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의 투명한 흐름, 반부패, 반엘리트주의 깃발을 내건 디지털 직접민주주의는 세계 각지에서 부상하고 있다. 과거 10년 전쯤만 하더라도 흥미로운 실험 정도로 취급되던 움직임이 기성 정치시스템에 침투하고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무정부주의 냄새가 짙은 장난스러운 이름의 해적당이 아이슬란드 원내 2당으로 올라선 것은 상징적이다.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시빅 해커’(civic hacker) 집단은 변화의 바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정치적 변혁이 가장 확연한 지역은 이탈리아·스페인 등 남부 유럽이다. 2009년에 설립된 이탈리아의 ‘오성운동’(다섯 개의 별)은 2013년 총선에서 상·하원 의석 모두 4분의 1가량을 차지했고, 올 6월에는 로마 최초의 여성 시장 비르지니아 라지를 당선시켰다. 스페인에선 2014년 설립된 정당 ‘포데모스’(우리는 할 수 있다)가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20%의 지지율로 원내 3당에 올랐고, 내각이 구성되지 못해 다시 치러진 올해 6월 재선거에서도 지지세를 유지했다. 제2의 도시 바르셀로나에선 풀뿌리 시민 정당 ‘바르셀로나 엔 코무’(모두의 바르셀로나) 여성 후보 아다 콜라우가 지난해 5월 시장으로 당선됐다.
미국에서는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입법 청원이 강력한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세계 최대 청원사이트인 미국의
‘체인지닷오아르지’(change.org)는 지난 11일 기준 1억6700만명이 넘는 세계인이 참여해 2만개 가까운 청원을 국가와 의회에 제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누구라도 자신의 제안을 이 사이트에 올릴 수 있으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으로 공감과 서명을 얻어내면 법을 바꾸는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성폭행 피해자 어맨다 응우옌은 이를 통해 성폭행 피해자 특별법을 제안했고 지난 10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서명하는 쾌거를 이뤘다. 핀란드에선 2014년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자녀를 잃은 부모가
‘오픈 미니스트리’(열린 행정부)라는 청원 플랫폼을 통해 벌인 처벌 강화 청원이 국가적인 관심을 받으며 진행돼 실제 개정으로 이어졌다. 청원은 시민이 의회나 정부라는 대리자를 거치지 않고 직접 정치적 변화를 끌어내는 방법이다.
남미에서는 젊은 여성 지도자 피아 만치니 주도로 만들어진
데모크라시오에스(OS)가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데모크라시오에스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돕는 프로그램으로, 이를 바탕으로 결성된 신생 정당 ‘넷파티’는 비록 의회 진출에 실패했지만 큰 주목을 받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의회는 2014년 여기에 자극받아 데모크라시오에스를 이용해 시민 의견을 받아 법을 제정하는 변화에 동참한다. 대만의
‘거브제로’(g0v)는 시민의 정부감시 집단으로 공공정보 시각화와 공유, 시민참여 촉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곳 출신 지능지수(IQ) 180의 천재 해커이자 트랜스젠더(성전환자)인 오드리 탕은 지난 8월 대만 정부의 최연소 장관(디지털 부문)으로 임명됐다. 인구 130만명의 에스토니아는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시민 크라우드소싱 방식으로 정치개혁까지 이뤘다. 크라우드소싱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대중 참여로 집단지성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말한다. 에스토니아는 2012년 여당의 선거 자금 스캔들을 계기로 전 국민의 분노가 들끓자 온라인 참여 방식으로 개혁 방안을 모집해 시민청원 제도화 등을 포함한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기술은 이런 변화의 바탕에서 빠질 수 없는 구실을 해왔다. 스페인의 포데모스가 당의 결정들을 내리는 데에는 온라인 의사결정 플랫폼
‘루미오’(loom.io)가 요긴하게 쓰였다. 루미오는 뉴질랜드의 진화심리학 학생인 벤 나이트가 주도해 만든 프로그램으로 조직에서 구성원이 무엇을 민주적으로 결정하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루미오는 투표 기능과 함께 어떤 구성원이 그에 대해 무슨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제시하고 이를 서로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구조를 갖춤으로써 정당에서 모든 구성원의 의견이 소외되지 않고 반영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모든 신흥 조직에는 이런 디지털 플랫폼들이 있었다. 바르셀로나 엔 코무에는 데모크라시오에스가, 아이슬란드 해적당에는
‘엑스피라타’(x.piratar.is)가, 에스토니아 개혁에는
‘유어 프라이오리티스’라는 프로그램이 쓰였다.
오드리 탕과 같은 시빅 해커 집단은 이런 프로그램 개발을 주도해왔다. 이들은 기존 정치체계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규정하고 이 시스템의 생각지 못한 구멍(문제점)을 찾고 이를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전통의 해커가 컴퓨터 시스템에 대해 갖는 생각과 같다. 이들이 내놓는 대안 프로그램은 대의 민주제나 엘리트 정치의 취약점에 대한 해킹인 셈이다.
정보의 자유를 핵심 가치로 두는 이들의 접근법은 공유라는 강력한 문화적인 강점을 갖는다. ‘자신이 개발한 코드는 전체의 발전을 위해 공개하고 서로 공유한다’는 이들의 오랜 전통이 사회 변화에서도 중요한 동력이 되는 것이다. 영장류 집단에 대해 연구해온 벤 나이트는 미국 금융위기로 촉발되어 뉴질랜드까지 번진 ‘오큐파이’ 집회에서 개발자를 만나 집단이 합리적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해, 루미오를 만들어 공유했다. 루미오는 이런 프로그램에 관심있는 세계 프로그래머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동시에 이들로부터 받은 피드백으로 단시간에 유용한 플랫폼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스페인 포데모스에서 큰 결실을 맺었다. 조희정 이화여대 경영연구소 교수는
‘디지털 사회혁신의 정당성과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논문에서 “(이런) 혁신의 민주적 특징은 가치, 규범, 기술 디자인 부문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가운데) 기술 디자인에 있어서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기술 공유와 쉬운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글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인포그래픽 노수민 기자
bluedahli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