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사회의 성희롱이나 괴롭힘도 사회 문제가 되곤 한다. 이런 가운데 연구비 예산을 위탁집행 하는 준정부 기관인 미국과학재단(NSF)이 대학과 연구기관 내 성희롱이나 차별, 괴롭힘 문제에 강하게 대처하는 조처를 마련하고 나섰다. 미국과학재단은 국립보건원(NIH)와 더불어 미국 내에서 정부를 대신해 연구개발 예산을 집행하는 대표적인 기관으로, 연구비 관리 기관이 연구비 수혜 기관의 성희롱 문제에 직접 관여하고 나선 것은 처음이다.
미국 과학재단은 최근 “과학재단은 성희롱이나 어떤 형태의 괴롭힘도 용납하지 않는다”면서 연구비 지원을 받는 대학이나 기관이 이런 문제를 발견하고 조사를 진행할 때 그 내용을 연구재단에 보고하도록 의무화하는
‘중요 고지’를 웹사이트를 통해 발표했다(nsf.gov/pubs/issuances/in144.jsp). 재단은 “연구비 수혜자인 미국내 2000여 대학과 연구기관들은 제기된 문제를 충분히 조사해야 하며 미연방 차별금지법을 준수해야 하는 책임을 진다”며 이렇게 밝혔다. 이런 의무화 조처는 최근에 연구자사회의 성희롱, 성차별사례가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과학재단의 ’괴롭힘’ 대응 조처 공지. 미국과학재단 제공
과학재단이 “안전한 연구 환경”을 위해 마련한 세 가지 조처를 보면, 먼저 재단에서 연구비를 받는 대학이나 연구기관은 연구과제 책임자(PI)와 그 공동책임자를 비롯해 연구비 지원을 받는 사람과 관련되는 성희롱 또는 어떤 종류의 괴롭힘 문제가 제기됐을 때 재단에 보고해야 한다. 조사 기간에는 문제의 당사자를 직무에서 배제했는지도 보고 대상에 포함했다.
과학재단은 “연구비 지원을 받는 모든 사람의 안전성을 지키는 데 필요한 조처를 (연구재단이) 일방적으로 취할 수 있다”면서 “그런 조처에는 연구비 지원을 보류 또는 중단하거나 연구비 수혜 기관에 사람을 교체 또는 배제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포함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런 조처가 그동안 대체로 대학과 연구기관의 자율에 맡겨온 성희롱 문제 대응 방식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가 주목 받고 있다.
이와 함께 과학재단은 연구비 지원을 받는 기관에 연구실뿐 아니라 학회나 야외 조사 활동 때에 성희롱, 괴롭힘이 일어나지 않도록 명확한 행동 기준을 세우고 학생을 비롯해 연구자들이 괴롭힘 문제를 밝힐 수 있는 접근하기 쉽고 분명한 방법을 마련하도록 권고했다. 과학재단은 웹사이트에 이와 관련한 정보들을 모은 ‘
성희롱’ 웹페이지를 따로 만들어 최근 문을 열었다.
과학재단의 프란스 코르도바(France Cordova) 재단장은 기자회견에서 “괴롭힘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과학 생태계의 전체 균형을 뒤흔들고 특히 젊은 과학자들을 낙담하게 만든다”면서 “연구재단이 연구비를 받는 기관에 성희롱이나 어떤 형태의 괴롭힘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자 이런 조처를 취한다”고 밝혔다(
<사이언스> 보도). 최근 미국 과학기술계에서는
성희롱 문제가 잇따라 사회 문제로 떠올랐으며, 미국과학재단은 그동안 성희롱 문제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라는 미국 하원의 요구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과학저널 <네이처>는 연구비를 지원하는 기관이 직접 성희롱, 괴롭힘 문제에 대해 상당히 강한 대응 조처를 취하면서 이런 조처가 앞으로 연구자사회에 실질적인 영향을 줄 것이며 일부의 잘못된 문화를 바꾸는 데 도움을 되리라는 다른 연구자들의 기대를 인용해 보도했다. 하지만 성희롱이나 괴롭힘 문제로 책임연구자와 함께 지원되는 연구비가 사라질 경우에 같은 연구실 안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 활동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국연구재단 쪽은 이런 소식과 관련해 “우리나라에서는 부적절한 연구비의 관리와 사용에 대해 정부나 전문기관에 보고할 의무가 있으나, 성희롱이나 괴롭힘 문제는 이와 같은 규정이나 절차가 없다”면서 “이번 미국과학재단의 조처는 사회 문제와 관련된 상당히 강한 대응이라고 생각한다. 유례 없는 조처이고 그동안 대학 등 연구기관의 권한에 속했던 영역이기 때문에 조처의 향후 효과를 주의깊게 봐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과학재단은 몇 주 간 과학자사회의 의견을 수렴한 뒤에 새로운 조처를 시행할 예정이다.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