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기세포를 분화해 만든 여러 인간 장기 유사체(오가노이드)들. 위는 지름 3~4㎜의 뇌 오가노이드(왼쪽)와 지금 0.8㎜의 식도 오가노이드를 보여주는 현미경 영상이며, 아래는 국내 연구진이 성숙화 기법을 이용해 만든 지름 2~3㎜의 소장 오가노이드 영상(왼쪽)과 속빈 구조를 보여주는 단면 영상. 오스트리아 분자생명공학연구원, 미국 신시내티어린이병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등 제공
크기가 좁쌀 정도 될까? 세포배양 접시에 담긴 지름 2~3㎜의 작디작은 세포 덩어리가 현미경 아래 놓이자 생명체답게 올록볼록 복잡한 구조를 드러냈다. 이토록 작은 것이 2만~3만 개 세포로 이뤄져 있다 한다. 그런데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다.
“줄기세포를 3차원 구조로 분화시켜 만든 인간 소장 유사체입니다.” 대전 생명공학연구원의 손미영 책임연구원(줄기세포연구센터)은 “흔히 ‘미니 장기’라고도 불리지만 정식 이름은 장기 유사체, 즉 ‘오가노이드’인데, 이건 인간 소장의 구조, 기능, 세포 구성과 비슷한 소장 오가노이드”라며 연구진이 최근
과학저널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에 발표한 오가노이드를 보여주었다.
길이 7m나 되는 인간 소장을 구성하는 주요한 세포 종류들이 2㎜가량의 세포 덩어리에 구현됐고, 거기엔 또 속 빈 공간과 융모도 있다. 영양분을 흡수하는 세포, 호르몬을 분비하는 세포, 장내미생물에 서식 환경을 마련해주는 세포, 해로운 외부물질을 공격하는 세포, 손상된 세포를 갱신해주는 성체줄기세포들은 이 세포 뭉치가 인간 소장을 번듯하게 흉내 내고 있음을 말해준다.
손 연구원은 “앞으로 인간 장 질환을 치료할 신약 물질의 독성이나 효능을 검사하거나 장내미생물이 실제 장 환경에서 어떻게 사는지를 연구하는 데 요긴하게 쓰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배양접시 안의 인체 질환 모형
오가노이드 연구개발이 활발하다. 2009년 네덜란드 연구진이 생쥐의 직장 성체줄기세포를 이용해 오가노이드를 만든 이래, 이제는 역분화줄기세포(iPSC), 배아줄기세포, 성체줄기세포의 분화를 조절해 간, 장, 뇌, 심장 등 여러 인체 기관을 모사하는 오가노이드들을 만드는 게 가능해졌다. 대부분이 밀리미터 수준의 작은 유사체다.
오가노이드 연구개발이 활발한 것은 그동안 발전해온 줄기세포 분화 기술 덕분이다. 역분화줄기세포나 배아줄기세포는 갖가지 장기의 세포들로 분화하는 능력을 갖춘 세포인데, 특정한 조건에서 특정한 때에 특정한 생화학 분자(분화조절인자)를 넣어주면 줄기세포는 다른 분화의 길을 걸으며 뇌, 장, 간 같은 장기로 성장한다.
오가노이드는 인체 질환이 어떻게 발병하는지를 보여주는 실험모형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2016년엔
뇌 오가노이드에서 지카 바이러스의 감염이 신경줄기세포 사멸을 일으켜 신경 발달 손상을 일으키는 소두증의 발병 과정이 학계에 보고돼 눈길을 끌었다.
최근엔 태아에서 망막의 색각 세포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망막 오가노이드 실험결과가 나왔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연구진은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서 망막이 만들어질 때 갑상선 호르몬의 작용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면 파랑, 빨강, 초록의 색각 세포들이 정상으로 발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배양접시 안의 오가노이드를 통해 보여주었다. 연구진은 “(엄마 뱃속에서 일어나는 태아의) 눈 발달 과정을 배양접시 안에서 들여다보는 셈”이라고 말했다.
비슷한 연구가 식도 오가노이드에서도 이뤄졌다. 미국 신시내티어린이병원 연구진은 줄기세포의 분화를 조절해
길이 0.8㎜가량의 식도 오가노이드를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특정 생화학 분자(Wnt)가 작용하면 식도가 위에 연결되지 못하는 ‘식도 폐쇄’를 일으킬 수 있음을 오가노이드 수준에서 재확인했다며 그 결과를
<셀 스템셀>에 보고했다.
암 질환을 연구하는 데에도 오가노이드를 활용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암 환자에서 얻은 암세포를 이용해 오가노이드를 만들어 암 질환 연구와 약물 효능 검사에 이용한다. 암 발병 과정을 배양접시 안에서 직접 보려는 시도도 중요한 도전과제가 되고 있다. 생명공학연구원의 정초록 책임연구원(줄기세포연구센터)은 “이미 있는 암세포로 만든 암 오가노이드와는 별개로, 정상 오가노이드에서 암이 발병하는 과정을 구현한다면 암 질환 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점점 더 비슷한 장기 유사체 만들기
아무래도 오가노이드 분야에서 큰 관심은 실제 장기와 얼마나 더 비슷한 오가노이드를 만드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실제 인간 장기와 비슷할수록 약물 독성이나 효능을 시험할 때 실제 인체에 끼칠 영향을 더욱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자가 배양접시 안에 든 소장 오가노이드를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있다. 대전/ 오철우 기자
이를 위한 도전과제 중 하나가 더 ‘성숙한’ 오가노이드 만들기다. 정초록 연구원은 “지금까지 구현된 오가노이드의 대부분은 태아에서 볼 수 있는 미성숙한 장기의 수준”이라며 “충분히 발달해 성숙한 유사 장기를 만들려는 연구가 경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출생 이후에 신생아의 장기들은 저마다 다른 환경에 처하면서 태아 때와 다른 성숙한 상태로 점차 바뀌는데, 이런 성숙한 오가노이드를 배양접시 안에서 만들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최근
생명공학연구원 연구진이 만든 소장 오가노이드는 새로운 성숙화 기법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이 이용한 성숙화의 비법은 면역세포에서 분비되는 면역물질이었다. 연구를 이끈 손미영 연구원은 “출생 이후에 신생아의 소장에는 장내미생물이 많아지면서 갖가지 면역반응이 일어나고, 이런 독특한 환경이 태아 시절의 소장과 다른 성숙한 소장을 만들어준다는 데 착안해 면역물질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오가노이드는 실제 소장에 더 가까운 특성을 보여주었다.
여러 오가노이드를 연결해 약물이 인체의 여러 장기를 거치면서 나타내는 독성이나 효능을 시험할 수 있는 복합 장치를 만들려는 시도도 있다. ‘인공실험체’ 개발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정초록 연구원은 “약물을 흡수하는 소장 오가노이드를 거치고, 약물을 분해하는 간 오가노이드를 거친 다음에 독성 반응을 보여주는 콩팥 오가나이드를 연결해, 신약 후보물질이 인체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을 평가하는 인체 모사 장치를 개발 중”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실험장치는 동물실험을 줄여주고 보완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뇌 오가노이드에 생명윤리 논의도
오가노이드는 당장에는 신약 개발, 약물 시험, 생물학 실험 등에 활용되지만, 미래에는 손상된 장기를 치료하는 재생의료에도 쓰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커지면서, 이와 관련한 생명윤리 논의도 늘고 있다. 류영준 강원대 교수(뇌신경윤리연구회 연구책임자)는 “세포 수준에서 이뤄지던 줄기세포의 생명윤리 논의와 인체 장기 수준의 논의는 아주 다른 문제”라며 “법률 체계를 정비하거나 새롭게 정의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오가노이드 은행’이 등장하고 기술이 상업화하면 줄기세포와 오가노이드의 수집, 보관, 분양 과정에서 기증자, 사용자, 보관자의 이해상충을 둘러싸고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또한 아직 그럴 단계는 아니지만 실험실에서 만들어지는 뇌 유사물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의 철학적, 윤리적 문제도 과학자들과 소통하며 다뤄야 할 중요한 이슈”라고 지적했다. 최근 미국에선 미국립보건원(NIH)의 지원으로 뇌 오가노이드에 관한 생명윤리 연구그룹(
브레인스톰 프로젝트, 책임자 윤인수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학 교수)이 정식 출범했다.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