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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과학

선택된 뉴런들의 연결망…기억의 실체를 보다

등록 2018-07-30 06:00수정 2018-07-30 10:40

[한겨레 미래&과학]
‘엔그램’ 연구로 본 기억의 과학

형광 기술·광유전학 발전 덕에
기억 형성때 활성 띠는 뉴런 확인
가짜기억 형성·상실기억 회복 등
기억세포 자극 실험서 잇단 성과

학습·경험때 선택된 뉴런들이
시냅스로 연결되며 기억 완성
기억 형성 순간 영상도 포착
“기억의 물리화학적 실체 확인”
학습과 기억 중추인 해마 부위의 신경세포(뉴런)들을 보여주는 실험용 쥐의 뇌 영상. 공포 자극을 줄 때 마침 활성(흥분) 상태에 있던 뉴런들(녹색 형광)이 그 공포 기억을 저장하는 기억 세포 집합이 된다.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 제공
학습과 기억 중추인 해마 부위의 신경세포(뉴런)들을 보여주는 실험용 쥐의 뇌 영상. 공포 자극을 줄 때 마침 활성(흥분) 상태에 있던 뉴런들(녹색 형광)이 그 공포 기억을 저장하는 기억 세포 집합이 된다.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 제공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기관에 흡수된 경험은 밀랍판에 도장 찍듯이 기억 속에 상을 남긴다’라고 말했다. 일종의 육체적 흔적을 가리키는 ‘도장 자국’의 은유가 완전히 터무니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기억은 뇌 신경세포(뉴런)에 생기는 물리화학적 변화라는 게 뇌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의 실체를 밝히는 연구가 활발해진 것은 무엇보다 새로운 실험기법 덕분이다. 기억이 형성될 때에 활성을 띠는 뉴런만이 빛을 내게 하는 ‘형광’ 기술과 빛을 쪼여 특정 세포들만을 활성 상태로 만드는 ‘광유전학’ 기술 덕분에, 이제는 기억에 관여하는 세포들을 식별해내고, 또 기억 세포들만을 선택적으로 조작해 실험에 쓸 수 있게 됐다. 강봉균 서울대 교수(생명과학부)는 “기억을 물질적 실체로 본 과학자는 20세기 초에도 있었지만, 기억이 실제로 세포들과 그 연결 지점인 시냅스에서 일어나는 변화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는 것은 최근 10여 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엔그램(engram)’이라는 오래전 용어가 기억 연구의 최신 흐름을 보여주는 열쇳말로 널리 쓰이고 있다. ‘엔그램’은 본래 100여 년 전 독일 과학자가 기억을 표상하는 뇌의 물질적 흔적을 가리키는 가설적인 용어로 제안했는데, 이제는 기억의 실체를 가리키는 적극적인 의미로도 쓰인다. ‘엔그램 세포’는 기억 세포를 가리킨다. 그동안 밝혀진 기억 현상은 엔그램의 메커니즘으로 어떻게 설명될까?

어떤 뉴런이 기억저장 세포로 선택되나

10여 년 전 기억 세포와 관련해 개척적인 연구결과를 잇따라 발표한 한진희 카이스트 교수(신경회로망연구실)는 “기억을 저장하는 뉴런들이 이미 정해져 있는 건지, 또는 어떤 뉴런들이 기억 형성 때에 선택되는 것인지는 당시 기억 연구에서 중요한 관심사였다”고 말했다.

2007년 그가 제1저자(당시 박사후연구원)로 참여한 토론토대학 어린이병원 연구진은 ‘특정 단백질(CREB)이 많이 발현되는 뉴런들이 기억 형성에 선택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학습과 경험이 기억으로 저장되는 순간에 마침 활성(흥분) 상태에 놓여 반응의 ‘경쟁력’을 갖춘 뉴런들이 기억 저장 세포로 선택된다는 학설을 처음 입증한 실험 연구였다. 연구진은 이어 2009년엔 기억 세포들을 조작해 특정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울 수도 있음을 처음 보여주었다.

한 교수는 “이후에 여러 연구들이 이어졌고, 그러면서 특정 기억의 형성 때에 활성을 띠어 경쟁력 있는 상태에 있는 뉴런들이 그 기억의 기억 저장 세포들이 된다는 게 이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기억 세포(엔그램 세포)를 중심으로 보면 기억 저장 과정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그림).

“단순화해서 생각해보죠. 뉴런이 100개가 있고 각 뉴런에 번호가 매겨져 있다고 합시다. ㄱ이라는 기억이 형성될 때 마침 3, 15, 59번 뉴런이 활성 상태에 있다면 그 세포들이 선택적으로 연결되는데, 그 연결이 곧 ㄱ 기억을 표상하지요. ㄴ 기억이 형성될 때에 3, 33, 98번 뉴런이 활성 상태에서 선택되면 그것이 ㄴ 기억의 기억 세포 집합이 됩니다.”(이용석 서울대 의대 교수, 생리학교실) 그러니까 어떤 뉴런들이 특정 기억 세포 집합에 선택되느냐는 사람마다, 기억마다 다르다.

회상은 어떻게 일어날까? 한진희 교수는 “소리, 냄새 같은 감각 자극이나 공간 정보 같은 어떤 단서가 입력될 때 연결된 기억 세포들이 다시 다함께 활성을 띠는 것이 곧 기억의 회상”이라고 말했다.

가짜기억, 연합기억, 기억의 상실…

식별된 기억 세포들을 다루어 그것들이 기억의 실체임을 입증하는 연구들이 이어졌다. 일본의 도네가와 스스무 연구진(리켄-엠아이티 신경회로유전학연구센터)은 기억 세포를 일부러 자극해 가짜 기억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2013년 발표된 쥐 실험 결과를 보면, 처음에 공포 자극을 가할 때 활성을 띤 공포 기억 세포들을 식별해두었다가 나중에 다른 환경에서 일부러 활성을 띠게 했더니, 공포와 관련이 없는 다른 환경을 공포의 대상으로 기억하는 가짜 기억이 만들어졌다. 엔그램 세포들이 기억의 실체임을 세포 조작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다른 실험은 연합된 두 기억이 기억 세포들에서 어떻게 겹쳐 저장되는지를 보여주었다. 2016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UCLA) 알시노 실바 연구진과 캐나다 토론토대학 어린이병원의 시나 조슬린 연구진은 시간 간격을 두고서 두 가지 공포 자극을 주고서 독립된 두 기억이 기억 세포들에 어떻게 저장되는지를 관찰하는 쥐 실험을 했다. 결과에서는, 첫 번째 공포 자극 때 선택된 기억 세포들이 활성 상태를 유지하는 중에 두 번째 공포 자극이 가해지자, 두 번째 공포 기억의 형성에 손쉽게 선택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슷한 시간대에 일어난 두 사건의 기억은 같은 기억 세포 집합에 겹쳐서 저장됐다. 이용석 교수는 “어떤 기억을 떠올릴 때 다른 기억이 연상되는 건 바로 이런 기억 세포들의 ‘중첩’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 기억상실은 저장 과정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일까? 기억상실 중 일부는 기억 세포들이 활성 상태로 나아가지 못해 기억을 불러내지 못하는, 즉 ‘인출의 문제’ 때문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험도 있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어린이병원의 폴 프랭클랜드 연구진은 유년의 기억상실 현상이 ‘저장의 실패’ 때문인지 ‘인출의 실패’ 때문인지를 확인하는 쥐 실험을 했다. 어린 쥐를 대상으로 유년의 특정 기억을 저장한 기억 세포들을 30~90일 뒤에 일부러 자극해 활성 상태로 만들었더니, 기억을 잃었던 어린 쥐들에서 기억이 일부 회상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6년에는 금세 망각하는 알츠하이머병 질환모델 쥐들에서 경험 당시에 활성을 띤 기억 세포들을 나중에 자극해 활성 상태로 만들자 망각한 기억을 불러내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도네가와 스스무 미·일 연구진의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이용석 교수는 “이런 연구들은 기억이 엔그램 세포에 저장되어 있더라도 인출되지 않아 기억상실로 나타날 가능성을 보여준다”면서 “기억의 인출 문제는 기억의 저장 못잖게 중요한 연구 주제”라고 말했다.

기억 실체의 ‘시냅스’ 현장 영상포착

사실 기억 형성의 실제 현장은 기억 세포 안에서 훨씬 더 작은 세계에 있다. ‘시냅스’라는 곳이다. 뉴런은 다른 뉴런과 신호를 주고받는 연결 통로로 수백~수만 개의 돌기를 지니는데, 이런 연결 지점을 시냅스라 부른다. 기억 세포들이 함께 활성을 띠며 연결된다고 할 때, 그 연결의 실제 현장은 시냅스들인 것이다.

최근엔 기억 형성의 순간에 특정 시냅스에서 연결이 이뤄지는 현장의 모습을 실제로 포착해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기법이 개발됐다. 강봉균 서울대 교수 연구진은 쥐의 뇌를 이용해 기억이 저장될 때 기억 세포들 간의 특정 시냅스들에서 일어나는 분자 수준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확인하는 기법을 개발해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활성 띤 뉴런들에서 오는 단백질 조각들이 연결 지점 시냅스에서 만나 서로 짝을 맞춰 결합할 때 비로소 노란 형광을 내도록 한 고난도의 기법이 활용됐다. 형광의 세기는 뉴런 간 연결 세기를 보여주었다.

왼쪽: 기억 형성에 참여한 기억저장 세포와 일반 세포의 수상돌기 비교. 기억 저장 세포의 수상돌기에 있는 시냅스 중에서 노란색 형광 표지를 띤 시냅스가 기억 저장 시냅스이다. 오른쪽: 형광 단백질을 이용한 시각화 기법으로, 기억 형성에 참여한 특정 시냅스들을 식별해 보여주는 영상. 빨간색 수상돌기 위의 노란색 형광표지가 있는 지점이 기억저장 시냅스들이 있는 곳이다. 강봉균 교수 연구진 제공
왼쪽: 기억 형성에 참여한 기억저장 세포와 일반 세포의 수상돌기 비교. 기억 저장 세포의 수상돌기에 있는 시냅스 중에서 노란색 형광 표지를 띤 시냅스가 기억 저장 시냅스이다. 오른쪽: 형광 단백질을 이용한 시각화 기법으로, 기억 형성에 참여한 특정 시냅스들을 식별해 보여주는 영상. 빨간색 수상돌기 위의 노란색 형광표지가 있는 지점이 기억저장 시냅스들이 있는 곳이다. 강봉균 교수 연구진 제공
강 교수는 “기억이란 결국에 기억 세포 간의 시냅스에서 일어나는 물리화학적 변화로 저장된다는 오랜 학설을 입증하는 최초의 시각적 증거”라고 말했다. 이로써 기억 세포들이 어떤 시냅스들에서 강하게 또는 약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 엔그램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이처럼 기억 세포와 시냅스의 변화가 곧 기억 현상의 실체라는 게 점차 확인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기억 현상의 복잡한 변화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무엇보다 인간 뇌에 있는 뉴런은 흔히 1000억 개로 추산되고 뉴런 간의 연결인 시냅스는 100조 개나 되는 것으로 추산돼 엄청난 규모의 복잡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최근 연구들은 학습과 기억 중추인 해마 부위를 주로 살펴보고 있지만, 장기기억은 피질에서도 저장된다고 잘 알려져 있다. 그 영역은 너무도 넓고 연결의 경우 수도 무궁무진하다. 주로 연구되는 서술 기억 외에도 솜씨나 운동을 기억하는 비서술 기억도 있다. 기억은 새로운 기억과 겹치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뉴런들과 원거리 신호를 주고받으며 기억의 저장소를 옮기기도 한다. 복잡하고 역동적인 기억의 현상을 ‘살아 있는’ 뇌에서 관찰하는 것은 아직은 먼 미래의 과제이기도 하다.

그래도 연구자들은 “기억이 어떻게 저장되고 회상되는지를 이제 눈으로 보고 그 물리적 실체를 다루면서 기억의 기본 원리를 조금씩 밝히고 있다”면서 그 자체가 큰 진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억 세포의 실체와 기억 메커니즘의 기본 원리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기존 연구 주제들과 더불어 ‘기억의 역동성’도 새로운 도전 과제에 추가되고 있다. 강봉균 교수는 “기억의 변화가 시냅스 수준에서는 어떤 변화로 나타나는지 그 역동성을 확인하는 일이 앞으로 기억 연구에서 새로운 도전이 될 듯하다”라고 내다봤다. 한진희 교수는 “저장된 기억이 이후에 역동적으로 어떻게 변화해나가는지를 살피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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