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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과학

죽음이 선물일 수 있다면

등록 2019-04-05 10:25수정 2019-04-05 10:44

김준혁의 의학과 서사 (17)
은모든 중편 ‘안락’…안락사에 관한 다소곳한 동화
우리는 환자 고통에 어디까지 손을 내밀 수 있을까. 출처: Alberto Biscalchin, Flickr
우리는 환자 고통에 어디까지 손을 내밀 수 있을까. 출처: Alberto Biscalchin, Flickr
미래 예측은 어렵다. 미래에 관한 이야기하면 앨빈 토플러 ‘제3의 물결’이나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같은 소위 거대 담론, 역사가 도도하게 흘러가는 모습을 그린 책들이 떠오른다. 이들이 내놓은 예측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을 것이다. 반면, 5년이나 10년 뒤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해보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 싶은 생각도 든다. 생각보다 많은 논의가 근미래에 관한 어떤 가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예컨대 자율주행 자동차가 그렇다. 아직 도로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달릴 수 있다는 확신이 없지만, 곧 자율주행 자동차가 거리에 등장하리라 생각하며 많은 사람이 환경, 구매 방식, 라이프스타일, 도시 설계 등에 일어날 변화를 말하곤 한다.

기술에서도 그렇지만, 제도 측면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곤 한다. 많은 쟁점은 어느 사안이 시행되었음을 가정한 상태에서 그 문제점을 짚는다. 예컨대 임신중절이나 동성 결혼 같은 논쟁적인 사안에서 찬반 근거로 정책이 시행되었을 때 발생할 장단점, 문제 등이 제시되곤 한다. 임신중절을 태아 생명권이나 여성 자기결정권이 아니라 이후 출생률에 미칠 영향이나 문화에 나타날 변화를 두고 논하는 것이 그 예다. 그런 사안 중에서도 안락사에 관한 논쟁은 최근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 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아래 연명의료법)이 시행되면서 여러 자리에서 논의와 충돌을 불러오고 있다. 미래에 대한 예측을 껴안으면서.

최근 한 신문 기사에서 담담하게 바라보기엔 너무 무거운 연명의료법 관련 사례를 읽었다.[1] 폐암 3기 진단을 받은 이 할머니는 최근 치매 환자와 비슷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고, 병원은 정밀검사를 권했다. 정밀검사 날 병원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가려던 이 할머니 아들이 주차된 차를 옮겨오는 잠깐 사이에 이 할머니는 실종되었다. 그날 저녁 이 할머니는 마을버스에 치여 크게 다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미 이 할머니는 연명의료법에 따라 사전연명의료의향서(아래 사전의향서)를 작성하며 임종과정에서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을 받지 않기로 한 상태였다. 아들은 사전의향서 내용을 이행하여 어머니의 고통을 멈춰달라고 요청했지만, 병원은 윤리위원회를 열어 연명의료를 유지하기로 했다. 어머니가 폐암 말기라는 것,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다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연명의료법 제2조 제5항이 규정하고 있는바,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것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 또는 말기환자라는 것이 문제였다.

연명의료법 제2조 제1항은 임종과정을 회생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아니하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하여 사망이 임박한 상태로 규정하였다. 이 할머니는 말기암 환자이지만 아직 암으로 사망이 임박한 상태도, 수개월 이내 사망이 예상되는 상태도 아니다. 교통사고로 인한 부상은 회복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할머니는 임종과정에 있지 않다는 것이 윤리위원회 판단이었다. 아들은 환자가 이미 사전의향서를 작성했고, 말기암에 더해 큰 외상까지 입어 하루하루 크나큰 고통에 빠져 있는데 이를 임종과정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현재 법 적용 대상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와 말기 환자이다. 전자는 사망이 임박한 상태로 담당의와 전문의가 판단을 내리지만, 후자는 대상 질병이 정해져 있다. 따라서 이 할머니 경우처럼 다른 질병이 겹친 경우나 말기 판단이 모호한 경우 법 조항만으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출처: 연명의료결정 제도 안내(의료기관용) 책자 27쪽
현재 법 적용 대상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와 말기 환자이다. 전자는 사망이 임박한 상태로 담당의와 전문의가 판단을 내리지만, 후자는 대상 질병이 정해져 있다. 따라서 이 할머니 경우처럼 다른 질병이 겹친 경우나 말기 판단이 모호한 경우 법 조항만으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출처: 연명의료결정 제도 안내(의료기관용) 책자 27쪽
이슈는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에 있다. 현재 법 규정처럼 특정한 질환에 해당하는 환자가 더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될 때에만 연명의료 중단을 허용할 것인가? 위 이 할머니 사례처럼, 법이 정하지 않은 질환이거나 질병이 겹친 상태에도 연명의료 중단을 허용할 것인가? 단지 연명의료 중단만 허용할 것이 아니라 투약하면 환자가 사망에 이르는 약물을 처방해주는 행위, 즉 의사 조력자살 또한 허용할 것인가? 이런 논의는 윤리 원칙만 가지고 결정할 수 없다. 당장 위에서 본 이 할머니만 해도, 환자 자기결정을 존중한다는 연명의료법 제1조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따져보기 위해 의존할 수 있는 매체 중 하나로 소설이 있다. 소설은 미래에 관한 예측을 품어 그것이 현실과 잘 맺어지도록 제시해야 한다는 핍진성(逼眞性)을 중시하기에 논쟁적인 사안을 살필 때 큰 도움이 된다. 장편소설 ‘애주가의 결심’으로 등단한 은모든 작가의 ‘안락’은 10년 뒤, 의사 조력자살이 허용된 상황을 가정하고 의사 조력자살을 시행하는 한 할머니와 손녀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관련 법이 “10년 후쯤이면 보다 적극적으로 논의가 이뤄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지만, 이미 논의는 적극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상태다.[2] 그렇다면, 소설이 이 상황을 어떻게 담아냈는지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자두와 안락

소설 속 세계는 10년 뒤 한국이다.[3] 자율주행 자동차가 운행을 시작하였고, 2018년 시행된 ‘웰다잉법’, 즉 연명의료법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법안이 통과될 것인지가 사람들의 시선을 불러모으고 있는 시점. 이야기는 화자인 지혜가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의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시작한다. 동창인 이삭은 신앙심이 투철한 집 자녀였지만 장애를 안고 태어난 동생 바울을 잃고 “불확실하고도 실체를 알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본문). 지혜에겐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을 신조로 삼아 지금까지 살아오신 분이다. 이대 앞 밥집을 열며 “못해도 오 년 안으로는 반지하 신세 면해야지”하셨던 할머니는 오 년 만에 이 층 건물로 가게를 옮겼고, “가게를 세 딸 중 한 명에게 잇게 하겠다” 공언하신 것처럼 지금 밥집은 작은이모가 운영한다(본문).

가게를 물려줄 즈음 할아버지를 떠나보낸 할머니는 10박 11일 숨 가쁜 일정으로 유럽 여행을 다녀오시지만, 여든을 훌쩍 넘기신 연세에 찍은 사진엔 “위풍당당한 모습”이 담겨 있다(본문). 그리고 할머니는 선언한다. “난 못해도 앞으로 오 년 안에, 나머지 싹 정리하고 개운하게 갈 거야. 마음 딱 먹었으니까, 그렇게들 알고 있어” (본문). 할머니가 말씀하신 시점에서 아직 의사 조력자살 관련법은 통과된 상태가 아니었기에 가족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지만, 이윽고 법안이 통과되면서 할머니의 선언은 엄청난 무게를 지닌다. “육체적?정신적으로 지속적인 고통에서 벗어날 가망이 없는 상태, 삼 개월 이상의 숙려 기간, 자의에 의한 선택 등”이 조건으로 제시된다(본문).

시간은 금방 흐르고, 할머니가 단단히 말씀해두신 “수명 계획”은 점차 가까워진다. 그동안 지혜는 이삭을 만나고, 연락이 닿지 않아 자연스럽게 헤어지고, 봉사활동에서 다시 우연히 만나 관계를 이어간다. 논문 작업 중이던 이삭은 노트북과 휴대폰을 모두 도난당한 데다가 동창에게 사기까지 당해 그동안 모은 것을 모두 잃고 인문학 협동조합에서 조합원으로 생활하고 있다.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상담도, 강의도 하던 이삭은 이전의 불확실함을 벗고 “말갛고 더없이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다(본문). 한편, 담금주를 만드는 법을 배우러 할머니를 찾아갔던 지혜는 할머니가 정말로 계획을 진행하고 계신다는 것, 그리고 파킨슨병으로 고생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혜 어머니는 “엄만 정말 나더러 어떻게 살라고!”라고 화내며 할머니의 계획에 반대하고, 지혜는 “엄마는 진정으로 할머니를 위하는 게 우선이 아니라, 할머니를 잃고 나서 본인이 겪을 괴로움이 더 우선인 사람”이라고 쏘아붙인다(본문).

은모든 작가 ‘안락’은 10년 뒤 한국, 의사 조력자살 법률이 통과된 한국에서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한 할머니를 바라보는 손녀가 그 과정에서 자신과 가족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담담히 서술하는 방식으로 짜인 소설이다. 이 책을 포함한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기획은 책과 함께 소리책을 제작하였고, ‘안락’ 또한 배우 한예리의 목소리로 녹음되었다.
은모든 작가 ‘안락’은 10년 뒤 한국, 의사 조력자살 법률이 통과된 한국에서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한 할머니를 바라보는 손녀가 그 과정에서 자신과 가족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담담히 서술하는 방식으로 짜인 소설이다. 이 책을 포함한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기획은 책과 함께 소리책을 제작하였고, ‘안락’ 또한 배우 한예리의 목소리로 녹음되었다.

할머니는 점차 거동이 어려워지시고, 마지막 한 달은 휠체어를 타고 딸들의 간호를 받는다. 그리고 할머니가 선택한 날, 생일잔치에 초대받은 기분으로 오길 바라신 할머니의 뜻을 따라 옷을 차려입고 가족이 모두 할머니 집에 모인다. 모두에게 당부의 말을 남긴 할머니는 지혜와 담가뒀던 자두주를 가족과 의료진, 경찰과 나눈다. “입술을 넘어 혀끝을 적시듯 조금씩 맛보는” 자두주의 숙성된 맛을 남기고 할머니는 “다들 애 많이 썼다. 고맙다.” 말씀하시고 눈을 감는다(본문). 희미한 미소와 함께.

은모든 작가는 이 소설 ‘안락’이 “어른들을 위한 동화 같은 이야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한다(작가 노트). 그 말처럼, 소설은 안락사가 가져오는 여러 불편한 감정과 논의 위에 살짝 초콜릿을 입힌 것 같이 읽힌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랑이가 울컥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지만, 의사 조력자살을 택한 할머니는 소설에 감각을 더하는 자두주처럼 “독한 뒷맛이 입안에 남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 가족과 작별을 고한다(본문). 안락사 반대의 목소리는 소설 초반 전단에 “고려장이 부활하면 대한민국이 무너진다!”라는 문구로 등장하지만, 비중은 없다(본문). 소설이, 작가가 닿으려고 했던 지점이 안락사를 둘러싸고 있는 논의가 아니라 안락사를 택한 개인의 삶을 조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일 테다.

짧은 분량으로 할머니의 생애를 담아낸 소설은 반복해 말하지만 자두주를 닮았다. 조금씩 맛보게 되는 것 하며 산뜻하고 달콤한 기운이 도는 것에서. 하지만 ‘안락’을 읽는 일은 시큼하기도 하다. 초콜릿이 녹아내리고 나면 죽음이라는 씨앗이 묵직하게 남기 때문이다.

죽음, 누구도 직접 경험할 수 없는 한계의 이름

죽음은 누구나 겪는 당연한 일이지만, 막상 생각하기 쉽지 않다. 죽음을 보는 일은 흔하다. 죽음이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 우리 죽음은 병원에서 일어나기에 옛날 사람들이 보아온 죽음과 우리가 보는 죽음은 다르다. 피와 체액, 세월에 쌓인 더께에 둘러싸여 평생 잠들던 침대에서 맞이한 죽음과 달리, 의료화한 죽음은 소독되어 청결한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죽음을 보는 일과 죽음을 겪는 일은 명백히 다르다. 남들이 저렇게 죽으니 나도 저럴 것이라고 생각한들 내 앞에서 죽어간 사람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것을 경험했는지 알 수 없는 까닭에.

내가 상상하는 죽음은 전신마취에 들어가는 상황과 비슷하다. 바깥에서 들어오던 온갖 감각 자극들, 시각, 청각, 촉각 등이 어느 순간 사라지는 일. 하지만 감각이 사라진 것일까? 감각을 받아들이던 ‘내’가 감각을 종합하는 과정을 그만 멈춘 것일까? 톨스토이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마지막 장면은 죽음 경험을 전달하고 있지만, 그 경험은 내 상상과 무척 다르다. 죽어가던 이반 일리치는 의사가 죽음을 선고하는 소리를 듣는다. “끝났습니다!”[4] 그는 자신에게 말한다. 죽음은 끝났고 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의사가 내린 선고와 소설 결말 사이에는 아직 틈이 있다. 톨스토이가 그린 것은 의학이 죽음 선고를 내리는 시점과 한 개인이 실제로 사망하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죽음의 현실을 돌아보며 이 간극을 한 번 더 돌아볼 일이다. 내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의학이 나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순간, 그리고 ‘내’가 더 존재하기를 그치는 순간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을 강조했다. 그는 주저(主著) ‘존재와 시간’에서 결단성(Entschlossenheit)을 말한다.[5] 다른 사람들을 따라 살 뿐이던 누군가가 고유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그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무슨 결단인가? 불안을 받아들이기로 하는 것이다. 무엇이 불안한가? 죽기 때문에 불안하다. 보통 사람들은 불안을 공포로 바꾸고 공포를 정복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러나 그저 살아 있을 뿐이던 누군가는 이 불안을 끌어안는 것을 통해 비로소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우리가 죽어가는 자의 존엄함을 말할 때 막연히 받아들이는 생각이 이것이다. 병상에 누워 그런데도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다, 자기 죽음을 직접 결정하기로 마음먹은 자를 존엄하다고 부른다. 그가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삶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은 흔하게 찾아오지 않는다.

의학이 죽음을 선고하는 순간은 심장이 박동을 멈추는 순간 또는 호흡이 정지하는 순간이다. 지난 세기, 장기 이식 기술이 개발되고 생명 유지 장치가 발달하면서 뇌사(腦死), 즉 뇌 활동이 비가역적으로 정지된 상태 또한 죽음을 정의하는 기준에 추가되었지만 일단 심장과 폐 활동 여부가 오랫동안 죽음을 진단하는 기준이었다. 의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죽음을 정의하는 일은 점차 복잡해지고 있다. 예컨대,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자신의 신체를 냉동시켜 놓고 치료법이 개발되었을 것이라 상정되는 미래의 어느 한 시점에서 해동해달라고 요청했다면, 이 사람은 죽은 것일까.

뇌사자와 일반인(의과대학생) 뇌를 기능적 자기공명영상법(functional MRI)을 통해 촬영하여 대뇌 혈류(cerebral blood flow)를 확인한 영상으로 뇌사자에서 혈류는 거의 관찰되지 않는다. 조영제를 사용한 촬영을 통해 대뇌 혈류를 확인하는 것이 표준적인 방법이지만 가족이 신체에 손대는 것을 원하지 않아 연구자들은 자기공명영상으로 이를 대체했다. 출처: 논문[6]
뇌사자와 일반인(의과대학생) 뇌를 기능적 자기공명영상법(functional MRI)을 통해 촬영하여 대뇌 혈류(cerebral blood flow)를 확인한 영상으로 뇌사자에서 혈류는 거의 관찰되지 않는다. 조영제를 사용한 촬영을 통해 대뇌 혈류를 확인하는 것이 표준적인 방법이지만 가족이 신체에 손대는 것을 원하지 않아 연구자들은 자기공명영상으로 이를 대체했다. 출처: 논문[6]
‘내’가 더 존재하기를 그치는 순간은 무엇이라고 정의하기 어렵다. 심지어 프랑스 작가 모리스 블랑쇼는 죽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간에, 죽었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을 인지할 수 있는 자신 또한 사라진다. 즉, ‘나’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무리 해도 알 수 없다. 수학에서 말하는 극한 개념과 비슷하다. 무한히 어떤 점을 향해서 가지만 아무리 해도 그 점에 도달할 수 없다. 예컨대, 0.999… 뒤에 무한히 9를 붙여 나가도 1에 도달할 수는 없다. ‘0.999… = 1’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도약이 있어야 한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내 시간은 아무리 확장되어도 그 안에는 나의 죽음이 들어있지 않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은 내 시간 밖에 있다. 내 시간의 종결이 내 죽음과 같다고 받아들이는 일에는 어떤 도약이 필요하다.

이 세 가지 고민을 매듭 하나로 묶어 놓는 것이 안락사다. 안락사에서 죽음의 결단, 의학의 죽음 선고, 그리고 내 시간의 종말 세 가지 요소가 모두 만난다. 대상자는 죽음을 결단해야 한다. 의학은 그에게 죽었다고 선고하고 죽음의 약을 처방한다. 물론 이 죽음 선고는 앞서 심장, 폐 활동 정지와는 달리 가역적이긴 하다. 마지막, 약을 먹지 않는 선택 또한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그리고, 대상자는 살아온 시간의 끝을 맞이한다. 이 세 가지 지점에 사람들은 여러 가지 잣대를 들이댄다. 죽음을 결단하는 것은 자살이다, 아니다 하는 잣대, 의학이 죽음을 선고할 권리가 있다, 없다 하는 잣대, 마지막으로 삶과 시간의 종말에 대한 철학적, 종교적 잣대까지. 그렇기에 안락사에 대한 논의는 무척이나 무거워 쉽게 삼켜지지 않는다.

이 위에서 소설 ‘안락’을 다시 생각한다. 이토록 무거운 일에 관한 동화라니, 누군가는 얕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텍쥐페리의 동화 ‘어린 왕자’ 또한 웬만한 철학서보다 무거운 질문과 깊은 성찰을 담고 있지 않은가. ‘안락’이 담은 할머니의 삶과 마지막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본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우선하고 있는가. 감히 여기에서 삶을 주관하는 하나의 법칙 대신 이 모든 고민을 함께 나누고 결정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이, 그런 일을 하는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한 가지 잣대로만 죽음을 바라볼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김준혁/치과의사, 부산대 의료인문학교실 박사과정(의료윤리학) junhewk.kim@gmail.com

참고문헌

[1] 박소희. 내 어머니는 살아 있습니까, 죽고 있습니까. 오마이뉴스. 2019년 3월 13일.

[2] 은정진. 은모든 작가 “죽음은 두려운 존재 아닌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것”. 한국경제. 2018년 12월 23일.

[3] 은모든, 『안락』 [전자매체본], 아르테, 2018.

[4] 레프 톨스토이, 고일 옮김, 『이반 일리치의 죽음』 [전자매체본], 작가정신, 2011, “이반 일리치의 죽음”.

[5] 마르틴 하이데거, 전양범 옮김, 『존재와 시간』, 동서문화사, 2008, 53~54절.

[6] Yun TJ et al. Brain Death: Evaluation of Cerebral Blood Flow by Use of Arterial Spin Labeling. Circulation. 2011;124(23):2572-2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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