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8일은 대한민국 최초 우주인이 우주로 날아 오른 지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한국 우주인 배출사업(이하 우주인 사업)의 10주년을 맞아 여러 가지 행사가 열리고 있다. 지난 7~8일 국립과천과학관에서 열린 “어서 와 우주는 처음이지”라는 이소연 박사의 대중강연과 사인회는 일찌감치 접수가 마감되었으며, “라이프 인 스페이스(Life in Space)”라는 토크 콘서트 또한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우주인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여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가 과학잡지 <에피(Epi)>와 한 인터뷰나 다른 기사에는 여전히 수많은 비난과 비판의 반응들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2006년 우주인 사업 선발 공고가 나자 우리나라는 우주인에 열광했다. 3만 6000명이 넘는 사람이 우주인을 꿈꾸며 지원했고, 2006년 크리스마스에 고산씨와 이소연 박사가 최종 후보로 뽑힐 때까지의 과정을 전국민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2008년 4월 8일 이소연 박사가 러시아 우주선 소유즈(Soyuz TMA-12)를 타고 우주로 향하던 순간 많은 국민이 서울광장에서, 그리고 TV를 통해 그 도전을 함께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에서 우주인이란 무엇인가? 사실 우주인 사업에 관한 논란은 여러가지 복합적인 문제가 얽혀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미 많은 이야기를 해왔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같은 이야기를 다시 다루기보다는 한 사회가 우주인에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어떻게 구성되고, 또 그런 이미지들이 우주인 사업과 어떻게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우주인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우주인이라는 한 단어로 부르고 있지만, 사실 우주인을 지칭하는 단어는 두 종류가 있다. 미국의 우주인을 부르는 말인 ‘애스트러놋(Astronaut)’과 러시아의 우주인을 부르는 말인 ‘코스모놋(Cosmonaut)’이다.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러시아와 미국이 별도로 우주 사업을 계획하고 추진해왔기 때문에 나라마다 우주인은 조금씩 다르게 규정되고 받아들여졌다.
인류 첫 우주인을 배출한 러시아의 경우에 우주인은 신 소련인의 상징이었고, 공산주의 체제의 뛰어남을 보여주는 존재였지만, 동시에 우주선으로 대표되는 소련의 뛰어난 과학기술 시스템의 가장 약한 연결고리이기도 했다. 소련의 과학기술의 뛰어남을 보이기 위하여 소련의 과학자들은 완전 자동화를 기반으로 우주선을 설계했고, 자연스레 우주인의 역할은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의 실수나 잘못된 행동을 통한 문제를 줄이기 위해 우주인의 역할을 최소화했던 것이다. 인류 첫 우주인인 유리 가가린의 행동지침을 “아무것도 만지지 마라!(Do not touch anything!)”는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는 농담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소련 우주인의 선발 기준은 이미 만들어진 우주선에 맞춘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우주인에 전문성을 크게 요구하지 않았다. 전투기 조종사들 중에서 선발하기는 했지만, 풍부한 비행 경험이나 긴 비행 시간 등이 요구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혹자는 초기 소련의 우주인들은 우주선을 비행했다기보다는 우주선 안에 있었다라는 말이 더 맞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러시아에서의 우주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더 수동적이고, 적은 역할을 감당했다.[1]
미국은 다른 관점에서 우주인에 접근했다. 미국에서의 우주인은 미국을 이상향으로 데리고 갈 현명한 리더이고, 국가적 영웅이었다. 러시아와 달리 우주인을 우주 시스템의 한 부품이 아닌, 우주 프로그램의 중요한 자산으로 여겼고 그렇기 때문에 우주인 선발에도 개인의 능력이 더욱 중요시되었다. 전투기 조종사들 중에서도 충분한 비행 경험과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발 되었으며, 특히 과학기술 분야의 학위나 전문성을 가진, 위험한 상황에서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게 높은 점수를 주었다.
또한, 이렇게 개인의 능력을 많이 고려한 만큼 훨씬 많은 자율이 주어졌다. 미국의 우주인들은 우주선의 디자인부터 우주인 구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영향력을 미쳤다. 우주 비행에서도 우주인들이 컨트롤 할 수 있는 부분들이 훨씬 많았다. 미국정부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이용하여 우주인을 영웅이자 해결사로 묘사했고, 이러한 이미지는 미국사회에서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졌다.[2]
우리사회에서 우주인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우리나라에서는 우주인이란 어떻게 정의되었는가? 우리나라에서 우주인이라는 단어는 여러 용도로 사용되어왔다. 애스트러놋을 뜻하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지만 외계인을 뜻하기도 했다. 1954년 신문을 찾아보면 다수의 매체에서 우주인과의 회견기라는 제목으로 외계인과의 만남을 묘사한 책을 소개하고 있으며 무려 “선풍적 대인기로 초판매진”이라고 광고하고 있다.[3] 외계인의 의미로 우주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던 신문은 1958년이 되어서야 “멀지않은 장래에 있어서 ‘대기권’ 외부로 여행을 할 ‘우주인’” 이라는 표현을 통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우주에 간 “지구인”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게 된다.[4] 이후로 우리나라에서는 신문과 대한뉴스 등의 방법을 통하여 유리 가가린의 인류 첫 우주비행과 미국의 머큐리 프로젝트 등을 꾸준하게 대중들에게 알려왔다.
우리가 우주인을 접할 수 있던 또 다른 방법은 대중문화를 통해서였다. 1998년에 개봉했던 영화 <아마겟돈(Armageddon)>의 해리 스탬퍼(Harry S. Stamper)를 기억하는가? 에스에프(SF) 장르의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서울에서만 100만 명이 넘는 관중을 모았던 <아마겟돈>은 <그래비티 (Gravity)>와 <마션(The Martian)>이 개봉되기 전까지 가장 대표적인 우주 영화였다.
소행성이 지구로 돌진해 인류가 멸망을 앞둔 그 위기 속에서 해리 스탬퍼는 다른 우주인들과 함께 인류를 구하기 위해 우주로 향하고, 예기치 못한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며, 마지막엔 결국 자신을 희생해서 소행성을 폭파하고, 동료들과 인류를 구한다.[5] 전형적인 해결사 또는 영웅의 이미지이다. 우리나라에서 크게 성공을 한 또 다른 SF영화인 <딥 임팩트(Deep Impact)>도 마찬가지다. 영화들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진 우주인은 거의 언제나 큰 문제를 만났을 때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서 문제를 해결하며,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자신을 희생하면서 다른 이들을 구해냈다.
2013년과 2015년에도 비슷하게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능동적으로 자신의 전문성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우주인이 등장하는 영화 <그래비티>와 <마션>이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는 것을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주인의 이미지는 우주인 사업 이전과 이후에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6]
또 한 가지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우리가 우주인에 대해 접해온 영화들은 대부분 미국 영화들이었다는 것이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1917년에서 2017년 사이에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미국 SF 영화는 909건이었으나, 러시아 영화는 9건에 그쳤다. 처음 개봉된 시기 또한 미국의 경우 1931년이었으나, 러시아 SF 영화는 2009년에 와서야 처음 한국에서 개봉되었고, 우주에 관련된 영화는 2017년에 개봉한 <어트랙션(Attraction)>이라는 영화가 처음이었다.[7] 즉, 우리가 지금까지 접해오고, 익숙해져 있는 우주인은 코스모놋이 아닌 애스트러놋의 모습만이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국 우주인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렇다면 우주인 사업에서 한국 우주인이란 어떤 사람이었는가? 우주인 사업을 기획한 과학기술부(과기부)에서는 이 사업을 과학문화 사업으로 규정했다. 우주인 사업이 최초로 제안되었던 2004년 초의 과기부 연두보고를 살펴보면 우주인 사업은 “국민과 함께 우주에의 꿈을”이라는 소제목을 가지고 사이언스 코리아 국민운동의 일환으로 제안되었다. 이 때 정해져 있던 것은 우주인을 여러 단계의 예선을 걸쳐서 선발하며 각각의 선발 과정에서 과학기술 관련 이벤트를 개최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선발과정부터 우주 비행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방송하여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의 지식과 친화력을 높이고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는 사회적 분위기 진작”을 사업의 목표로 뽑고 있다.[8]
우주에 올라가서 우주 실험을 진행한다는 것은 계획되어 있었지만, 대중과학문화 사업으로 우주선 안에서의 과학 실험 등을 수시로 대중에게 방송한다는 것 외에는 정해진 것이 없었다. 이 것은 당시의 큰 이슈였던 이공계 기피 현상과 맞물려서 과학기술적 사회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좋은 방법으로 여겨졌다. 그랬기에 사업의 목적은 국민들을 과학기술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었고, 우주인이란 대중의 한 사람으로 국민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과 과학기술에 대한 열망을 갖게 할 과학기술 홍보대사와 같은 것이었다.
이를 위해 당시 과기부에서는 다른 나라들이 최초 우주인을 선발할 때와 달리 대국민 공모를 통해서 우주인 후보를 선발했다. 당시의 주된 홍보 문구는 “당신이 바로 대한민국의 최초 우주인입니다.”와 “우주는 더 이상 꿈이 아닙니다”였다. 이러한 문구는 특별한 사람이 아닌 우리 국민 누구나가 우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대중의 관심을 모으고자 하였다. 기본적인 신체조건만 만족한다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었기에 3만 6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지원했고, 선발의 과정들이 모두 대중매체를 통해 대중들에게 공개되면서 우주인 선발 과정은 국가적인 축제에 가까운 반응을 얻었다.
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이 주관기관으로 선정된 후에는 우주인 사업이 강조하는 점에 조금 변화가 있었다. 우주인 사업을 통하여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고 이공계 기피와 같은 분위기를 타파하자는 것은 예전과 마찬가지였지만, 과학계의 영웅 또는 역할 모델로의 우주인이었기에, 우주인의 과학적 전문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우주인 사업을 연구사업으로 규정하며, 우주인 또한 과학자 또는 연구자,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우주 전문가의 이미지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우주인 사업은 과학문화 사업이기보다는 유인 우주 기술을 얻을 수 있는 연구 사업이 되었다.
한국 최초 우주인의 임무는 유인 우주 기술 습득과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와 인식 재고, 대한 민국의 우주 과학기술 경쟁력 강화였고,[9] 실제로도 이소연 박사와 고산씨는 러시아의 가가린 우주센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훈련을 마치며 우주인 훈련 프로그램을 경험했다.
2008년 국제우주정거장(ISS)에 탑승한 한국 첫 우주인 이소연씨가 초파리의 중력반응 실험 등을 위해 우주정거장 실험모듈에서 이동하는 모습. 교육과학기술부 제공
특히 이소연 박사는 실제 우주로 가는 과정을 경험하고, 국제우주정거장에서 18가지의 과학실험을 모두 무사히 해내면서 우리나라는 우주인 선발에 대한 경험과 우주에서만 얻을 수 있는 미세중력에 관한 과학적 지식들을 축적했다. 이소연 박사는 우리나라 유일의 우주인이자 우주 전문가가 되었다. 과기부가 처음 기획할 때부터 마지막 우주비행까지 모든 과정은 러시아와의 국제협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한국 첫 우주인인 이소연 박사는 미국 우주인인 애스트러놋보다는 러시아의 우주인인 코스모놋에 더 가까운 우주인이 되었다.
이렇게 과기부와 항우연은 각각 한국 우주인을 과학문화 홍보대사와 우주 전문가로 규정했으며, 각각 이미지에 요구되는 역할 또한 모두 수행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빠짐없이 TV 방송과 대중 매체들을 통하여 대중들에게 전달되어왔다. 미국식의 능동적이고 해결사 같은 우주인에 익숙해져 있던 우리들은 우주인 사업과 이소연 박사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의 협력을 통한 한국 우주인을 우리의 우주인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의 우주인은 과학홍보대사의 모습으로도, 우주 전문가의 모습으로도,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던 우주인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합의
여기서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자. 우리가 생각하는 우주인이란 무엇인가? 복잡한 우주시스템의 한 부분? 국가적 영웅이자 해결사? 과학홍보대사? 아니면 우주전문가? 지금 머리속에 떠오른 그 생각을 주변 사람과 한번 이야기해보자. 당신의 옆 사람이 생각하는 우주인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우주인이라는 단어는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채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만약에 과기부, 항우연, 그리고 우리 국민들 모두를 포함한 우리가 생각하는 우주인이 같은 의미였다면 어땠을까? 우리 사회가 우리나라 최초 우주인에 대해 모두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면 우주인 배출사업과 우주인 이소연 박사의 의미는 지금과는 좀 다르지 않았을까?
분명, 과기부, 항우연, 우주인 이소연 박사와 대중들까지, 모두 열심히 한국 최초 우주인 배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공을 들였다. 하지만 서로가 생각하는 우주인의 모습이 서로 같지 않았고, 우리가 만들려는 우주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가 사회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주인 사업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는 사회 구성원들이 우리 사회가 하려는 것은 무엇이고, 또 그것은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할 때에 가능하다. 우주인에 대한 합의된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어떠한 사업이나 대상에 대하여 우리 사회가 그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공유하지 못할 때, 우리가 그것에 대해 들인 노력들은 한 방향으로 차곡차곡 쌓이지 못하고 이리저리 표류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과학기술을 쌓아왔다. 이제는 이에 더하여 이러한 논의를 통해 과학기술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를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과학기술 사업들이 진행될 때 우리는 과학기술과 사회가 우리 사회 안에서 함께 가는 미래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1] Slava Gerovitch, "Stalin's Rocket Designers' Leap into Space: The Technical Intelligentsia Faces the Thaw," Osiris 23, no. 1 (2008).
[2] Matthew H. Hersch, Inventing the American Astronaut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2).
[3] 나절로, “우주인과의 회견기” 동아일보 1954.11.14., ; “선풍적대인기로 초판매진” 동아일보 1954, 10.21.; “신서” 경향일보 1954.11.077.
[4] “창안된 우주비행복” 동아일보 1958.10.17
[5] 아마겟돈, 마이클 베이 감독 (1998, 미국: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모션 픽처스); 딥 임팩트, 미미 레더 감독 (1998, 미국: 파라마운트 픽처스); 아마겟돈과 딥 임팩트는 각각 서울에서만 1,170,225명과 637,387명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6] 그래비티, 알폰소 쿠아론 감독 (2013, 미국, 영국: 워너브라더스); 마션, 리들리 스콧 감독(2015, 미국: 20세기 폭스사)
[7] “영화정보” http://www.kobis.or.kr/kobis/business/mast/mvie/searchMovieList.do 영화진흥위원회 (Access on October 4, 2017)
[8] 과학기술부. ‘2004년 연두보고’ 2004. 1.30.
[9] KARI, 한국 우주인 배출사업 백서 ((주) 샘터사, 2009).
정승미 /미국 버지니아텍 과학기술학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