을 경우 어떤 예측 못한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여기서 우리는 ‘전기차는 아직 비추(추천하지 않음)’라는 결론을 내렸다.
개인용 충전기 설치 힘들어
하지만 여행 중 가끔 있는 사건을 너무 부풀려 생각한 것은 아닐까? 여행자는 평소 많이 다니지 않는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경우가 많은 법인데, 우리가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닐까. 지난달 28일 이런 궁금증을 안고 1년 반가량 전기차를 몰고 있는 제주도 주민 김형미(41)씨의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다시 제주도를 향했다.
이날 아침은 폭우가 쏟아졌다. 제주시 이도2동 집 앞에서 아들을 등교시키고 출근하려는 김씨를 만나 함께 전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김씨는 지난해 4월부터 기아의 ‘쏘울EV’를 몰고 있다. 옆자리 아들을 챙기면서 김씨는 “대체로 만족해요”라며 입을 떼었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것이죠. 매일 출퇴근하고 주말이면 곽지(제주시 애월읍)의 부모님 댁이나 주변 여행을 다녀서 차를 많이 모는 편이에요. 전에 마티즈를 몰 때는 기름값 등 모두 해서 유지비가 월 20만원 정도는 들었거든요. 지금은 한 달 3만원대에 불과해요.” 차량 구매 가격의 경우 4000만원 수준인데 중앙정부(800만원)와 지방자치단체(1100만원)의 보조금 1900만원을 지원받아 2000만원 남짓에 구매했다.
인근 초등학교에 아들을 내려준 뒤 이야기를 이어갔다. 김씨는 문제점으로 ‘가정 충전소’ 설치 경험을 들려주었다. 400만~600만원가량 하는 개인용 충전소 설치비는 현재 정부 지원금을 받아 무료로 설치할 수 있다. 차량은 신청하자마자 출고됐지만 개인용 충전소는 설치 업체에서 주문이 밀렸다는 이유로 미루다 보니 6개월 넘게 늦어졌다. 그즈음 김씨는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새로 이사하는 곳에 설치하면 될 줄 알았는데 위치를 바꿀 경우 본인 부담금이 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씨는 결국 충전소 설치를 포기했다. 충전소 설치는 이 밖에도 여러 이유로 난항을 겪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흔한 아파트, 빌라 등 공동주택의 경우 설치에 앞서 이웃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주차난이 심각한 상황에서 승낙을 얻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공용 충전소의 확대가 우선 필요하다. 김씨는 “우리 집 주변에도 개인 충전소가 몇 개 있어요. 늘 충전하고 있는 것은 아니던데, 집집이 충전소를 지을 게 아니라 이런 충전소를 공유하는 시스템이 갖춰지면 어떨까 싶어요”라고 덧붙였다.
김씨는 직장인 제주도의회가 아닌 인근 제주도청으로 차를 몰았다. 충전 때문이다. 일단 도청의 공용 급속 충전기에 차를 꽂아둔 뒤 걸어서 사무실로 출근한다. 그리고 30분 정도 지나 다시 도청으로 가서 다른 사람을 위해 충전기를 뽑고 차를 몰아 도의회 주차장으로 옮긴다. 사나흘에 한 번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해야 한다. 김씨는 “그래도 직장이 도청 주변이라 괜찮은 충전 설비가 있어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사정이 좋다”고 말했다. 그는 외곽으로 가족 나들이를 할 때면 늘 ‘충전 계획’을 먼저 세운다고 한다. 과거 두 번이나 차가 멈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휘발유나 경유 차는 연료가 떨어졌다고 해도 얼마 정도 더 가잖아요? 그 생각을 하고 여유 부리다가 큰일 났죠. 전기차는 거의 바로 멈추더라고요.” 나 역시 산굼부리 충전소에서 무사히 충전되었기에 망정이지 방전된 전기차 안에서 휴일 밤에 갇혔으면 어땠을까 상상하니 아찔했다.
“입소문이 전기차 성공 좌우”
하루 일과가 끝나갈 오후, 전기차를 타는 김씨의 동료들과 티타임을 했다. 전기차의 다른 문제점들도 나왔다. 차가 고장 난 경우, 제대로 된 수리 서비스를 받기 어려웠다. 김씨는 블랙박스를 달았다가 차가 방전돼 정비소에 가져간 적이 있는데, 1000만원이 넘는 배터리를 교체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알고 봤더니 정비사의 오진이었다. 다른 이는 구매 직후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배터리를 교체해야 했다고 한다. 전기차를 제대로 수리할 줄 아는 정비소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충전 카드 시스템도 불편했다. 환경부 설치 충전소와 다른 민간회사 충전소에 쓰이는 카드가 달라서 여러 장을 들고 다녀야 한다. 지난 8월 통합한다는 발표가 나왔지만, 아직 교체 작업이 완료되지 않아 불편하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민 김씨와 여행자인 기자가 겪었던 문제의 공통점이 드러났다. 전기차 확대·보급에 치중하다 보니 정작 사용자 경험을 고려하지 않아 생긴 문제가 대다수였다. 전기차와 충전소 수는 빠르게 늘었지만, 무리하게 확대되면서 오히려 이용자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낳았다. 충전소, 정비, 지불카드 등 연관되는 제반 시스템이 쫓아가지 못하면서 사용자 경험을 저해하고 있는 것이다.
전기차의 확산과 관련한 연구를 보면, 소비자의 경험과 입소문이 다른 요소들 못지않게 중요한 변수라는 점을 뒷받침한다. 박경배 상지대 경영학과 교수는 2012년 발표한 ‘친환경차 확산전략에 대한 시스템다이내믹스 접근과 인과지도 분석’이라는 논문에서 생산 부문 규모의 경제, 기술 부문 배터리의 발전과 더불어 소비자들 사이의 입소문과 같은 네트워크 효과가 성공의 중요한 요소라고 분석했다. 영국 리즈대의 사이먼 셰퍼드 교수도 국제 학술지 <교통 정책>에 2012년 발표한 논문에서 전기차 운전자와 비운전자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주변 지인에게 전파하는 전기차에 대한 경험담이 사람들의 전기차 전환율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라고 지적했다.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올린 신기후체제에서 내연기관 차량에서 전기차로의 전환은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풍력과 태양열 등 재생에너지 기술의 발전으로 ‘에너지 혁명’이 일어난다면, 전기차는 친환경성에서 다른 교통수단을 앞서게 된다. 제주도는 지난해 전기차 1515대의 보급계획을 세웠는데, 제때 차를 못 받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신청자가 몰리면서 목표를 무난히 달성했다. 하지만 동시에 김씨와 같이 곤란을 겪는 이들도 나왔다. 올해 목표는 4000대인데 지난 8월 기준 아직 1000대에 불과할 정도로 실적이 크게 떨어진 상황이다. 최근 한국 진출을 선언한 테슬라의 양산형 전기차 ‘모델 3’을 기다리는 이들 때문에 수요가 떨어졌음을 고려해도 전년과 확연한 대조를 보인다. 지난해 경유차를 구매한 다른 제주 주민 송아무개(36)씨는 전기차 전환을 피한 이유에 대해 “주변 평가가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말이 많아서”라고 말했다. ‘2030년 도내 37만대(예상) 모든 차량의 전기차로의 전환’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선 ‘숫자’보다 사용자 경험에 바탕을 둔 준비가 필요해 보인다.
제주/글·사진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인포그래픽 박향미 기자 phm8302@hani.co.kr
제주도에 설치된 한 전기차 급속충전소의 모습. 시연자가 보여주고 있듯 카드를 충전기에 인식한 뒤 주유기처럼 생긴 전기 플러그를 전기차 충전구에 꽂고 충전하면 된다.
기아의 전기차 ‘레이EV’를 충전중인 모습.
지난달 9일 제주도 여행에 앞서 권오성 기자가 제주공항 부근 공용 충전소에서 전기자동차를 충전하고 있다.
제주 올 전기차 4천대 보급 계획
연말이면 주유소보다 충전소 많아져
사용자 경험 고려 안한 ‘양적 확대’
불평 폭주로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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