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번역 출간된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 표지(일부).
오랜 격언에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라는 말이 있다. 공자를 계승해 유가를 확립한 맹자의 사단(四端) 중 측은지심(惻隱之心,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이나, 현대 심리학의 공감(empathy, 대상의 감정에 이입하여 함께 느끼는 것) 개념을 잘 풀어낸 구어체 표현일 것이다. 요새 유행하는 “기쁨은 나누면 질투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약점이 된다”라는 자조 섞인 표현을 떠올리면 옛 표현이 지녔던 긍지가 괜스레 아쉽다. 내 기쁨도, 내 슬픔도 나눌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과 상대방이 그것을 받아주리라는 신뢰가 그 속에 녹아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당연하면서도 이상한’ 질문을 했다
아픔은 우리를 사로잡고, 인생은 아픔으로 설명됨에도
작품에선 왜 사랑과 질투가 질병과 아픔을 압도하는가
언어는 질병을 표현할 수 없다고, 공감은 환상일 뿐이라고
의료를 생각한다면 관심이 가는 부분은 기쁨보다는 아무래도 슬픔, 그리고 아픔이다. 병원이라는 곳이 원체 아파서 찾아오는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픔을 나누고 그것을 극복하려 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다만 궁금해지는 때가 있다. 과연 내 아픔을 나눌 수 있을까? 아픔에 도달하게 된 경위를 설명할 수는 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사이리라. 이런저런 이야기 구조 속에 거주하는 등장인물을 통해 나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 하지만 이런 주장이 성립하려면 상대방이 나와 같은 상황에 부닥쳤을 때 같은 감정적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뇌과학은 마카크원숭이의 뇌에서 발견한 ‘거울 뉴런(신경세포)’을 내세워 공감의 가능성을 주장한다. 심지어 인간 문명의 시작을 거울 뉴런에서 찾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거울 뉴런이 있는지에 관한 탐구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또한 밝혀지지도 않았다.[1] 보수적으로 접근하자면, 공감의 확실한 통로는 이야기와 같은 음성 언어, 그리고 표정과 같은 신체 언어라고 말해야 한다. 문제는, 신체 언어는 아픔을 전달하기에는 너무 무디며, 음성 언어는 아픔을 도대체 표현할 수 있는지도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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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환이 우리의 언어를 침묵시키는 것에 관하여
<자기만의 방>, <등대로>, <3기니> 등 이제 고전의 반열에 들어선 저서를 여럿 남긴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가 쓴 <아프다는 것>이라는 수필집이 있다. 그는 독자들에게 어쩌면 당연하면서도 이상한 질문을 하나 던진다. 아픔은 우리를 늘 사로잡고 있으며, 인생사는 그것을 떠나서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아픔을, 질병을 주제로 한 문학 작품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가? 왜 질병 이야기는 사랑, 전쟁, 질투 이야기를 대체하지 못하는가?
수필집 <아프다는 것>에서 그 자신 소설가인 울프는 언어가 아픔을 표현하는 데 실패한다고 본다. 시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시가 언어를 정련하기 때문이 아니라 시는 가끔 언어를 넘어 표현 불가능한 영역을 담아내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질환에 걸리는 일은 위대한 작품들을 직접 마주하는 것, 모든 해석과 고찰이 사라진 와중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머리를 울려대는 일과 같다. 출처: 아마존
울프는 말한다. 언어는 질병 경험을 표현할 수 없다고. 우리의 이야기는 아픔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아픔은 우리를 수다스럽게 만들지만, 그것은 그저 아이들의 재잘거림일 뿐이다. 그는 심지어 공감은 환상일 뿐이라고도 말한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우리는 고통을 느낄 때 앓는 소리를 낸다. 이 앓는 소리는 언어인가? 언어라면 그 표현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가? 나의 앓는 소리와 너의 앓는 소리는 같은 의미인가? 또, 자녀가 아플 때 부모는 자녀의 고통을 똑같이, 아니 비슷하게라도 느낄 수 있는가? 거꾸로 부모가 아플 때 장성한 자녀는 어떤가? 보통, 몇 발자국 떨어져 있지 않은 우리의 신체는 바로 앞의 신체의 격랑에 반응하지 못한다.
이 아픔의 공약 불가능성, 또는 소통 불가능성 때문에 좌절했던 기억이 있다. 의료윤리와 의료인문학이라는 분야의 근저에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주체의 반응이 놓여 있다. 대표적으로 의료윤리라는 분야를 세상에 낳은 존엄사 논쟁을 생각해 보자.
존엄사를 찬성하는 측의 가장 강력한 논거 중 하나가 고통이다. 누군가 끝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 고통을 없앨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윤리적이다. 말기 환자의 고통은 생을 마감하는 것 외에 다른 방식으로 끝낼 수 없다. 따라서, 말기 환자가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윤리적이다.
위의 단순한 논증은 그 자체로는 반박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지닌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 고통을 없애도록 도와준다고 말하는 것은 내 마음을 편하게 하려는 수단, 또는 잘해봐야 위선 아닌가? 또, 의료인문학이 내세웠던 기치, 즉 현대 의학의 비인간화에 저항하여 의학을 인간화하겠다라는 선언은 고통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서로를 위한 의학을 만들겠다는 이런 노력은 그저 헛될 뿐인 것은 아닌가?
한참 절망 속에 빠져있을 때 미국 소설가이자 시인인 레이먼드 카버의 글을 읽었다. 미국 미니멀리즘 문학의 정점이라는 평가를 받는 카버는 1988년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많은 단편 소설과 시를 남겼으며, 그를 기점으로 미국 문학은 상류층에서 하층민, 노동자의 삶으로 그 초점을 옮겼다. 그가 쓴 짧은 시 <의사의 말>과 단편소설 <대성당>은 아픔이 어떻게 우리의 말을 앗아가는지, 그런데도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의사의 말
그는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나빠 보인다고 사실 정말 나쁘다고 말했다
그는 그만 세기 전까지
한쪽 폐에서만 32개를 찾았다고 말했다
나는 감사합니다 자세히 알고 싶진 않았어요라고
거기에 얼마나 있는지가 중요하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종교가 있느냐고
숲속에서 무릎을 꿇으시냐고
폭포를 지날 때
안개가 얼굴과 팔을 엄습하면 도움을 청하시냐고
멈춰서 이런 순간들이 왜 생기냐고 물어보시냐고 말했다
나는 아직이요 하지만 오늘 시작해보려고요라고 말했다
그는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다시
다른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아멘이라고 말했고 그가 뭐라고 말했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다시 반복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완전히 알아들었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냥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그도 나를 보았다 그때
나는 뛰어올라 그와 악수하고 싶었다 나에게
세상 다른 누구도 준 적이 없는 것을 준 그에게
나는 굳어진 습관을 따라 감사를 표했을지도 모른다
시의 화자는 막 말기 폐암 진단을 받았다. 아마 이후 폐암으로 사망하게 되는 카버 자신의 경험일지도 모른다. 의사는 그에게 죽음의 선고를 전달하고 이 대화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종교에 관해, 다른 좋은 소식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 그의 당혹감을 간접적으로 전달해 준다. 당혹스러운 것은 화자 자신도 마찬가지다. 생존 가능성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기에 정확한 상태를 알려주려는 시도는 고통을 더할 뿐이다. 화자는 전형적인 행동 양식 뒤로 숨지만, 점차 현실은 흐려진다.
이 괴리감이 시의 절정을 이룬다. 의사는 질병과 치료에 관해 더 이야기하지만, 그 이야기는 화자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에게 계속 이어지는 설명은 그저 ‘무엇’일 뿐,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세상 다른 누구도 준 적이 없는 것”, 즉 사망선고를 전달한 의사에게 이미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 화자는 습관처럼 감사를 표하려고까지 한다. 이 와중에 의연한 척하려는 화자와 나쁜 소식을 전하는 당혹감에 빠진 의사가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은 서로 응시하고 있지만 실상 다른 곳을 쳐다보는 단절의 순간을 들이밀어 질병 앞 소통의 부재를 극화한다. 그 앞에서 소위 ‘소통의 기술’이 소용이 있는지.
작고하신 할아버지가 갑자기 몸을 움직이지 못하신다고 해서 응급실에 모시고 갔던 적이 있다. 이미 고령이셨기에 웬만한 문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근무했던 대학병원으로 모시고 갔지만 이미 직원도 아니었던 터라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의료인이라고 생각해주면 일 처리가 조금은 빠르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다. 근무하던 응급의가 영상 판독 결과를 가지고 스테이션으로 불렀다. 전립선암으로 수술을 받으셨던 적이 있지만, 상당히 시일이 지났기에 설마 하던 터였다. 하지만 암세포는 계속 몸집을 불리고 있었나 보다. 응급의는 전이된 암세포가 척수 신경을 침범했다고 했다. 잘 챙기지 못했다는 자책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위로의 말을 들었다면 마음이 좀 더 편안해졌을까. 이해한다는 말, 안타깝다는 말이 소용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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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우리는 이어지기 위해 몸부림친다
고통 앞에서 일상은 사라지고 질환과 벌이는 한판 씨름이든 동상이몽이든 오월동주든 삶은 다른 차원으로 건너간다. 어느새 깔리는 어스름처럼, 질환은 건너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외나무다리 같은 인상을 각인시킨다. 경험하는 자와 그것을 지켜보는 자의 말문을 막아서는 파멸의 전조. 그것은 불안의 학술적 의미, 즉 심리학적 막연한 불쾌함, 실존철학적 허무의 위기를 별다른 설명 없이도 깨닫게 하는 곳곳에 널린 경험이지만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다.
질병이 가져오는 단절, 그 좌절 앞에서
이해의 가능성을 보여준 카버의 작품
눈을 감아 나의 확실성을 포기할 때
나의 손과 타인의 손을 포갤 때
삶이 간혹 이어질지 모른다는 소망
김연수 소설가가 아름다우면서도 간결한 표현으로 다시 번역하여 출간한 카버의 단편집 <대성당>. 여기에 소개한, 그가 삶의 말미에 쓴 표제작 “대성당”도 아름답지만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또한 삶에 불현듯 찾아온 이겨내지 못할 고통 앞에 타인이 내민 작은 위로를 간결한 필치로 담아내고 있다. 진정성이 우리 삶을 가득 채운 고통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힘이 되리라. 투박한 손이 내민 검은 빵처럼. 출처: 교보문고
카버의 소설 <대성당>의 주인공이 마주한 것은 그 불안이리라. 아내의 오랜 펜팔인(사실 필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라 녹음테이프가 가교 역할을 하니 테이프팔(tape-pal)이라고 해야 할지) 맹인이 하룻밤 묵으러 집에 찾아온다는 것이다. 어찌 됐건 아내가 이성을 만난다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거부감을 표하는 차원이 아니다. 아내의 오랜 지기인 그는 어쩌면 주인공보다도 아내를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너무나 불편한 데다가, 맹인을 접한 경험이 없는 주인공은 도무지 손님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다.
결국, 맹인은 집을 방문하고, 주인공은 기어이 맹인에게 식사 자리에서 기차 여행 중 앉은 방향에 따라 풍광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실패한다. 아내와 맹인의 대화에 도무지 참여하지 못하던 주인공은 “그가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어” 티브이를 켠다. 사실 그 상황에서 지친 것은 주인공 자신이었으리라. 아내는 화를 낼 것처럼 보이다가, 피곤했는지 이내 잠들어 버리고 티비 앞에는 두 사람만 남는다.
티브이에는 스페인의 야외 행렬이 비치고 있다. 주인공은 화면에 나오는 것을 맹인에게 설명하려고 애를 먹는다. 화면은 어느덧 대성당의 전체적인 모습과 그 주변 풍광으로 넘어간다. 주인공은 뜬금없이 묻는다.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이 있습니까?” 맹인은 큰 노동력이 들어가고 건축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알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대성당을 말로 옮기려던 주인공은 결국 실패를 자인한다. 그때, 맹인이 제안을 하나 꺼낸다. “그런데 말이야, 내 부탁 좀 들어주겠나?” 펜과 두꺼운 종이를 가져오라고 부탁한 그는, 주인공에게 대성당을 그려보라고 하곤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친다. 바보짓이라고, 그림 실력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주인공은 그림을 그려나간다. 그에게 맹인이 말한다. “이제 눈을 감아보게나.” 계속 그림을 함께 그려나가는 주인공은 “그의 손가락들이 나의 손가락들을 타고 있음”을 느낀다.
타인의 경험을 경험할 수 없는 우리가 타인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음일지도 모른다. 질환이 가져오는 단절 앞에서 상대방의 아픔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저, 간혹 비슷한 고통을 겪은 사람이 자신의 기억에 비춰 상대방을 생각하는 것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질환의 이야기에 경의 표하기”라는 서사의학의 기치, 질환과 치료 앞 구체적인 가치로 표현되지 못한 환자의 가치를 발견해 존중하겠다는 서사윤리의 선언은 이 침묵 속에서 무용일지 모른다.
19세기 말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는 공황 발작으로 온 세상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되고 이것을 그림으로 옮긴다. 이 작품 <절규>가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은 이유는 그림에 드러나고 있는 그의 아픔과 긴장을 통해 나의 아픔이 이해 받을 수 있음을 느끼기 때문 아닐까.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 모든 좌절 앞에서 카버는 이해 가능성의 한 장면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손과 손이 마주할 때, 눈을 감아 나 자신의 확실성을 포기할 때 타인의 경험을 느끼는 건너감의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의 순간 말이다. 그렇기에 아픔 앞에서 의료윤리의 필요를 말한다는 것은, 의료인문학의 소용을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간혹 이어질 수도 있다는 소망을 따르는 일이다. 혹여나 찾아올지 모르는 현현(epiphany)의 순간을 기다리며 그 앞을 쓸고 닦는 일이다.
언젠가 한 교수님이 질문하던 일이 생각난다. “의과대학 학생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면 좋은 의사가 됩니까?” 아직 멋모르고 달려들던 때라, 그러길 소망한다고, 아니 그렇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제 생각한다. 인문학을 가르친다고 좋은 의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철학을 가르친다고, 역사를 안다고, 심지어 윤리를 배운다고 학생들이 좋은 의사가 될 것을 결단하진 않을 테다.[2] 단지 이 모든 노력은 언젠가 그들을 찾아올지 모르는 현현을 준비시키는 일, 삶을 불현듯 엄습하는 불안을 손잡고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만들 수 있도록 길을 닦아주는 일이다.
응급실에서 할아버지의 암 전이 소식을 듣던 이야기를 했었다. 지금 돌아보니, 응급의는 그 바쁜 와중에 아무 말 없이 수습을 기다려 주었던 것 같다. 이제서야 그때가 내겐 어떤 깨달음의 순간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때로 열 마디 말이 아닌 잠시의 침묵이 누군가에게 편안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사소한 몸짓이 상대방에게는 무엇보다도 큰 이해의 경험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아마, 침묵이 나지막한 위로로 다가옴을 경험했던 것 같다.
[참고문헌]
[1] Jarrett C. A calm look at the most hyped concept in neuroscience?mirror neurons.
Wired. Dec 12, 2013.
https://www.wired.com/2013/12/a-calm-look-at-the-most-hyped-concept-in-neuroscience-mirror-neurons/
[2] 물론 인문 교육을 통해 학생들을 더 나은 의사로 만들 수 있다는 실험적 증거들이 있다. 미술관에서 학생들에게 작품 감상을 가르치고 주기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을 때, 이후 학생의 진단 기술 습득이 빨라졌다는 것을 확인한 문헌 고찰이 대표적이다(Perry M, Maffulli N, Willson S, Morrissey D. The effectiveness of arts?based interventions in medical education: a literature review.
Medical education. 2011; 45(2): 141-8.). 그러나, 해당 논문이 말하고 있듯 이 결과가 실제 임상에서 행동 변화로 이어지는지에 관한 증거는 없다. 지금은 인문 교육을 의과대학 교육 과정에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교과과정을 완전히 새로 구성한 영국 페닌술라 의과대학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지켜볼 뿐이다. 관련한 내용은 출간 예정인 앨런 블레이클리의 “의학교육 속 의료인문학” (필자 역)에서 더 만날 수 있다.
김준혁/치과의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대학원생(의료윤리학) junhewk.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