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줄곧 사회비판적인 영화를 찍어온 80대의 거장 켄 로치 감독의 영화이다. 그는 아일랜드 현대사의 비극을 그린 2006년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이어 이 영화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심장 질환으로 병원에서 일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복지기관에서는 일 할 수 있는 상태라는 판정을 받은 목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 분), 그리고 직업을 얻기 위해 공부해야 하지만 아이를 키우느라 시간을 낼 수 없는 싱글맘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스 분)가 관료제 앞에서 좌절하는 이야기이자, 그 벽에서 두 사람이 피워내는 연대의 이야기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이 순간 K는 자기 머리 위에서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이 칼을 움켜잡아 자기 목을 직접 찌르는 것이 자신의 의무임을 분명히 깨달았다.” 카프카, <소송>
카프카적(Kafkaesque,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이 지닌 기괴하고 부조리한 분위기는 그 자체로 단어가 되었다) 소설의 한 극단에 있는 작품 <소송>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요제프 K는 어디에서 보냈는지 알 수 없는 2인조에게 이끌려 처형 장소로 간다. 이들을 이끌어 그 장소로 향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라는 점이 묘한 분위기를 형성하지만 말이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주어진 판결에 항소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했지만, 판사도 만나지 못했고 상급 법원도 가보지 못했다. 그저 빙빙 도는 관료제의 쳇바퀴에 끼어 시간을 낭비했을 뿐이다. 이제 그의 마지막 순간이 왔고 이 과오는 수정할 수 없다.
K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은 심장을 찌르는 비수이다. 마지막으로 “개 같다!”고 외치며 삶을 마감한 그의 위로 남는 것은 치욕뿐이다. 무엇을 위한 1년 동안의 동분서주였으며 무엇을 위한 삶이었는가. 절차와 규칙, 법과 규율에 얽매여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그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침묵 당했고 더 이상의 항소는 없다.
카프카의 소설을 지금 다시 쓰려 한다면 어떤 장치를 등장시키면 좋을까 생각해 본다. 100여 년 전 카프카가 시도한 것처럼 초현실적인 법원의 공간을 상정하거나(<소송>),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가까워지지 않는 성을 세우거나(<성>), 분명 그를 위한 문인데도 들어갈 수 없는 문 앞의 문지기를 그려야 할까(<법 앞에서>). 하지만 어쩌면, 아무 장치도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저 현실에서 사람들이 마주하고 있는 정부 시스템을 그 대상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한 번 들어갈 때마다 수많은 프로그램 설치를 요구하는 정부나 은행의 인터넷 페이지가 좋은 예가 되지 않을까. “접속을 위해서는 다음 프로그램을 설치하셔야 합니다,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삭제하고 다시 설치하시겠습니까? 접속을 위해서는 다음 프로그램을 설치하셔야 합니다”의 무한회로는 카프카적이지 않은가.
잘 짜인 법과 제도의 문 밖에서
오늘의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 또한 그 무한회로 앞에 섰다. 심장 이상으로 병원을 찾은 그에게 의사는 상태가 호전될 때까지 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제는 떠나보낸 아내를 간병하다 얼마 없던 저축도 다 소진하지 않았을까 싶은 그에게 일의 중단은 바로 생계의 위협으로 이어진다. 정부의 보조를 구해보지만, 담당 기관은 그의 건강이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주장하며 일자리를 구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지 않으면 보조금을 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노력마저도 블레이크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다. 구직 보조 신청은 인터넷으로 진행해야 하는데 그는 평생 컴퓨터를 잡아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본다. 수당 관련한 질의를 하기 위해 전화기를 든 블레이크는 두 시간 가까이 기다려 상담사의 목소리를 겨우 듣는다. 병원에서 일할 수 없는 상태라는 판정을 받았다고 말하는 그에게 상담사는 담당 의료인(이라고 하지만 국적도, 소속도 모호하며 의사인지 간호사인지도 밝히지 않는다)이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라고 판정했다면서 의사결정권자의 연락을 기다리라고 말한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몰라 답답한 블레이크는 센터를 찾아가지만 들을 수 있는 설명은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으며 모든 것은 규칙대로 진행된다는 말의 반복. 전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는 인간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기계음처럼 들린다. 센터에서 만난 사람 또한 마찬가지로 어떤 사정도 용납하지 않고 단지 규칙만을 반복한다. 이를 벗어나 조그마한 도움의 손길이라도 내미는 센터 직원이 오히려 상사에게 훈계를 듣는다.
한 장면을 더 그려본다. 이 와중에 만난 케이티는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다. 버스 탓으로 약속에 늦었다고 설명하는 케이티 또한 규칙을 이유로 상담을 거부당하고, 이런 처사에 격분한 블레이크가 목소리를 높이지만 두 사람 모두 센터에서 내쫓길 뿐이다. 그 덕분에 케이티와 블레이크는 교분을 나눈다. 단칸방 생활을 하다 조그마한 집을 겨우 얻었지만 생판 모르는 지역에 떨어진 케이티에게 블레이크의 도움은 단비와 같다. 목수 실력을 발휘해 집을 수리하는 블레이크를 비추던 카메라는 곧 어두워진 집을 비춘다. 케이티는 집안 이곳저곳을 계속 닦고 있다. 걸레로 거울에 쌓인 먼지를 훔쳐내고, 더러워져 있는 욕조 위 타일을 닦는 케이티. 깨끗해졌나 하는 찰나 벽에 붙어 있던 타일 하나가 떨어져 욕조 안에서 산산이 조각난다.
이 두 장면이 블레이크와 케이티가 처한 상황을 정물화처럼 그려내고 있다. 블레이크는 앞서 언급한 카프카의 <법 앞에서>처럼 법의 문 안으로 들어가려 시도한다. 하지만 문지기는 그의 출입을 계속 가로막는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입장을 허락할 수 없노라고 말한다”(<법 앞에서>). 센터는 이것저것을 묻고 규칙을 따르기를 강요하지만, 그가 원하는 혜택을 주지 않는다. “문지기는 이따금씩 간단한 심문을 하는데, 고향이니 기타 여러 가지를 묻지만, 그것은 높은 양반들이 으레 던지는 것 같은 관심 없는 질문들이고, 끝에 가서는 언제나 다시금 아직 들여보내 줄 수 없다고 한다”(<법 앞에서>). 전화와 인터넷의 벽을 넘어보려 애를 쓰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당신은 우리의 규칙에 맞지 않으니 들여보내 줄 수 없다는 거절뿐이다.
케이티는 두 아이와 자신을 돌보기 위해 애를 쓰지만, 주변 상황이 도무지 따라주지 않는다.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특별한 사람과 만났다고 생각한 그는 아이를 갖지만, 그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고 결국 떠나버린다. 둘째의 아빠도 마찬가지다. 케이티는 이제야 대학에서 공부를 해보려고 하지만, 현실은 당장 두 아이 먹을 것 챙기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마치 아무리 깨끗이 닦아도 타일이 떨어져 내리는 화장실처럼 말이다. 그의 모습은 마치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1부에 등장하는 팡틴을 떠오르게 한다. “팡틴이 해고당한 것은 겨울의 끝무렵의 일이었다… 날은 짧고 일거리는 없었다”(<레미제라블>) 팡틴에게 딸 코제트를 남기고 떠난 펠릭스 톨로미에스도 “어쨌든 무위도식자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서민의 밑바닥에서 피어났다고도 할 수 있는” 팡틴은 발버둥 쳐보지만, 점점 가라앉을 뿐이다.
카프카의 <소송>을 영화화한 거장 오손 웰스의 <심판>. 요제프 K(앤서니 퍼킨스 분)가 처한 상황을 초현실적 풍경으로 그려낸다. 아무리 달려도 벗어날 수 없는 무간지옥에 빠져 있는 요제프 K는 “우연히 또는 불운하게 체제의 장치에 말려들어 숨막히는 사회의 희생자가 된다.” 출처: IMDb
두 사람, 아니 겹쳐진 인물까지 다 하면 네 사람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다. 블레이크가 법 안으로 들어가려는 시도가 번번이 좌절되는 것은 법의 어떤 부분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일까. 법이 잘 짜이더라도 혜택이 제 시간에 그에게 도달할 수 있을까. 케이티가 아이들 밥 챙기느라 자신은 계속 굶다가 푸드 뱅크(무료 식자재 배급소)에서 무심코 깡통을 뜯어 허겁지겁 음식을 삼킨 뒤 눈물을 흘리는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그것은 치기 어린 선택을 했던 케이티의 책임일까, 아니면 그가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 못한 사회의 책임일까.
영화를 다룬 여러 리뷰는 “민영화된 복지” 때문이라고, 신자유주의로 인한 “복지의 축소와 왜곡” 때문이라고, “복지 삭감”의 결과라고 말한다.[1] 물론 복지 재정의 축소로 발생한 일이라는 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그에 겹친 카프카의 소설들을 생각하며 생각 하나를 곱씹어본다. 과연 복지 재정을 무한히 늘린다면 이 모든 일은 해결될까 하는 의심. 그리고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중략)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라고 적었던 블레이크의 마지막 항변을 발판 삼아 한 층 위를 내다본다. 재정을 무한히 늘리지 않아도 혜택을 줄 수 있다고 해도, 과연 체계가 인간을 존중할 수 있긴 한 걸까. 이 고민을 책임의 문제와 엮어보자.
건강과 책임
건강 관련한 여러 문제를 들여다보면 누군가의 책임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지점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컨대 간암에 걸린 것은 환자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과거 비(B)형 간염의 수직감염으로 인해 보균자가 되었다가 간경화가 오고 이것이 간암으로 이어진 경우일 수도 있다. 미국에선 사회경제적 수준이 낮을수록 간암 발병 소지가 높다는 연구가 발표된 바 있다.[2] 쉽게 말하자면 소득이 낮을수록, 소위 ‘험한’ 지역에 살수록 간암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발병 원인이야 이들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일 테지만, 여하간 환자가 병에 걸렸다면 이를 누구의 책임이라고 말해야 할까?
간암은 너무 크고 복잡해 멀게 느껴진다면, 충치를 생각해보자. 어른은 논의가 복잡할 수 있으니 아이에게 생긴 충치를 떠올리는 게 더 설명이 쉬울 것 같다. 어느 날, 아들의 입을 봤더니 치아에 검은색 구멍이 생겨 있다. 이건 단 것만 찾던 아이의 식습관 때문일까, 양치를 잘 시키지 못하거나 약한 치아를 물려준 부모의 탓일까, 아니면 과자와 초콜릿 광고를 무분별하게 내보내고 아이가 이런 음식을 사는 것을 막지 않은 사회의 탓일까. 정답은 아마 공동 책임이라고 말해야 하겠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누군가에게 책임을 귀속시키려 한다. 게다가 책임 지우기는 정치적 입장에 영향을 받는다. 보수는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고, 진보는 사회의 책임을 강조한다. 시쳇말로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수저계급론’의 대립이랄까.
분배의 문제는 결국 책임과 연결된다. 만약 누군가가 사회를 위해 희생했다면 그에게 응당한 대가를 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처럼, 누군가의 궁핍이 사회의 책임이라면 그에게 분배를 우선하는 것을 정의롭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분배 정의라고 부르며 이와 관련해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책은 아무래도 미국 철학자 존 롤즈의 <정의론>일 것이다. 그가 책에서 주장했던 세 가지 원칙 중 마지막 원칙인 “차등 원칙(The Difference Principle)”을 일반화한 것이 약자우선주의(prioritarianism)라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지금 가장 약한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경제적으로는 극빈자, 의료로 볼 땐 가장 큰 외상을 입었거나 질병이 가장 많이 진행된 사람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정책이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제도라는 한계 앞에 선 정의론
1990년대 들어 롤즈의 입장에 가해진 비판 중 하나는 그가 개인의 자율성을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것을 받으면 같게” 보는 롤즈의 시각에 철퇴를 가한 것은 캐나다 철학자 윌 킴리카였다. 그는 똑같은 것을 받았더라도 개인의 필요가 다르면 둘의 처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에게 같은 차가 있다고 둘의 경제 수준이 같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 같은 것을 받았더라도 각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차등은 인정해야 한다. 킴리카는 두 사람이 정원을 받았는데 한 사람은 텃밭으로, 한 사람은 테니스 코트로 사용해서 나중에 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누리게 되었다고 하여 그 사람의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약자우선주의에서는 테니스 코트로 사용한 사람이 이후 약자의 위치에 있게 되므로 그에게 이득이 갈 수 있는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따라서 개인의 선택이 아닌 것으로 발생한 불운은 보상하고, 개인의 선택으로 발생한 귀결은 개인의 책임으로 두는 것이 정의롭다. 이런 입장을 “운 평등주의(luck egalitarianism)”라고 부르며 21세기의 의료 정의와 관련한 논의에서 지지를 얻고 있다. 특히 보건의료에서 이 입장이 대두되는 것은, 앞서 살핀 것처럼 질병의 발생을 말할 때 개인과 사회의 책임을 딱 나눠서 말할 수 없는 건강과 질병의 특징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불운을 나누는 기준이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흡연을 예로 들어보자. 누군가가 오랜 흡연으로 폐암에 걸렸다고 하면 가장 쉬운 접근법은 그가 흡연을 선택했고 따라서 이 일은 그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흡연을 시작했던 이유가 학생 또래 집단의 압력 때문이었다면, 흡연을 멋진 것으로 포장한 광고의 영향 때문이었다면, 직장에서 사회생활의 필수적인 수단이었다면, 그래서 니코틴에 중독되어 끊을 수 없었다면, 흡연을 그저 그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의 배경인 근로연계복지의 논리를 단순화하면, 정기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의 건강 상태가 더 좋으며 건강 상태는 수당의 적절한 사용과 개인의 유지에 필수적이므로 일을 할 수 있는 수혜자는 구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물론 근면성의 함양, 도덕적 해이의 방지 등 또한 중요한 근거로 제시된다). 하지만 ‘일을 할 수 있는’이라는 기준은 그야말로 자의적이다. 블레이크의 경우처럼 병원에서 일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복지 체계에서 활용 중인 건강 문진표는 일을 할 수 있음으로 분류하는 소극(笑劇)이 벌어지는 것이다.
더 촘촘한 그물망을 치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서 카프카를 비겨 살핀 것처럼, 더 촘촘한 그물망은 그저 관료 행정의 강화를 의미한다. 그런 미래가 실현된다 해도 그다지 반갑지 않을 테다. 그것은 내 행동 하나하나를, 요소 하나하나를 분석해 규정하고 붙들어 매는 것을 의미할 테니까. 그렇다고 케이티의 경우처럼 ‘내어 버려지는 것’ 또한 거절하고 싶다. 옳지 못한 선택을 내릴 때 한 번 더 가지 말라고 누군가가 알려줄 필요가 있다. 자꾸 떨어지는 타일 벽을 붙들어 매어 줄 손길이 절실하다.
결국 ‘자존(自尊)을 지키며 자존(自存) 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자신의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더 나은 방향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손길, 그리고 내 손에서 벗어나는 일을 도와줄 힘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책임을 나누는 선을 최대한 잘 그을 수 있도록, 그리고 선택을 더 낫게 도울 수 있도록 계속 고민하고 시도할 책임이 주어져 있다.
[1] 위 표현은 각각 다음 기사에서 빌려왔다. 임현진. <나, 다니엘 블레이크> 과연 무엇을 위한 복지인가? <오마이스타>. 2017년 2월 12일.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97909. Meditator. ‘나, 다니엘 블레이크’?인간 상실, 불통의 복지는 어디에서 왔나. <미디어스>. 2016년 12월 16일.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4339. 최한별.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이것은 다큐멘터리다. <비마이너>. 2016년 12월 19일. http://beminor.com/detail.php?number=10435&thread=03r03.
[2] Shebl FM, Capo-Ramos DE, Graubard BI, McGlynn KA, and Altekruse SF. Socioeconomic Status and Hepatocellular Carcinoma in the United States. Cancer Epidemiol Biomarkers Prev. 2012;21(8):1330-1335. doi: 10.1158/1055-9965.EPI-12-0124
김준혁/치과의사, 부산대 의료인문학교실 박사과정(의료윤리학)
junhewk.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