쎄트렉아이 연구원들이 차기 위성 ‘스페이스아이-엑스’(SpaceEye-X)의 우주환경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쎄트렉아이 제공
“우리별 1호를 만든 연구소 1기 일곱명 가운데 박사학위 딴 사람 아무도 없어. 위성 만들어 올리느라 학위 딸 시간이 없었거든.”
1999년 1월~2000년 10월 방영한 <에스비에스> 드라마 ‘카이스트’에 나오는 대사이다. 우리별 1호는 1992년 8월11일 발사된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이다.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인공위성연구센터 연구원들은 영국 서리대에 유학을 가 그곳에서 우리별 1호를 만들었다. 우리별 위성 개발은 3호까지 이어졌고, 현재의 세계 3대 소형 지구관측위성 개발업체로 자리잡은 ‘쎄트렉아이’의 밑거름이 됐다.
우리별 위성 성공 뒤에는 지금은 고인이 된 최순달 당시 인공위성연구센터장(전기전자공학과 교수)의 주도면밀한 계획이 있었다. 그는 1989년 인공위성 기술을 보유한 영국 서리대를 방문해 한국 학생들의 ‘외상 유학’을 요구하며 국제공동연구협약을 맺는다. 외상은 거절됐지만 공동연구협약은 인공위성연구센터가 1990년 처음 시작한 과학재단의 우수공학연구센터(ERC)에 선정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됐다. 우수연구센터는 정부가 고급두뇌 양성과 기초연구 활성화를 위해 대학 내 연구집단에 10억원씩 9년 동안 지원을 한 사업이다. 최 센터장은 카이스트 교수로 임용되기 직전 과학재단 이사장을 지내 우수연구센터 사업 도입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 센터장은 1989년 8월께 이미 학생들을 모아 놓고 “등록금·기숙사 등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았으면 어떻게 돌려줘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며 인공위성 연구를 권했다. 칠판에는 ‘Devotion’(헌신)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해 가을부터 영국 서리대 유학이 시작됐다. 일부는 런던대(UCL)로 보내졌다. 박성동 전 쎄트렉아이 대표(이사회 의장) 등 서리대로 유학간 10명은 서리대팀이 제작하는 인공위성 작업에 참여하는 동시에 우리별 1호도 제작하면서 기술을 익혔다. 최 센터장은 한편으로는 한국전기통신기술연구소(현 에트리) 소장, 체신부장관, 과학재단 이사장 등을 지낸 이력을 배경으로 우리별 1호 사업을 체신부와 과학기술처가 지원하는 국책사업으로 만들었다. 서리대 유학생들은 낮에는 인공위성 제작에 참여하고, 밤에는 한국에 남아 있는 팀에게 습득한 기술을 전수했다. 이 덕분에 영국에서는 우리별 1호가, 한국에서는 우리별 2호가 동시에 제작될 수 있었다. 우리별 2호는 1호가 발사된 지 1년 1개월 만인 1993년 9월에 발사됐다. 당시 런던대 유학생 1기였던 김병진 쎄트렉아이 대표는 “지금 돌아보면 런던대 팀은 최순달 교수가 미래의 우리별 3호를 위해 미리 보낸 별동대였던 것 같다. 많은 국가들이 우리처럼 영국 서리대 인공위성 제작에 참여해 위성체 제작 기술을 배웠지만 우리처럼 독자적인 인공위성 기술을 구축하는 데는 실패했다. 인공위성 이론을 배우고 위성 카메라나 영상 및 신호 처리 등 탑재채 관련 기술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김 대표 유학 시절 함께 있었던 말레이시아 팀은 본국에 돌아갔지만 위성 제작에 실패해 쎄트렉아이한테 사업이 맡겨졌다.
쎄트렉아이 연구원들이 인공위성 조립실에서 전자부품들을 점검하고 있다. 쎄트렉아이 제공
인공위성연구센터는 이후 정권의 변화로 폐쇄 위기를 맞는 우려곡절 속에서도 1999년 5월 고유 국산모델인 ‘우리별 3호’ 발사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그해에 인공위성연구센터를 한국항공우주연구소(현 항우연)에 통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우수공학연구센터 평가에서도 ‘인력양성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최하 점수를 받아 3년 후속 연장지원을 받지 못하게 됐다. 김병진 대표는 “인공위성 기술이라는 것이 기판과 회로를 만들고 납땜을 하는 바닥기술이다. 소프트웨어를 잘 짠다고 논문이 나오지 않을 뿐더러 기술이 축적된 상태에서는 오히려 논문을 작성하지 않는다. 특허도 잘 내지 않는 분야이다. 기초연구비를 지원 받아 쌓은 기술이지만 지금 기준으로 보면 감사를 받을 수 있는 사항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영국 유학파 가운데 김 대표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박사학위를 밟지 않았다.
인공위성연구센터 연구원들은 정부의 결정에 반발해 벤처기업 쎄트렉아이를 창업했다. 김 대표는 “박 의장과 함께 인공위성 제작에 들어간 재료비, 발사비, 운영비 등 정부로부터 받은 연구비를 계산해보니 100억원 정도 됐다. 두 배만 해외에서 벌어오자고 했는데 이미 4천억원을 벌어들였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인공위성연구센터 출신 가운데 사장 직함을 가진 사람이 15명에 이르니 인력양성에 꼭 실패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고 덧붙였다.
쎄트랙아이가 수주한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인공위성 ‘칼리파샛’.
쎄트렉아이는 창업 첫달인 2000년 1월에만 적자를 기록했을 뿐 지금까지 흑자 행진을 이어오고 있다. 그해 2월에 싱가포르 정부와의 자문 계약이 처음 성사되고 4월에는 말레이시아 등 3건의 계약이 하루에 동시에 이뤄졌다. 인공위성연구센터 시절 쌓은 인적 네트워크가 성공의 바탕이었다. 소형 지구관측위성 제작업체로 본격 입지를 굳힌 것은 2001년 11월 말레이시아의 ‘라작셋 위성’ 수주이다. 당시 말레이시아 혁신정부는 발사도 신생기업인 스페이스엑스에 맡겼다. 스페이스엑스의 발사체가 계속 실패하면서 20004년에 납품한 위성은 2007년에야 발사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샛 1호(2006년)와 2호(2008년), 칼리파샛(2013년)을 잇따라 수주할 수 있었으며, 2010년에는 스페인의 민간업체 ‘데이모스 까스티야 라 만차’가 발주한 데이모스 2호 위성 제작사업을 따낼 수 있었다. 데이모스 2호는 1호를 제작한 영국 서리대 스핀오프업체 ‘에스에스엘’(SSL)과 에스에스엘을 인수한 프랑스 ‘에어버스 디엔에스’(D&S)와 경쟁해 수주한 사업이어서 더욱 의미가 깊다. 쎄트렉아이는 현재 해상도 0.5m급 ‘스페이스아이-엑스’를 개발해 해외 입찰을 진행중이다.
김병진 대표는 “인공위성연구센터가 기술력을 가진 인력을 한 팀으로 모으려 했던 것처럼 쎄트렉아이도 발사를 제외한 위성의 모든 영역을 담당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것이 경쟁력이다. 이를 위해 당장 필요한 인력보다 30% 이상을 확보해 교육하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위성본체와 탑재체, 지상체 등 전체 위성 시스템에서 어느 하나라도 수준이 떨어지면 전체가 무너지기에 더하기가 아닌 ‘곱하기 시스템의 맨파워’가 쎄트렉아이 기술력의 원천”이라고 했다.
이근영 선임기자
ky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