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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선이 뜨자 사람들이 모였다

등록 2016-10-24 14:21수정 2016-10-24 15:26

[버려진 리버풀 항만의 부활]
1920년대부터 쇠퇴한 ‘앨버트독’
해양문화, 옛 건물 살려 리모델링
170년 역사 숨쉬는 세계관광지로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845년 2월 첫 배를 띄운 영국 리버풀의 앨버트독(Albert dock)은 이후 80여년 동안 유럽 최고의 항구도시인 리버풀의 부흥을 이끈 주역이었다. 앨버트독은 머지강의 거대한 파도로부터 대형 화물선이 안정적으로 선착할 수 있도록 설계된 갑문식 계선독 시설이었다. ‘ㅁ’자 형으로 접안공간을 완전히 감싸는 형태의 최초의 독이기도 했다.

앨버트독의 핵심 건축물인 창고는 당시 이곳의 무역 규모에 걸맞게 거대했다. 항구를 감싸는 형태로 지어진, 이 대형 건축물을 짓는 데 쓴 붉은 벽돌은 무려 2350만개에 이르렀다. 건물을 지지하는 1층의 벽돌 벽은 두께가 3피트(91㎝)에 이르며, 벽돌을 쌓기 위해 사용한 모르타르(시멘트+모래)의 양도 4만7000t, 건축에 사용한 목재는 길이로 따지면 48마일(77㎞)에 이를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의 영광은 계속되지 않았다.

■ 진흙더미 항구의 변신

화물선을 이용한 무역이 상당 부분 증기기관 열차로 대체되면서 이곳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새로 지은 항구에 견줘 입구가 작아 화물선 항구로서의 경쟁력도 낮았다. 1920년대에는 상업용 항구 기능을 사실상 상실했다. 이런 와중에 벌어진 2차 세계대전은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리듯’ 앨버트독의 쇠퇴를 가속화했다. 전투함의 출항 요지로 사용되다 보니 독일 나치 공군의 타깃이 됐다. 1940년 6월 창고건물 가운데 하나인 애틀랜틱 파빌리온의 지붕은 폭격에 사라지고 말았다. 급기야 머지강으로부터 흘러내려온 온갖 쓰레기와 진흙 더미가 쌓이고 말았다. 배를 접안하던 이곳에서 더는 물을 볼 수 없었다. 독성이 심각한 더러운 진흙뿐이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쇠퇴했던 앨버트독은 이제 옛 영화를 찾았다. 지난달 29일 찾은 이곳은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빨간색으로 칠한 주철 기둥을 따라 ‘ㅁ'자 형으로 죽 이어진 회랑은 핵심 상업거리가 돼 있었다. 바닷물을 잔잔하게 가둬둔 이곳엔 범선과 요트가 묶여 있다. 그것을 바라보며 걷는 회랑의 다른 한쪽에는 각종 식당과 기념품점이 자리를 잡고 있다.

무역 창고였던 이곳에는 런던 밖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모던아트 갤러리인 ‘테이트 리버풀’과, 리버풀에서 활동하기 시작해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한 비틀스를 기념하는 ‘비틀스 스토리’ 등이 둥지를 틀었다. 상업시설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수용할 만한 호텔도 창고를 개조해 자리잡았다. 아파트도 들어서 있었다. 이날 앨버트독의 역사 등을 해설하는 가이드인 진 하퍼는 “이 아파트는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바닥까지 떨어졌던 이곳, 앨버트독은 무슨 일을 겪은 걸까.

진 하퍼 블루배지 가이드가 지난달 29일 영국 리버풀 앨버트독의 비틀스 스토리 앞에서 앨버트독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진 하퍼 블루배지 가이드가 지난달 29일 영국 리버풀 앨버트독의 비틀스 스토리 앞에서 앨버트독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쓰레기 매립지로 만들자”

19세기 말 앨버트독을 포함해 머지강 주변 독을 여럿 소유한 ‘머지 독스 앤 하버’의 이사회는 쇠퇴한 앨버트독에 애정이 없었다. 이들의 입장은 이랬다. “우리는 부서지기 전까지 수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부서지면? “그래도 수리하지 않을 것이다.”

앨버트독 이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폭탄으로 훼손된 창고건물 가운데 하나인 애틀랜틱 파빌리온을 부서진 채로 그대로 뒀다. 그저 이 땅을 어떻게 하면 팔 수 있을지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까지는 거래가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그러던 1970년대 초 부동산 개발 바람이 불었다. 수많은 제안이 쏟아져 들어왔다. “정부 공관을 옮겨 공무원들을 위한 사무용 공간으로 만들자”는 제안도 있었고, 창고를 모두 부수고 주거용 부동산으로 개발하는 방안도 제시됐다. ‘리버풀 폴리테크닉’(현재는 리버풀 존 무어스 대학) 이전 계획, 앨버트독에 흙을 채우고 창고는 부숴 세계무역센터와 사무용 빌딩들로 채우자는 계획, 테스코 등 대형 쇼핑센터를 집어넣자는 계획들이 제기됐다. 심지어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쓰레기매립지로 만들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각종 제안의 공통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철거형 도시개발 수법이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때 휘날리는 금발 때문에 ‘타잔’이라 불리는 남자가 나타났다. 마거릿 대처 정부의 환경부 장관이었던 마이클 헤슬타인이다. 그는 이 땅을 되살리는 일에 몰두했고 1981년 3월 ‘머지사이드 개발회사’(MDC·엠디시)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그해 8월 첫 전략을 세웠다. 진흙 더미를 모두 치우고 다시 물을 끌어들이는 일을 주요 과제로 제시하며, 부동산개발회사인 애로크로프트(Arrowcroft)와 협상을 시작했다.

■ ‘범선 경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다

엠디시와 애로크로프트는 물을 이용한 재생을 고민했다. 준설을 통해 진흙을 모두 제거하고 물을 다시 끌어들였다. 리버사이드 카운티 의회가 추진해온 해양박물관을 유치하고, 창고건물 가운데 하나인 에드워드 파빌리온을 리모델링해 각종 상업시설을 집어넣었다. 엠디시와 애로크로프트는 이렇게 그린 바탕 위에 이곳의 콘셉트에 꼭 맞는 이벤트를 벌였다. 1984년 8월 머지강에서 펼쳐진 ‘커티사크 범선 레이스’였다. 나흘간의 행사 동안 범선 레이스를 보러 온 방문객이 100만명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16만명이 앨버트독을 찾아 해양박물관과 새로 꾸며진 상점들을 둘러봤다. 대성공이었다. 앨버트독 부둣가에 일반 대중이 들어선 것은 독이 문을 연 지 138년 만의 일이었다.

이벤트의 성공은 고무적이었다. 다른 창고건물의 리모델링에 속도가 붙었다. 폭격을 받고 부서져 있던 애틀랜틱 파빌리온이 1986년 6월 수리됐고, 이후 가장 큰 건물인 더콜로네이즈(The Colonnades)가 복원됐다. 1층엔 상가가, 그 위엔 아파트가 들어섰다. 150년 임대 조건의 아파트 115채는 나오자마자 모두 팔렸다. 버려져 있던 창고 지하공간은 주민들을 위한 주차공간으로 변신했다. 앨버트독의 창고시설은 각종 박물관과 전시장, 상점, 사무실과 더불어 주거시설까지 들어서며 하나의 ‘마을’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또 한 가지 큰 사건은 테이트 리버풀이 앨버트독에 들어선 일이었다. 1988년 5월 영국 왕실의 찰스 왕세자가 개관 행사에 참석할 정도로 화제를 모은 이 모던아트 갤러리는 10년 동안 500만명의 방문객을 끌어들였다. 이후 개발은 순조로웠다.

영국 리버풀 앨버트독의 전경. 머지사이드 해양박물관과 지금은 식당으로 바뀐 ‘펌프 하우스'(왼쪽 굴뚝 건물)가 보인다.
영국 리버풀 앨버트독의 전경. 머지사이드 해양박물관과 지금은 식당으로 바뀐 ‘펌프 하우스'(왼쪽 굴뚝 건물)가 보인다.
■ 물의 지속가능성

물은 매혹적이다. 바람에 따라 무수한 형태로 변주하는 푸른 물결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흥미가 돋게 한다. 앨버트독에는 해양문화가 그대로 녹아 있다. 독 한가운데에는 이색적인 모양의 범선이 둥실둥실 떠 있다. 해양박물관이 있고 기념품점의 하나인 노티캘리아(Nauticalia)에서는 모형 배나 나침반, 망원경 등을 판다.

이런 개발이 가능했던 이유는 뭘까. 애로크로프트의 회장이었던 레너드 에펠은 <앨버트독 리버풀>이란 책에서 앨버트독의 창고건물을 회상하며 “건물이 내게 말을 걸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창고건물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이사회를 설득해 지금의 모습을 그려낸 것도 그였다. 김정후 영국 런던대 교수는 이 건물에 대해 ‘리버풀 몰락한 항구도시에서 유럽의 문화도시로’라는 글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건립 당시의 모습을 보면 부둣가에 지어진 단순한 창고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웅장했다. 담백하면서도 안정적인 비례를 지닌 벽돌 건물의 이미지 때문이다. 특히 건물 앞 회랑에 ‘도리스 양식’을 이용했고 아치도 만들어 마치 신전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물론, 앞서 거론됐던 각종 철거형 개발 방식도 당시 상황상 완전히 엉뚱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속가능성’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방식만큼 성공할 수 있었을지 의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해양문화와 옛 건물의 매력을 한껏 활용한 이 개발을 통해 애로크로프트가 얻은 것은 적지 않다. 창고건물은 시간의 압력을 견뎌내 여전히 튼튼한 상태였다. 신축보다 훨씬 적은 공사비를 썼고, 옛 건물의 매력 속에서 감성을 얻었다. 재생건축 전문가인 김종석 쿠움파트너스 대표는 “시간이 만들어낸 감성은 신축으로는 결코 흉내낼 수 없다”고 말했다. 1800년대부터 장구히 이어내려온 이곳의 역사도 방문객들의 흥미를 높였다. 하퍼와 같은 ‘블루배지’ 가이드는 방문자들에게 이곳의 역사를 이야기로 풀어 설명한다. 1995년부터 20년 넘게 이 일을 하고 있는 하퍼는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앨버트독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풀어냈다.

리버풀/음성원 기자 esw@hani.co.kr, 인포그래픽 노수민 기자 bluedahlia@hani.co.kr

해양문화 콘텐츠로 성공한 사례를 돌아봄으로써 우리 바다의 미래를 가늠해보는 이 시리즈는 한국해양수산개발원과 공동 기획으로 매주 연재됩니다.
해양문화 콘텐츠로 성공한 사례를 돌아봄으로써 우리 바다의 미래를 가늠해보는 이 시리즈는 한국해양수산개발원과 공동 기획으로 매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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