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박테리아 같은, 틈새를 통과하는 로봇 군집체. 작은 점 같은 형상이 개별 로봇들이다. 출처 https://physics.aps.org/articles/v11/45
군집을 이룬 박테리아나 철새, 개미 등에서는 개체 하나에서는 볼 수 없던 군집행동의 속성이 나타난다. 이런 생물체의 군집행동 속성을 흉내 내어 로봇에 구현한 것이 군집로봇이다. 군집로봇의 개념에 보면, 명령과 제어를 받으며 많은 수의 개별 로봇들이 저마다 다른 역할을 수행하며 움직이는데 그럼으로써 로봇 군집체 자체가 특정한 목표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지난 겨울올림픽의 개막식 때에 평창의 밤하늘을 수놓은
1218대 드론의 군무는 일종의 군집로봇이다.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재난 지역에 작은 로봇들을 들여보내 재난 상황을 살피고 재난 지도를 작성하게 하려는
군집로봇 연구도 있었다.
명령이나 제어를 받지 않은 채 저 혼자서 무작위로 움직이는 로봇들도 군집행동을 할 수 있을까? 배터리만으로 작동하는 무작위 운동 로봇들을 울타리 안에 두어 무작위 운동을 하게 하면?
고정된 원형 울타리 안에서 빠르게 운동하는 로봇들. 일부는 자유 운동을 하고 일부는 울타리 경계에 몰려 정렬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출처 https://physics.aps.org/articles/v11/45
그렇게 해보았더니 로봇들에선 무작위 운동도 나타났지만 일부는 울타리의 경계 쪽에 몰리면서 정렬 상태를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태에서 무작위 군집로봇들은 그 울타리를 한쪽 방향으로 움직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로봇과 울타리의 군집체가 한 몸인 듯이 움직였다.
최근 프랑스 보르도대학 소속 연구진은 아무런 제어 장치 없이 배터리만 달고서 진동하며 이리저리 빠르게 움직이는 벌레 닮은 작은 로봇들을 울타리 안에 두고서 무작위 운동의 군집행동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관찰하고 시뮬레이션으로 분석해, 그 결과를
물리학술지 <피지컬 리뷰 레터스>에 발표했다. 2차원 평면에 구현된 울타리는 고무줄처럼 휘어지고 밀면 움직일 수도 있게 했다.
울타리 안에 일정한 밀집도보다 적은 수의 로봇들을 넣을 때에 로봇들은 대체로 무작위 운동 상태만을 지속했다. 그러나 일정 수 이상의 밀집도를 이루자 로봇들 중 일부는 무작위 운동 상태에 있고 일부는 울타리 경계 쪽에 몰려 서로 부딪히다가 정렬하는 상태를 이루는 현상을 나타냈다. 연구진은 “울타리 안의 로봇들은 기체와 같은 자유운동 상태와 경계를 따라 무리를 이루는 정렬 상태라는 두 가지 상태로 나뉘었으며, 개별 로봇은 이런 두 가지 상태를 지속적으로 오가며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움직일 수 있는 울타리에서, 로봇들의 두 가지 상태는 울타리를 한쪽으로 밀어 움직이게 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경계선 한쪽에서 로봇 일부가 무리를 이루며 정렬할 때 한쪽 방향으로 울타리를 밀어내는 힘이 생기면서 울타리 자체가 서서히 움직였다.
틈을 통과하는 로봇 군집체. 작은 점들이 개별 로봇들이다. 울타리 안에서 점점 더 많은 로봇들이 울타리 경계 쪽에 몰리면서 울타리 자체가 한쪽 방향으로 움직이며 틈을 통과한다. 동영상 갈무리. 출처(동영상) https://physics.aps.org/articles/v11/45
연구진이
공개한 동영상을 보면, 울타리 안에서 로봇들은 분주하게 자유운동 상태와 무리 정렬 상태를 오가면서 울타리를 일정한 방향으로 밀어냈으며 울타리는 흡사 살아 있는 생물체와 같은 모습으로 움직였다. 실험에서 무작위 군집 로봇들과 울타리는 좁은 틈새를 통과했으며 장애물을 휘돌아 지나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울타리 안의 개별 로봇들은 분주하게 두 상태를 오가며 운동했다. 군집로봇 실험 동영상은
미국물리학회의 온라인매체 <피직스(Physics)>에서 볼 수 있다.
실제 환경인 3차원 공간이 아니라 매끄러운 2차원 평면에서 이루어진 이번 실험결과가 곧바로 어떤 쓰임새로 응용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렇더라도 제어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무작위 운동 로봇들이 일정한 수와 일정한 울타리를 갖출 때에 독특한 군집행동의 속성을 나타낸다는 점은 흥미롭게 받아들여진다. 또 당장 어떤 연구에 응용되기 어렵더라도 독특한 군집행동의 속성을 이해하게 된다면 새로운 쓰임새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연구진은 논문에서 “울타리의 유연성 덕분에 마치 생물체와 같은 큰 형태 변화가 생겨나고 그래서 군집체가 틈새와 장애물을 통과할 수 있었다”면서 앞으로 이런 군집행동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속성을 제어할 수 있다면 소프트로봇 개발이나 다른 쓰임새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