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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과학

‘한국과학사 연구’ 한길에 섰던 큰 학자

등록 2018-01-18 19:08수정 2022-03-17 12:16

[가신이의 발자취] 고 전상운 선생을 추모하며

66년에 낸 ‘한국과학기술사’
전통과학 실체 철저히 밝혀
‘한국 100대 명저’ 꼽히기도
고 전상운 선생
고 전상운 선생
한국과학사 연구의 큰 학자 전상운 선생이 15일 오후 2시35분 영면에 드셨다. 향년 86.

올해도 옆에서 껄껄 웃으며 새해 덕담 주시는 것 같아서 실감이 나지 않는다. 고향이 원산이신지라 약간 함경도 억양의 농지거리가 섞인 정겨운 말씀이 아직 귀를 울린다.

‘1·4 후퇴’ 때 북쪽에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남쪽에 와서 다시 고향땅을 밟지 못하셨으니 선생은 철든 이후 평생 실향민이셨다. 부산 피난 시절에 문과 쪽 소질을 외면하고 순수과학인 화학 공부를 택한 까닭도 선생이 연고 없는 월남자 처지였기 때문이다.

1950년대 중반 때마침 조지프 니덤을 선두로 하여 전세계적으로 중국 과학사의 재인식이 시작되었다. 19세기 이전까지 중국의 과학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보여주었다는 경천동지의 내용이었다. 문과 기질이 출중한 과학도인 선생이 어찌 그 열풍 안으로 안 뛰어들었겠는가. ‘한국의 과학문명도 세계에 내세울 만한 알맹이가 있음을 보여주겠노라!’ 선생은 이 일이 자신의 몫임을 직감했다.

1966년 선생은 지난 7년간 연구 성과를 묶어 <한국과학기술사>를 처음 펴냈다. <조선과학사>의 저자 홍이섭 선생은 역사학에 소양이 있는 자연과학자의 저작이 나왔으므로 “이제 나는 과학사 연구를 접어도 되겠다”고 극찬했다.

전상운 선생은 한국 전통 과학기술의 전반적인 구조와 그 내용을 철저히 분석하여 실체를 밝혔다. 그 결과 과학기술 차원에서 당시 한국 사회에 팽배한 자기비하의 엽전 의식이나 아무런 근거 없이 한국 것이 세계 최고라는 맹목적인 국수주의 극복의 길이 열렸다.

선생은 이 책을 내면서 “내 십년마다 개정판을 내리라”고 호언장담했다. 자신을 채찍질하겠다는 다짐이었는데, 설마 그 숙명이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도 이어지리라는 사실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선생은 약속대로 10년 후인 1976년에 개정판을 출간했다. 이 책은 잠깐 앞서 출간된 일어판, 그리고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출판부에서 나온 영문판의 성취를 반영해 업그레이드한 것이었다. 한국의 100대 명저 중 하나로 꼽힌다. 금속활자, 측우기, 천상열차분야지도 등 오늘날 우리들과 세계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한국 전통 과학기술의 성취에 관한 많은 지식이 이 책에 기인한다.

불행히도 이후 선생은 10년마다 개정판을 내겠다는 약속을 곧이곧대로 지키지 못했다. 암이라는 건강 문제와 대학교 총장, 이사장의 행정 업무 등이 겹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선생의 연구가 중단되지는 않았다. <한국과학사>(2000)를 펴내면서 더욱 충실하면서도 더욱 잘 읽히는 책을 내놨고, 그것의 영문판(2012)을 다시 세계에 선보였다. 마침내 2016년 크리스마스날 선생은 80대 노익장을 과시하여 자서전 <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를 세상에 선물로 내놓았다. 60년 전 자신이 말한 약속을 끝내 지킨 것이다.

“한길에 서서”는 선생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고향 원산에서 해방 직후 개명한 학교 이름이 한길중학교였는데, 그 한길이 운명처럼 선생의 일생을 이끌었다. 선생이 낸 길을 잇고 넓히는 일은 이제 후학의 몫이다. 선생의 삶은 이제 그쳤지만 선생이 남긴 학문은 길고도 길 것이다. 영면하소서!

신동원/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장, 사진 사이언스북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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