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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과학

호킹과 제인, 그 아픔의 공간, 작별의 시간

등록 2018-08-03 10:38수정 2018-08-03 13:47

[김준혁의 의학과 서사]
(10)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을 통해 본 돌봄과 애도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서 호킹 역을 맡은 에디 레드메인은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던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 마리우스 역으로 이름을 얻기 시작했으며, 이번 영화로 2015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병으로 계속 허약해지는 호킹의 모습을 연기하며 억지로 턱을 일그러뜨리다 보니 촬영 후 입 주위 근육이 발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IMDb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서 호킹 역을 맡은 에디 레드메인은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던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 마리우스 역으로 이름을 얻기 시작했으며, 이번 영화로 2015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병으로 계속 허약해지는 호킹의 모습을 연기하며 억지로 턱을 일그러뜨리다 보니 촬영 후 입 주위 근육이 발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IMDb
‘20세기를 빛낸 천재’라 하면 여러 사람이 떠오르지만, 그중 가장 도드라진 인물은 지난 3월14일 타계한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1942-2018)일 것이다. 블랙홀에 관한 그의 탁월한 이론, <시간의 역사> 등 과학 이해의 저변을 넓힌 대중 교양서가 그의 유명세를 뒷받침하지만, 그를 대중의 기억에 각인한 것은 휠체어에 파묻힌, 허약한 신체의 그가 기계를 통해 사람과 소통하는 모습이었다.

루게릭병(정식 명칭은 근위축성 측색경화증[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ALS]으로, 운동 신경이 점진적으로 퇴화하여 근육을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되어 가는 질병)에 걸린 호킹이 통제 불가능한 신체라는 우주에 갇혀, 저 광활한 우주의 신비를 누구보다 명철하게 탐구하고 있다는 역설적 상황은 마찬가지로 지구에 갇혀 별을, 우주를 내다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과 맞물려 어떤 시적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었다.

미국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 of Health, NIH)의 신경성 질환 및 뇌졸중 연구소가 소개하고 있는 근위축성 측색경화증의 특징을 읽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스쳐 지나간다. “환자는 증상이 처음 나타난 후 3~5년 사이에 대부분 호흡 곤란으로 사망합니다. 그러나 10% 정도의 환자는 10년 이상 생존합니다.” 물론 열 명 중 한 명이 결코 낮은 빈도는 아니지만, 이 질병이 환자에게 긴 삶을 약속하지 않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인류의 지적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감사하게도 스티븐 호킹은 21세에 발병하여 76세까지 생존했으니 그가 환자 중 특별한 사례였음은 분명하다. 이 결과는 보통 호킹의 공으로 돌아간다. 그에 관한 여러 언급들에서 볼 수 있듯이, 삶에 대한 호킹의 의지가 그토록 강했다거나, 다행히 그의 질병 진행이 늦었다고 생각하는 것.

의료의 도움을 받아 질병을 극복하는 데에는 환자의 의지가 크게 작용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가 질병과 함께 살아낸 삶을 의학과 환자만으로 정의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질병을 견디고 이겨내는 데에 가장 중요한 돌봄을 주는 가족과 보호자를 빼고서 이야기한다면 질병의 이야기는 반쪽으로 끝날 것이다. 호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천재성과 인류 지식에 대한 기여를 생각할 때 그를 돌본 사람들을 빼놓는다는 것은, 아리아드네 없는 테세우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비록 테세우스가 미궁에서 미노타우로스를 상대할 수 있는 용맹스러운 힘을 지녔다 한들, 돌아 나올 길을 안내한 아리아드네의 실 없이 살아날 수 있었을까.

여기에선 호킹의 첫 아내였던 제인, 그리고 그들의 삶을 돕다가 타래처럼 서로 엉킨 조너선, 일레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The Theory of Everything)>을 통해 질환과 돌봄의 이야기를 엿보려 한다. 환자의 아픔을, 그림자에 가려진 돌보는 사람을. 그리고 그들이 빚어낸 삶의 슬픔의 자리들을.

호킹과 제인의 이야기, 또는 질환이 앗아간 것들에 대하여

1962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신년 파티에서 우연히 마주친 스티븐 호킹(에디 레드메인 분)과 제인(펠리시티 존스 분)은 물리학과 인문학, 무교와 성공회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벽을 넘어 서로 끌린다. 이미 천재성을 뚜렷이 보이던 호킹은 모든 물리 현상을 설명할 단 하나의 이론(모든 것에 대한 이론: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을 조화시켜 하나의 수식으로 설명하려는 이론)에 끌려 물리학에 매진한다. 논문 주제를 찾던 그는 시공간의 시작, 즉 우주가 출발한 특이점(singularity, 수학적으로는 수학적 대상이 정의되지 않는 점을, 물리학적으로는 일반적 물리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점을 가리킴)에 매달려 물리학적 증명에 도달한다. 하지만 그 순간, 루게릭병이 그를 덮친다.

2년 정도밖에 더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호킹은 제인을 피하지만, 제인은 그와 함께할 것을 결심하고 호킹과 결혼한다. 아내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호킹 복사’(Hawking radiation, 양자 요동에 의해 블랙홀이 에너지를 방출하는 현상)를 발표하여 저명한 물리학자가 되고 두 아이를 얻은 호킹이지만, 그동안 제인의 삶은 무너지고 있었다. 남편을 돌보고 자녀를 양육하는 와중에도 스페인 중세 문학 공부를 놓지 않았던 제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벌린 것은 그 자신 백혈병으로 아내를 사별한 교회 성가대 지휘자 조너선(찰리 콕스 분). 그의 도움으로 제인은 돌봄의 삶을 견디며 셋째를 출산한다. 하지만 주변의 의심하는 눈초리 때문에, 그리고 서로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제인은 조너선을 멀리하려 한다.

설상가상, 폐렴으로 생사를 다투던 호킹을 살리기 위해 제인은 기관절개술(tracheostomy, 상기도 폐쇄나 장기간 인공호흡기를 사용해야 하는 경우 등 목을 절개하여 기관에 직접 삽관하는 술식)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것이 그의 하나 남은 의사전달의 통로, 목소리를 빼앗아 갈 것을 알면서도. 의식을 회복한 호킹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하여 눈 깜빡임으로 단어를 구성하는 철자판 사용을 시도하지만, 자신 또한 도구의 사용에 능숙하지 않기 때문에 어려워한다. 결국 입주 간호사 일레인의 도움을 받게 된 제인은, 이미 환자의 불편함에 익숙하여 능숙하게 의사소통을 해내고 호킹의 기호를 맞추는 일레인 앞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간다.

스티븐 호킹의 첫 번째 아내 제인 호킹(왼쪽)과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서 제인 역을 맡은 배우 펠리시티 존스(오른쪽). 영화는 제인이 쓰고 정경호 시인이 번역한 회고록 <스티븐 호킹, 천재와 보낸 25년(Music to Move the Stars: My Life with Stephen)>을 2007년에 다시 펴낸 책인 <영원으로 떠나는 여행: 스테판과 함께한 삶(Travelling to Infinity: My Life with Stephen)> 을 개작한 것이다. 존스는 영화에서 강인한 눈빛으로 환자인 남편을 묵묵히 지지해 내지만, 결국 지쳐가는 제인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연기해 보였다. 영화에서는 묘사되어 있지 않으나, 제인은 회고록에서 남편을 돌보며 우울증으로 고통스러웠다고 적고 있다.
스티븐 호킹의 첫 번째 아내 제인 호킹(왼쪽)과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서 제인 역을 맡은 배우 펠리시티 존스(오른쪽). 영화는 제인이 쓰고 정경호 시인이 번역한 회고록 <스티븐 호킹, 천재와 보낸 25년(Music to Move the Stars: My Life with Stephen)>을 2007년에 다시 펴낸 책인 <영원으로 떠나는 여행: 스테판과 함께한 삶(Travelling to Infinity: My Life with Stephen)> 을 개작한 것이다. 존스는 영화에서 강인한 눈빛으로 환자인 남편을 묵묵히 지지해 내지만, 결국 지쳐가는 제인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연기해 보였다. 영화에서는 묘사되어 있지 않으나, 제인은 회고록에서 남편을 돌보며 우울증으로 고통스러웠다고 적고 있다.
환자와 돌보는 자 모두에겐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서 프랭크가 자신의 질환 경험을 담아낸 에세이 <아픈 몸을 살다(At the Will of the Body)>. 프랭크는 의학의 사회적 측면을 연구하는 의료사회학자로, 이 책에서 그는 환자를 침묵시키는 질환과 의료 앞에 서서 자신의 내밀한 경험을 늘어놓는다. 보통과 달리 이런 지극히 사적인 담화가 공적 담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 질환 서사의 특징일 것이다. 그는 질환 서사를 체계화하여 서사의학의 틀을 닦았으며 국내에도 번역된 <몸의 증언(The Wounded Storyteller)>,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사회서사학의 지평을 연 <이야기를 숨 쉬게 하라(Letting Stories Breathe)> 등의 책을 저술했다. 출처: 알라딘
아서 프랭크가 자신의 질환 경험을 담아낸 에세이 <아픈 몸을 살다(At the Will of the Body)>. 프랭크는 의학의 사회적 측면을 연구하는 의료사회학자로, 이 책에서 그는 환자를 침묵시키는 질환과 의료 앞에 서서 자신의 내밀한 경험을 늘어놓는다. 보통과 달리 이런 지극히 사적인 담화가 공적 담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 질환 서사의 특징일 것이다. 그는 질환 서사를 체계화하여 서사의학의 틀을 닦았으며 국내에도 번역된 <몸의 증언(The Wounded Storyteller)>,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사회서사학의 지평을 연 <이야기를 숨 쉬게 하라(Letting Stories Breathe)> 등의 책을 저술했다. 출처: 알라딘
서사를 통해 아픔의 경험에 접근하려 한 의료사회학자 아서 프랭크는 자신이 심장마비와 고환암을 겪으면서 자신의 “질환”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또한 질병이 초래한 삶의 변화와 치료의 과정에서 겪은 다사다난함을 담아낸 에세이 <아픈 몸을 살다>에서 환자와 돌보는 사람의 애도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1]

책 중 “잃어버린 것들을 애도하기”라는 제목의 장(章)에서 프랭크는 질환이 가져오는 상실을 생각한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이전 삶도, 긴 투병 생활로 놓친 우정도, 되찾을 수 없는 삶에 대한 기대도 슬프지만, 무엇보다 다시 “절대로 같은 몸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깨달음이 그를 우울하게 만든다. 질병은 환자의 삶을 양분하는 칼과 같아 환자는 질병에 걸리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 젊음, 자신이 누리던 모든 것에 환자는 작별을 고해야 한다. 한 사람이 작별을 위해 거쳐야 하는 슬픔의 과정을 애도라고 한다면, 이것이 환자에게 필요한 애도의 시간이다.

더불어 프랭크는 고환암 치료 과정에서 아내 캐시가 상실한 것 또한 떠올리고, 자신이 그것을 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한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아내가 잃은 것 중에서 나는 아주 일부만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픈 사람을 돌보는 사람을 애도하는 시간을 갖기가 더 어려운 편이다. 또 애도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데도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

돌봄의 과정에서 돌보는 이는 많은 것들을 상실하며, 따라서 그들에게는 어쩌면 더 많은 애도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통 돌보는 사람은 환자에게만 전념할 수 없다. 경제 활동을 이어가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환자가 비운 가족의 자리 또한 최대한 비어 보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 돌보는 사람은 애도의 시간을 가지지 못하거나, 자신의 슬픔을 다른 여러 경험, 감정과 뒤섞어 받아들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루게릭병에 걸렸음을, 그리하여 살 날이 2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며 점차 자신은 몸속에 파묻힐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기 위해 호킹에겐 애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우주의 비밀을 풀고 있다는 기쁨을 느끼지만, 몸이 그 일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슬픔 또한 동시에 느낀다. 오랫동안 친숙하여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던 과거의 자신과 작별하고, 이제 새로운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 호킹의 고난은 그 자체로 무겁디무겁다.

호킹을 도와 함께 살아가기로 한 제인에게 닥친 어려움 또한 무거운 것은 마찬가지다. 그는 호킹과 함께하기 위해 그동안 해 오던 공부도, 삶도 포기해야 한다. 아이들을 낳지만,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쉽게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호킹이 눈부신 업적을 남기는 것은 아내에게, 동반자에게, 그를 지켜온 돌봄의 손길에 크나큰 기쁨이지만 그 삶은 오롯이 호킹의 것, 그 속에 매몰되어 자신의 삶이 완전히 망각되는 것은 아니다. 제인의 어머니가 그에게 교회 성가대 활동을 권했을 때, 그것은 제인에게 숨구멍을 내어주려는 시도였으리라.

한편 삶의 버거움이 호킹과 제인 사이의 거리를 떨어뜨려 놓을 때, 가족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조너선에게 호감을 느낄 때, 오랜 시간 고락을 함께해온 자신보다 간호사 일레인이 호킹을 더 잘 돌볼 때 제인은 죄책감에 빠져들었을지 모른다. 병자의 아내로 자신이 부족했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카메라는 그런 제인의 삶 구석을 드문드문 잡아낸다. 호킹이 아이들과 놀고 있을 때 식탁에서 중세 스페인 문학 연구서를 보며 공부하고 있는 제인, 어머니가 집에 와서 말을 거는 와중에도 청소기를 돌리는 데 여념이 없는 그의 모습은 질문을 던진다. 돌보는 사람의 삶은 어디에 있는 걸까, 하는 질문 말이다. 질문은 금세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가 혹시라도 잘 돌보지 못하는 것은 죄일까. 그의 감정적 부담은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 걸까. 또 그의 슬픔은, 나눠질 수 있는 걸까.

사회는 이런 것들을 빨리 잊어버리고 잘 “기능”하길 원한다. 주변 사람들은 이런 어려움을 듣는 일을 불편해하며, ‘어려움일랑 후딱 훌훌 털어버리고’ 환자가, 돌보는 사람이 치료에 매진하길 원한다. 의료진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바빠 여기에 귀를 기울일 시간이 없다. 무엇보다도 환자와 돌보는 사람이 원래 있었던 자리가 그들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빨리 나아서 원래 자리로 돌아와야지!”라는 상사의 격려는 그 속에 작은 비난의 씨앗을 품고 있다.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받는 일은 꾸욱, 하니 아프다.

아서 프랭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람들이 애도와 관련해 겪는 문제는 대부분 상실이 겹쳐서 생기기보다는 상실한 사람이 그만 슬퍼하길 주변에서 바라기 때문이다. … 사회는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이 상실을 그리 대단치 않은 일로 정리하고 잊은 다음, 건강한 보통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라고 압력을 가한다.”

호킹의 돌봄에 매진하여 놓쳐버린 자신의 삶을 슬퍼할 시간 같은 것은 제인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사회는 슬픔을 돌보는 것은 무익하다고 말하며 빨리 잊을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그것은 깊이 쌓여 결국 분노로, 좌절로, 관계의 파국으로 돌아온다. 호킹이, 제인이 서로를 놓아준 것이 단지 ‘다른 사람이 생겼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정리되지 않고 쌓여 온 감정은 회귀한다.

이 ‘억압된 것의 회귀’ 현상은 그저 개인적인 경험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2014년 따뜻한 봄날 전라남도의 어느 해상에서 수많은 학생과 탑승객이 차디찬 물속으로 사라져 갔을 때, 전 국민이 느꼈던 것은 생명을 앗아간 무능에 대한 분노를 넘어 한국 사회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자신이 어떤 안정감을 느끼고 거주해 오던 사회라는 틀이 무너졌다는 것에 대한 슬픔이었으리라. 이 슬픔에는 애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슬픔은 존중받아야 했고, 다독여져야 했으며, 상실을 통과할 수 있도록 서로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했다. 더불어 같은 슬픔이 반복되지 않을 수 있다는 확인이 필요했다. 그러나 국가는 이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숨기는 데 급급한 사람인 것처럼 정부는 슬퍼하는 사람들을 밀어내고 빨리 일상으로 복귀할 것을 명했다. 순식간에 범죄자를 지목하고 잘못을 전가한 그들은 사회가 다시 ‘정상적으로 기능’하길 원했다. 그러나 그 의도와는 달리, 애도의 시간을 허락받지 못하고 억눌려야 했던 슬픔은 돌아와 시민들이 나눠 든 촛불로 타올랐다.

물론, 삶의 복잡함 때문에 애도에 허락할 공간은 쉽사리 마련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슬픔을 잊고 밝은 모습을 보이라고 강요하기 이전에 그 삶에 강제된 변화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환자와 가족에게 의도적으로 여유를 마련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특히, 이런 노력을 돌보는 사람에게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질환 이야기의 주인공 환자와 의사 뒤에서 조력자 역할을 하다가 자신의 슬픔을 돌아볼 여유도 갖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서.

영화 마지막에서 호킹은 제인을 다시 만나 “우리가 만든 것들을 봐요“라고 말한다. 그들 앞에 서 있던 세 아이를 가리킨 말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그들이 살아온 시간, 기쁨과 슬픔, 영광과 고난이 뒤섞인 삶에 바치는 경의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 어느 자리에서 서로의 삶에 경의를 표하고 있는가. 질환 앞에서 환자, 돌보는 자와 함께 나누는 애도의 시간이 응당, 우리의 삶에 바치는 존경의 표현이 되리라.

[1] 메이가 번역하여 ‘봄날의책’ 출판사에서 2017년 출간한 이 책 <아픈 몸을 살다>는 저자의 진솔함과 깊이 있는 성찰, 역자의 읽기 편한 번역이 어우러진 좋은 책이다. 하나 아쉬운 것은 중요 개념의 번역어로, 예컨대 병의 이환에 의한 생물학적 변화를 의미하는 disease를 질환으로, 그 공적·사적 경험을 포괄하는 illness를 질병으로 번역한 것을 들 수 있다. 앓는다는 의미의 “질(疾)”에 덧붙는 “병(病)”이 신체의 문제를, “환(患)“이 그 상태로 인한 근심을 의미한다는 점 때문에 의료인문학에선 disease를 질병으로, illness를 질환으로 번역하고 있다.

김준혁/치과의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대학원생(의료윤리학)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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