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발견에 정체 수수께끼
“생물 특성을 지닌 바이러스라니! 처음엔 믿기지 않는 일이었죠. 우리가 발견한 게 바이러스라는 분명한 증거를 더 보충하라는 요구를 많이 받았고요. 그래서 갖가지 입증 자료를 갖춰서 발표하게 됐지요.”
‘세포생물 닮은 거대 바이러스’를 발견해 최근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발표한 국제 공동연구진의 이태권 연세대 교수(원주캠퍼스 환경공학과)는 “애초 하수처리장에 사는 특정 박테리아를 찾는 연구를 하다가 우연히 얻은 뜻밖의 발견”이라고 말했다. 인플루엔자나 지카 같은 바이러스가 10개 안팎 유전자를 지닐 뿐인데, 연구진이 오스트리아 하수처리장에서 찾아낸 ‘클로스뉴바이러스’는 무려 1500여 개 유전자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세포생물처럼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유전자 세트도 거의 다 갖추고 있었다. 세상에! “몸집도 커서 좋은 광학현미경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인 0.3마이크로미터(㎛, 100만분의 1m)나 됐죠.”
현대 생물학이 아는 바이러스는 생명체 자격에 한참 모자라는 최소 유전자만 지녀 스스로 증식하지도 못하면서 세포생물에 감염해 그 단백질 합성 공장과 복제 시스템을 이용해 증식할 뿐이다. 그런데 큰 몸집에다 세포생물 닮은 유전자들을 다량으로 갖추고 있는 이른바 ‘거대 바이러스’(자이언트 바이러스)가 점차 생물학계의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는 모양이다. 지난 2003년에 첫 번째로 ‘미미바이러스’가 보고된 이래 거대 바이러스의 발견 소식도 잇따르고 있다. 아직 정체가 다 규명되지 못한 거대 바이러스는 생명의 분류 개념조차 바꿀지 모를 수수께끼의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처음엔 독특한 박테리아 정도로
전에 없던 존재가 처음 발견될 땐 곧잘 착시의 과정을 거친다. 미미바이러스가 그랬다. 애초 미미바이러스는 1992년 영국의 냉각탑에서 일찌감치 검출됐지만 처음엔 단세포 아메바에 기생하는 독특한 박테리아 정도로 이해됐다. 정밀한 분석 기술이 등장하고 나서 11년 뒤인 2003년에야, 프랑스 연구진은 이것이 박테리아가 아니라 거대한 몸집의 바이러스라는 사실을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한 장짜리 짧은 논문에서 밝혔다.
‘박테리아를 닮았다(mimick)’는 뜻에서 미미바이러스라는 이름이 붙은 최초의 거대 바이러스는 지름이 400나노미터나 됐으며 특히 유전체(게놈)는 100만 염기쌍을 넘는 규모에다 웬만한 기생 박테리아보다 많은 유전자(1018개)를 지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에 거대 바이러스의 목록에는 새로운 발견과 여러 이름들이 더해졌다. 2013년에는 칠레와 오스트레일리아의 해안과 호수에서 미미바이러스보다 훨씬 더 큰 바이러스가 발견됐다. 놀라움의 의미를 담아 판도라바이러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연구진은 논문에서 “판도라바이러스라는 이름은 이전에 알려진 미생물과 비슷함이 없다는, 그리고 앞으로 이 바이러스 연구에서 나올 놀라움의 의미를 담았다”고 전했다.
2014년과 2015년엔 러시아 시베리아의 3만년 된 영구동토에서 되살려낸 거대 바이러스로 ‘피토바이러스’와 ‘몰리바이러스’가 잇따라 보고됐다.
최근 발견된 클로스뉴바이러스
유전자가 1500개나 되고
단백질 만드는 유전자 세트도
2003년 ‘미미바이러스’가 처음
2013~2015년에도 3건 확인
정체에 대한 지금까지 가설은
“멸종된 원시조상 계통에서 진화
세균-고세균-진핵생물 외 새 영역”
이번 발견으로 새로운 가설 등장
“단일 생물체서 유래한 유전자 아니라
여러 숙주 생물에서 훔쳐와 간직”
‘단백질 합성 시스템도 없는데 왜?’
풀어야 할 숙제는 여전히
새로운 분류 체계도 선보여
지금껏 몰랐던 거대 바이러스가 존재한다는 게 점점 분명해지면서 그 정체와 관련해 여러 물음이 제기됐다. 대체 거대 바이러스는 생물의 기나긴 진화의 역사 중 어디에서 유래한 걸까? 바이러스와 생물의 중간자처럼 보이는, 그래서 생물 아닌 바이러스와 생물인 세포생물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는 이들의 정체는 무얼까? 이와 관련해 지금까지 대체로 다음 가설이 주목을 받았다. 즉, 먼 옛날에 멸종하고 지금은 없는, 세포 닮은 어떤 원시조상의 계통에서 거대 바이러스가 이어져 진화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 거대 바이러스를 발견한 프랑스 엑스마르세유대학의 장미셸 클라베리 교수 연구진은 “제4의 생명영역” 가설을 주장하고 있다. 생물학은 지상의 모든 생물을 ‘박테리아(세균)’, ‘고세균’, 그리고 동식물이 포함되는 ‘진핵생물’이라는 3대 영역으로 나누는데, 여기에 지금껏 몰랐던 제4의 생명영역을 추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거대 바이러스의 잇단 발견에 힘입어 지상 생물의 진화 계통도에다 바이러스를 포함할 수 있다는 새로운 분석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2015년 미국 일리노이대학 연구진은 과학저널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바이러스와 세포생물 진화의 역사를 하나의 그림에다 담은 분류 체계도를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이제는 생명의 분류 개념을 바꾸자는 제안이다.
과연 지상 생명계는 생물학의 현행 분류체계가 다 담지 못하는 또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는 걸까?
“예외적이 아니라 흔한 존재로”
이번에 오스트리아 하수처리장에서 발견된 거대 바이러스 ‘클로스뉴바이러스’는 이런 ‘제4의 생물영역’ 가설에 찬물을 끼얹었다. 거대 바이러스는 생명의 역사에서 사라진 어떤 원시조상에서 유래한 존재가 아니라, 일부 바이러스가 숙주인 아메바 같은 단세포 진핵생물의 유전자를 훔쳐와 점점 몸집을 키우며 진화한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러 숙주 감염을 거쳐 숙주 유전자를 훔쳐 오면서 몸집을 점점 키우는 거대 바이러스 진화 과정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의 갈무리. 미국 에너지부 산하 게놈연구소(JGI) 제공
연구진은 무려 1500개에 달하는 클로스뉴바이러스의 유전자를 분석하다보니 그것들이 숙주한테서 훔쳐 온 유전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태권 교수는 “클로스뉴바이러스의 유전자들이 어떤 단일한 생물체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숙주 생물에서 가져온 것으로 분석됐다”고 말했다. 애초엔 몸집이 작은 바이러스의 일종이었지만 여기저기에서 훔쳐 와 간직한 유전자의 규모가 커지면서 거대 바이러스로 점점 진화했으리라는 가설이다.
그동안 제시돼 왔던 제4의 생명영역 가설의 지지자들은 이런 설명을 반박하고 있어, 거대 바이러스의 기원에 관해서는 당분간 논쟁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유전자 탈취’ 가설을 받아들이더라도 여전히 물음은 남아 있다. 기생 생물체는 흔히 몸집을 점차 줄이면서 진화해왔는데, 거대 바이러스는 기생체이면서도 오히려 몸집을 일부러 키운 이유는 무얼까? 특히나 단백질을 만드는 합성공장 시스템을 제 몸에 갖추지도 못했으면서 거대 바이러스는 왜 구태여 단백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생물의 유전자 세트를 훔쳐 와 간직하고 있는 걸까?
거대 바이러스의 존재는 분명해지고 있지만 그 정체를 둘러싸고는 오히려 수수께끼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 이태권 교수는 “이번 연구에선 클로스뉴바이러스 외에도 3종의 거대 바이러스가 더 발견됐다”면서 “거대 바이러스는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훨씬 더 흔하게 존재하리라고 여겨진다”고 말했다. 클로스뉴바이러스를 발견한 연구진은 연구성과 발표자료에서 “거대 바이러스의 유전체 규모 신기록도 곧 경신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앞으로 거대 바이러스의 진짜 거대한 세계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원주/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