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투 더 본>. 극중 엘렌의 신체를 조망하는 여러 시선은 엘렌이 마주하는 다른 등장인물의 눈길이자, 엘렌이 자신을 형상화하고 있는 왜곡을 마주하기 위한 거울의 역할 또한 수행한다. 영화는 그 중 어느 하나도 답이 아니라는 것, 하지만 그 모두를 만나고 나서야 진정으로 자신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출처: IMDb
신체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은 때로 우리를 공포에 빠뜨린다. 어릴 적 교과서의 사진에 나온 보디빌더가 탄탄한 근육을 뽐낼 때, 그 박력이 아닌 그 피부의 울퉁불퉁함이 주는 알 수 없는 강렬함이 자신을 두렵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은 적이 있다. 내게도 처음 메스로 피부를 절개했을 때 본 박동 치는 혈액의 화려함은 떠올릴 때마다 소스라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산 신체의 강인함도, 죽은 신체의 냉엄함도 모두 직접 마주하기가 무척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첫 해부 실습 시간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던 포르말린 향이 코를 아리는 것 같다. 그것은 아마 처음으로 느꼈던 죽음의 냄새였을 텐데, 그것이 이토록 선명한 이유는 보존을 위해 비닐에 싸여 있던 시신들을 마주하는 공포를 완화하려는 정신적 보호막으로 작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생명과 죽음의 직접성이 서로 부딪히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 신체를 발견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
거식증(Anorexia nervosa) 환자의 신체가 바로 그곳이다.
거식증은 섭식장애(eating disorder)의 일종이다. 섭식장애는 생물학적 원인으로 발생하기도 하지만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심리적 요인으로 인한 쪽이다. 그저 먹기 싫어하는 것일 뿐 질병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 같지만, 치료가 상당히 힘들며 결국 사망에 이르기도 하는 심각한 질병이다.
미용을 처음에 목적으로 두는 일도 있지만, 어떤 이유든 간에 체중 증가에 대한 공포심이 다른 욕구를 압도하게 되면 섭식장애로 이어진다. 이때 섭식 통제에 성공하면 거식증,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결국 음식을 먹지만 구토하여 섭식 통제에 실패했다는 것을 부인하는 일을 반복하면 폭식증(Bullimia nervosa)으로 분류한다. 두 진단 모두, 그 근저에 환자 자신의 체중이나 체형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도사리고 있다.
거식증 환자가 겪는 고통과 치료를 위한 노력
거식증 환자의 체중 증가에 대한 절대적인 공포심은 극단적인 식사 거부로 이어지며, 그 결과 이들의 신체는 기아 상태에 빠진다. 체지방이 모두 사용되고 나면 몸은 근육과 장기를 분해하기 시작한다. 소위 “피골이 상접”한 그 몸, 겉에서도 안쪽의 뼈가 비쳐 보이는 것 같은 팔다리와 움푹한 볼로 도드라져 보이는 눈은 삶과 죽음이 다투고 있는 그의 마음속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문제는 이를 치료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데에 있다. 뇌 섬엽(insula)의 기능적 이상에서 식욕부진의 원인을, 선조외 신체영역(extrastriate body area)에서 체형 이상 평가의 원인을 찾는 등 뇌과학적 접근이 이뤄지고는 있으나 아직 명확한 원인 규명과 치료는 부지하세월이다.[1]
일반적으로는 외래에서 행동 조절과 동반된 정서적 문제 치료를 위한 상담 등을 지속해 나가지만, 심한 저체중이나 내과적 합병증이 심한 경우, 다른 정신과적 문제를 같이 보이는 경우에는, 입원 치료를 하기도 한다. 식사를 거부하는 것이 현재 문제를 일으키는 주원인이지만 섭식 거부를 일으키는 원인이 별도로 존재하기 때문에, 환자의 정서적 고통을 이해하고 동반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접근이 요청된다.[2] 약이 없기도 하지만, 심한 저체중이면 다른 약을 쓰기도 어려운 상태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벼운 경우라면 다행이지만, 심한 경우 치료는 매우 오랜 시간이 필요하거나 결국 치료에 실패하기도 한다.
마티 녹슨이 감독, 각본을 맡아 2017년 방영한 영화 <투 더 본>에서는 <블라인드 사이드>에서 열연을 펼친 릴리 콜린스와 <스피드>, <매트릭스> 등으로 유명한 키아누 리브스가 환자와 의사로 만난다.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엘렌은 베컴 선생이 운영하는 섭식장애 환자들을 위한 별도의 요양소에서 다른 섭식장애 환자들을 만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출처: IMDb
작년에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한 영화 <투 더 본(To The Bone)>은 거식증 환자가 겪는 고통과 치료를 위한 노력을 오롯이 보여준다. 심한 거식증으로 몇 번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별 차도가 없는 엘렌(릴리 콜린스 분)은 이혼 후 각각 재혼한 부모 사이를 오가며 살고 있다. 아버지는 일을 이유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 대신 아버지 쪽 가정에서 엘렌을 돌보는 것은 새어머니와 그 딸이다.최근 엘렌의 상태는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데, 그 이유는 엘렌이 지속해서 인터넷에 올리던 그림을 보고 자극을 받아 한 소녀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더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새어머니는 엘렌과 함께 섭식장애 치료로 유명한 베컴 선생(키아누 리브스 분)을 만나러 가고, 그는 엘렌에게 조금 다른 형태의 치료 방식을 권한다. 그것은 자신이 운영하는 치료소에서 같은 섭식장애 환자들과 공동생활을 하는 것.
엘렌은 그곳에서 무용수였지만 무릎 부상 후 심각한 거식증에 시달렸던 루크(알렉스 샤프 분), 마찬가지로 거식증이지만 임신 사실을 알고 이겨내려는 메건(레슬리 빕 분) 등을 만난다. 베컴 선생은 엘렌을 위한 첫 가족 집단 요법을 연다. 아버지는 역시나 일을 이유로 부재 상태고, 새어머니와 의붓 자매, 레즈비언 커플이 된 엄마와 그 상대자가 모임에 참석한다. 엘렌을 둘러싸고 서로를 비난하던 모임은 결국 파국을 맞고, 상심해 있는 엘렌에게 조심스레 루크가 다가온다. 서로의 상처가 엘렌과 루크 사이의 관계를 진전시킨다. 엘렌은 베컴 선생의 권유로 이름을 일라이로 바꾸며 과거를 극복하려 한다. 메건의 아이가 조금씩 자라면서 치료소는 축하 파티를 벌이는 등 모두 다 점차 나아지는 것 같지만, 그날 밤 메건이 유산하면서 상황은 오히려 덧난다.
이후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 영화는 엘렌의 극복과 성장을 다룬다. 극복이라는 과거가 성장이라는 미래와 만날 때, 엘렌은 치료를 향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카메라가 엘렌의 신체를 비추는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카메라가 엘렌의 신체를 시선의 대상으로 조망하는 것은 모두 네 번이다. 카메라는 당연히 인물과 사물을 비추지만, 그것은 보통 서사 구조를 진행하기 위한 인물과 배경의 배치이다. 반면, 여기에서 말하는 신체를 조망함이란 카메라의 시선이 이야기하는 것을 잠깐 중지하고 대신 특정 대상을 비추는 방식 자체만으로 어떤 내용이나 생각의 틀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전자가 소설 읽기라면, 후자는 인물화나 정물화 감상에 비유할 수 있을까.
카메라의 네 시선과 신체를 바라보는 관점들?
네 시선은 이렇게 배치된다. 처음 새어머니가 엘렌의 몸 상태를 걱정하면서 함께 체중을 재고 엘렌의 삐쩍 마른 몸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줄 때, 베컴 선생에게 진료를 받을 때, 치료소에서 체중을 재면서, 그리고 영화 말미에서 환상에 빠진 엘렌이 자신의 몸을 바라볼 때, 각각 카메라는 엘렌이 대하고 있는 다른 등장인물이 엘렌의 신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전달하려고 한다.
먼저 새어머니가 엘렌을 화장실에 데려가 억지로 체중을 재는 장면부터 보자. 카메라는 엘렌의 몸을 45도 옆에서 미디엄 쇼트(인물을 무릎 위까지 촬영하는 것)로 비춘다. 이것은 카메라, 그리고 우리가 사람을 바라보는 가장 일반적인 시선이기에 사람들이 타인의 신체를 평가하는 시선이기도 하지만, 새어머니가 엘렌에 대해 품고 있는 걱정스러움을 가득 담은 눈길이기도 하다. 엘렌은 영화에서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새어머니에 확장하며 이를 부정한다.
다음, 베컴 선생이 엘렌을 진료하는 장면을 보자. 여기에서 카메라는 등을 클로즈업 하고 있다. 이것은 의학이 신체 각부의 특징에 집중하는 시선을 표현한다. 의학적 시선은 신체의 세밀한 특징과 증상에 초점을 맞춰 질병을 진단하려 한다. 환자의 개별적 경험을 의료의 보편적 틀에 맞추어 정의할 때, 의학은 치료의 방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엘렌은 처음에 이 시선에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베컴 선생이 치료법을 제시하자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따르고, 과거를 극복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선생이 새로운 이름을 지어줄 때 기꺼이 이를 수용하는 것이 그 예이다. 하지만, 메건의 유산이 모두에게 큰 심적 부담을 안길 때, 엘렌은 베컴 선생을 부정한다.
한편 치료소에서 체중을 재는 장면은 돌봄의 시선을 보여준다. 체중계 너머 엘렌을 비추는 버스트 쇼트(인물의 얼굴과 가슴까지 촬영하는 것)와 삐쩍 마른 상반신과 하반신 일부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컷을 연결하면서, 카메라는 치료소에서 함께 지내는 동료와 간호사가 엘렌에게 비추는 관심과 보살핌의 시선을 형상화한다. 그것은 앞의 두 시선과 달리 규정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신체의 궁핍을 지각하고 손을 내민다. 그러나 이 돌봄의 시선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선을 넘지 않으려 하기에, 당장 위안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사태를 변화시키기는 어렵다.
이 모두를 통과하고 나서야 엘렌은 자신의 신체를 왜곡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 어느 하나의 시선만으로 엘렌이라는 “전부”를 조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돌봄의 시선, 치료의 시선, 평가의 시선에는 모두 각각이 지닌 장단점이 섞여 있다. 하지만 이런 시선 각각을 모두 마주하고 화해했을 때 비로소 엘렌에게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기회가 주어진다.
가로지르기를 통해 전체를 조망하기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공적인 삶 전반에 걸쳐 학자와 대중을 대상으로 강연을 계속 해왔다. 비록 그가 쓴 책은 <에크리> 한 권 뿐이지만, 그의 후계자인 자크 알랭-밀레가 정리하여 발표한 세미나 노트는 그 사상의 내용과 변천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그중 5권인 <정신분석의 윤리>는 크게 두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정신분석을 통한 윤리로, 정신분석의 통찰이 기존의 윤리학에 던지는 도전을 담고 있다. 다른 하나는 정신분석이 지녀야 할 윤리로, 윤리적인 정신분석치료란 무엇인지를 다룬다. 전자는 “욕망의 윤리학”으로, 후자는 “환상 가로지르기”로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욕망의 윤리학이란, 욕망이 윤리의 근거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윤리 형이상학 정초>와 <실천이성비판>으로 근대 윤리학을 세운 칸트는 윤리의 근거로 행복을 배제하고 대신 자율을 통한 의지의 실현을 내세웠다. 칸트에게 윤리적 행동이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개인이 이성이 수립한 보편적 의무를 따라 행동할 때 나타난다. 반면 행복은 우연적이기 때문에, 보편적 의무 수립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라캉은 칸트가 절반만 맞는다고 생각했다. 즉, 어떤 원리를 따라 행동하는 것이 윤리적 행동이라고 본 것은 옳지만 의무를 정하는 것은 이성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격이 지, 정, 의(知, 情, 意)로 구성된다면, 지성이 수립한 법칙을 의지하는 것만 윤리라고 말하는 것은 편협하다. 물론 라캉은 공리주의의 행복론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념(그리고 그 근거가 되는 욕망)이 수립한 법칙을 의지하는 것 또한 윤리라고 말할 때 우리는 온전한 윤리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라캉이 말한 욕망의 윤리학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온전히 마주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 라캉의 표현을 따르자면 “주이상스(jouissance)를 향유하는 것” 또한 윤리적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환상 가로지르기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정신분석가가 어떠한 답을 정해놓고 환자를 그쪽으로 유도하는 것은 윤리적인 치료가 아니다. 특정 사회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어떤 태도를 향하여 정신분석가와 환자가 같이 나아가는 것도 윤리적인 치료라고 할 수 없다. 윤리적인 치료란, 환자가 자신의 환상도, 사회가 만들어 낸 환상도 모두 환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 다음에야 환자는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고 자신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해 나갈 수 있다. 이 여정을 함께 걸어 나가는 것이 윤리적인 정신분석치료이다.
<투 더 본>이 제시한 카메라 시선의 여정을 라캉의 주장에 비겨 다시 생각한다. 엘렌이 진정으로 치료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선 하나의 시선을 마주하거나 내면화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영화가 엘렌의 그림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한, 엘렌이 자신의 신체를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은 다른 카메라의 시선과 부닥쳐야 하지만, 각각의 시선이 정답인 것도 아니다. 평가하고 걱정하는 사회의 시선, 진료하고 정의하는 의학적 시선, 북돋지만 거리를 유지하는 돌봄의 시선 그 어느 하나를 내면화한다고 하여 엘렌이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모두를 거치고 그 결핍을 이해할 때만, 이 모든 “환상을 횡단”할 때만 엘렌은 자신과 직접 마주할 수 있다. 그것이 치료의 윤리라고 감히 말해본다.
건강과 회복을 둘러싼 여러 담론의 경쟁을 바라본다. 모두 자신이 바르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것은 옳기도 그르기도 하다. 원효 대사가 “개시개비(皆是皆非)”라고 말한 것처럼, 어느 한쪽의 목소리가 세상을 다 담아내지 못하며 어느 하나의 시선이 세상을 다 비추지도 못한다. 예컨대 현대 의학과 대체 의학이 서로를 놓고 벌이는 싸움 같은 것. 현대 의학이 다 담아내지 못하는 우리 삶의 복잡다단함을 이유로 대체 의학은 현대 의학을 부정하려 한다. 하지만, 대체 의학이라고 정답은 아니다. 현대 의학의 정교한 생물학적 모형에 더하여 다른 여러 목소리를 함께 듣고 환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길을 함께 찾아 나가는 것이 의료윤리가, 그리고 우리의 “의료”가 마주한 현재의 과제이리라.[3]
[참고문헌]
[1] 최강. 살 빼기를 권하는 사회, 거식증의 정신의학. 한겨레 사이언스온. 2013년 8월13일. http://scienceon.hani.co.kr/116417
[2] 허찬희. 거식증 치료, 가족이 함께하면 좋아요. 한겨레. 2012년 3월12일. https://www.hani.co.kr/arti/society/health/523139.html
[3] 최근 의료윤리의 화두인 공유 의사결정(shared decision making)이나 임상 윤리 중재(clinical mediation)가 임상에서 이를 끌어안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다. 이론적으로는 결의론(casuistry)과 서사윤리(narrative ethics)가 이를 뒷받침한다. 예컨대, 임상에서 가치의 충돌을 놓고 한쪽 편을 드는 것이 아닌, 양편의 가치를 끌어내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 임상 윤리의 목적임을 주장하며 중재를 논증하는 다음 논문을 참고하라. Fiester A. Weaponizing principles: clinical ethics consultation & the plight of the morally vulnerable.
Bioethics. 2015;29(5): 309-315.
김준혁/치과의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대학원생(의료윤리학)
junhewk.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