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학 실험실에서 연구원들이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내가 발견한 입자에 대한 연구는 당장 어디에 응용할 수도 없고 실용화와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지난 1일 호암상 과학상을 받은 최수경 경상대 물리학과 교수는 “지난 3년 동안 연구비를 받지 못해 입자 연구를 접을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에 빠졌는데 호암상이라는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 대비 기초연구비 비중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기초연구비도 2011년 3.4조원에서 2016년 5.2조원으로 크게 증가했다. 하지만 새로운 기초과학 연구에 도전하는 연구자들이 받을 수 있는 자유공모 기초연구비 비중은 2011년 28%에서 2016년에는 21%로 줄었다. 한국물리학회·대한화학회·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 등 15개 기초과학학회는 지난 9일 국회에서 ‘창의적 기초연구 진흥을 위한 국가 연구개발 정책 제안’을 발표해 “창의성과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연구자 주도의 자유공모 기초연구비를 현재 1.1조원 규모에서 3조원으로 증액하고 순수 연구개발비 중 자유공모 연구비 비중을 현 20%에서 50%로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 정책 제안 내용을 설명한 이일하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정부 주도의 기획연구는 추격형 연구에 의미가 있고 연구자 주도의 자유공모 연구는 선도형 연구에 적합하다. 기획연구와 자유공모 연구비의 불균형은 전체 기초연구비 증가와 함께 꾸준히 유지되던 과학기술인용지수(SCI)급 논문 편수와 영향력지수(임팩트 팩터, IF) 상위 저널 논문 수의 증가 추세가 최근 정체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이명박 정부 때부터 정부 연구개발 예산을 기초·응용·개발연구로 구분하는 데 아직 용어에 대한 명확한 개념 설정이 안 돼 있는 것 같다. 기초과학 연구는 우리가 잘살게 됐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다. 국제사회에 (우리가 받은 혜택을) 되갚아줄 의무가 있는 것도 기초과학을 해야 하는 이유의 하나다”라고 말했다. 김명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회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우리나라 기초연구 비중이 20%로 나와 있는데 오이시디의 기초연구 개념은 주체가 대학이다. 대학연구비의 비중은 9%로 오이시디 가운데 최하위다”라고 지적했다. 이일하 교수는 “인력은 대학에 더 많은데 연구비는 정부 연구소로 더 많이 가는 불균형도 해결돼야 한다”고 했다.
신진연구자인 이우인 서울대 약대 교수는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기초연구과제를 할 때는 5년간 6억원을 지원받았는데, 한국에서는 연간 5천만원씩 3년짜리 과제를 받았다. 그나마 다른 과제를 중복신청하지 못하게 돼 있다. 신진연구자가 국제적 경쟁력을 확보하고 지속적인 연구를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발간하는 ‘국가연구개발 조사분석보고서’를 보면, 연구책임자 1인당 연구비는 2012년 4억1500만원에서 2015년 4억4천만원으로 증가한 반면 신진연구자 연구비는 1억7200만원에서 1억6100만원으로 줄어들었다.
미 국립보건원도 신진연구자의 기초연구 비중 감소라는 난제에 봉착하기는 마찬가지다. 최근 프랜시스 콜린스 국립보건원 원장은 “더 많은 연구자를 지원하기 위해 연구자 개인별 연구비 상한제(그랜트 스코어 시스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립보건원 연구비 지원에서 10%의 ‘팻캣’(Fat Cat) 연구자가 40%의 연구비를 독점하고 있다. 또 45살 미만의 신진연구자나 45~60살의 중견 연구자 비중은 줄어드는 반면 60살 이상의 고령연구자 비중은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연구비 규모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생산성은 하락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국립보건원은 프로그램별로 연구과제 지원지수(GSI)라는 점수를 매겨 상한을 초과하는 연구과제 예산을 절감해 적어도 1600건의 신규 과제를 추가 지원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에서도 최근 대학 교원 1인당 개인연구비가 10년 사이에 크게 줄어들어 학계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문부과학성의 2016년 실태조사에서 교원 1인당 개인연구비가 연간 50만엔(500만원) 이하인 연구자가 60%에 이르렀다. 또 연구자의 43%는 10년 전에 비해 연구비 규모가 줄어들었다고 답변했다. 일본 학계는 “개인연구비 감소가 기초연구 역량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정부에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이근영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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