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이래로 우주에서 찍은 지구 영상들은 지구를 하나의 유기적인 시스템으로 바라보게 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마지막 빙하기 이후 1만여 년에 걸쳐 현재에 이르는 지질시대인 ‘홀로세’와 구분해, 지금 지질시대를 ‘인류세’’로 부르자는 제안이
국제층서학위원회(ICS)의 소위원회(WGA)에서 한창 검토되고 있다. 인류세라는 이름이 제출된 건 지구에 대한 인간 활동의 영향이 눈에 띄게 커졌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대기중 이산화탄소 증가와 생물 멸종의 속도는 빨라지고 플라스틱, 알루미늄, 콘크리트 같은 전에 없던 물질이 널리 퍼지면서 지금은 이전 지질시대와 확연히 구분된다는 주장이다. 인류세라는 이름이 정식 채택되기까지 아직 여러 절차가 남았지만 그런 논의 자체가 지구 생태환경 위기를 드러내는 사례로 자주 얘기된다.
이에 맞춰 지구를 생물권과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이뤄지는 자기조절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가이아 가설’이 다시 조명받고 있다. 가이아 가설을 과학이론으로 오래 연구해온
영국 엑서터대학의 팀 렌턴 교수는 국내에도 잘 알려진 과학기술학자 브뤼노 라투르 교수(프랑스 파리정치학교)와 함께 최근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가이아 2.0’ 제목의 글을 실어,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에 인간과 과학기술은 가이아의 자기조절 능력에 생태환경 변화를 감시하고 알리는 자기인식 능력을 더할 수 있게 됐다며 새로운 단계의 가이아를 ‘가이아 2.0’으로 명명했다. 2.0으로 판올림한 가이아는 이전의 지구 시스템 모형과 무엇이 다를까?
지구를 생물-환경 시스템으로 보는 ‘가이아’
본래 1960년대 말부터 자라난 가이아 가설은 영국 대기과학자 제임스 러브록과 미국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가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생명체 있는 행성을 찾는 연구를 하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지구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발전했다. 이들은 35억 년 동안 지구가 생물이 살 만한 대기, 기온, 바다 염도를 일정하게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생물권의 되먹임(피드백) 작용 없이 불가능했으리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가이아’는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대지의 여신’에서 따온 것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자 윌리엄 골딩이 제안한 이름이다.
널리 읽힌 러브록의 책 <가이아>를 보면, 그는 지구 대기에서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수십억 년 동안 격변 없이 일정 수준에서 유지되고 탄소, 황 같은 생물권에 중요한 물질의 순환이 별탈없이 이뤄진 데엔 땅과 바다에 번성한 미생물을 비롯해 대규모 생물권에서 나오는 되먹임이 중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외계 행성의 대기 성분을 분석하면 그곳에 생물이 존재하는지 확인할 수 있듯이, 지구의 대기 성분은 생물권의 작용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보았다.
염분이 끊임없이 바다로 흘러드는 데도 바다 염도(현재 3.5%)가 수억 년 내지 수십억 년 동안 생물이 생존할 정도로 일정하게 유지되는 메커니즘도 생물의 작용을 빼고서 무생물 환경의 조절 메커니즘만으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미스터리였다. 무수한 해양 생물의 쇠퇴와 번성, 퇴적이라는 생물권의 작용이 염도 유지 메커니즘에서 중요했다고 그는 주장했다.
가이아 가설의 지지자들이 지구를 바라보는 관점은 생물과 무생물의 이분법이 아니다. 생물은 환경에 적응할 뿐인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주변 환경을 자신이 생존하는 데 유리하게 온후한 상태로 만들 수 있는 지구 시스템의 중요한 구성요소라는 것이다. 지구는 생물과 환경이 되먹임을 주고받으며, 마치 외부 온도를 감지해 설정 온도로 맞추는 온도조절장치처럼 자기조절을 행하는 거대 복잡계 시스템이다. 하지만 가이아 가설은 본래 지구를 유기적인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과학이론으로서 제안되었지만, 신에 빗댄 가설이 지나치게 단순한 목적론적이라는 비판도 계속 받아왔다.
플라스틱 쓰레기를 재활용 하는 소규모 공장들이 들어선 중국의 시골 마을 풍경. 플라스틱차이나 제공, www.plasticchina.org
자원의 순환경제, 분산된 연결망 중요
‘가이아 2.0’이라는 판올림한 이름은 “지구가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고 인간은 자기 행동이 지구에 끼치는 영향을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인식에서 나왔다. 가이아 2.0에서 지구 시스템은 어떻게 다르게 인식될까?
렌턴과 라투르 교수는 무엇보다 지구 생명을 지탱하는 자원의 순환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지구 내에서 순환하는 영양 자원은 “공짜로 얻는 태양 에너지와 이에 기반한 광합성의 1차 생산물”을 토대로 삼지만, “인간은 화석에너지, 인, 질소, 그밖에 원천 자원들이 지표면으로 되돌아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그것들을 뽑아쓰고 폐기물을 땅과 대기, 바다에 쏟아내고 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그러므로 자기인식을 갖춘 ‘가이아 2.0’에선 이제 인간이 자원의 순환 경제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의해 지속가능성이 달라지리라고 저자들은 주장했다.
지구 시스템의 자기조절을 일으키는 되먹임의 연결망도 가이아 2.0에선 달라졌다. 가이아 지구는 생물과 환경(대기권, 수권, 암석권)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기조절을 행했으나 ‘가이아 2.0’에서는 되먹임의 연결망인 ‘생물종 다양성’이 깨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가이아 2.0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선 수평적 정보 이동, 다양성의 기능, 분산된 제어가 자원의 순환 경제에서 더욱 중요해진다고 주장했다.
또 가이아 지구에선 완전히 다른 여러 메커니즘들이 길고 짧은 시간 단위에서 밀고 당기며 작동하지만, 가이아 2.0에서 지구는 이산화탄소 농도가 급격히 높아져 기후변화가 인간 개입의 증대에 취약하고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래서 가이아 2.0의 당면과제는 기후 안정화에 맞추어져야 하지만 현재 지구 시스템의 정치적 환경은 제각기 다른 이해관계들에서 위기를 제대로 논의하지도 대처하지도 못하고 있다고 저자들은 비판했다.
해변의 플라스틱 쓰레기들. 올해 ‘지구의 날’(4월22일)은 플라스틱 오염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영국 엑서터대학 제공
지속적인 변화 감지 ‘센서들’의 역할
해법은 무얼까? 렌턴과 라투르 교수는 최상의 해법을 알지는 못해도 지구 시스템의 변화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와 기록 활동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니터링과 기록은 가이아 2.0에게 ‘자기인식’을 가져다준다. 저자들은 이른바 ‘센서들’의 역할이 가이아 2.0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과학계가 중요하게 할 일이 있다. 센서들을 늘리고 성능을 높이며 결과를 빠르게 퍼뜨리고 그 모형을 개선해가며 대안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자들은 시민, 활동가, 정치인과 협력해 사태가 어디에서 잘못되고 있는지 빠르게 찾아내야 한다.” 이들이 말하는 ‘센서들’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렌턴 교수는 <한겨레>에 보낸 전자우편에서 “센서들은 가이아 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하는 기술, 과학, 인간의 조합을 뜻한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가이아 2.0은 의식 없이 자동으로 이뤄지는 가이아의 자기조절에 인간에 의해 자기인식의 되먹임이 더해지는 새로운 가이아“라며 “더 나은 세계를 만들고자 한다면 생명을 지탱하는 지구 시스템에 끼치는 우리의 영향을 인식하고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